Wednesday, May 5, 2010

내 영혼의 오두막

<내 영혼의 오두막> 김 영봉 목사: “누구나 아프다”(Everybody Hurts)--창세기 3:1-7

1.
윌리엄 폴 영(Wm. Paul Young)의 소설 <오두막>(The Shack)은 맥켄지 앨런 필립스(Mackenzie Allen Phillips)라는 가상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줄여서 ‘맥’이라고 부르는 그는 미국 중서부의 한 농장 지대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담한 사람이었고, 보수적인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자주 술에 만취하여 부인과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입니다. 저녁 식탁에서 그는 끝도 없는 설교와 훈계를 늘어 놓았고, 즉석에서 내는 성경 퀴즈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끔찍한 벌을 주곤 했습니다.

열 세살 되던 해, 청소년 수양회에 갔다가 맥은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는 지도 교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은혜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 지도 교사가 아버지의 직장 동료라는 것을 깜빡 했습니다. 며칠 후, 지도교사는 맥의 아버지에게 충고를 합니다. 잘 한다고 한 것일텐데, 그것이 맥에게는 큰 화를 초래합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이모집에 보내 놓고는 뒤뜰에 있는 참나무에 맥을 묶어 놓고 허리띠로 때리고, 성경 구절을 들이대면서 훈계를 합니다.

약 2주일 후, 맥은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되자 가출을 결행합니다. 열 세살 나이의 소년에게 세상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크게 탈선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갑니다. 20대 초반에는 신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만나 화해했으며, 내넷 새뮤얼슨(Nannette A, Samuelson)과 결혼하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들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었는데, 두 아들은 독립했고, 조시(Josh)와 케이트(Kate) 그리고 늦둥이 다섯 살 미시(Missy)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해, 노동절 연휴, 맥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왈로와 호수 주립 공원(Wallowa Lake State Park)에 야영을 하러 갑니다. 간호사인 아내 낸은 교육을 받으러 시애틀에서 주말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맥은 세 아이와 꿈 같은 시간을 지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아들 조시와 딸 케이트가 카누를 타고 놀다가 그만 뒤집혀 버립니다. 맥은 강물로 뛰어 들어 허우적 거리는 케이트와 조시를 구조해 냅니다. 한 참 후 뭍으로 올라와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돌아 보니, 벤치에서 색칠 놀이를 하고 있던 미시가 사라졌습니다.

경찰이 오고 비상이 걸렸습니다. 간장을 태우는 초조한 시간이 지난 후, 경찰은 깊은 산 속, 버려진 어느 오두막에서 미시의 피 묻은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미시의 시신은 찾지 못했고, 경찰은 미시를 살해한 범인은 어린 소녀들만 노려 범행을 저질러 온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만을 밝혀 냅니다. 다섯 살 어린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인적 없는 오두막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되었는데, 그 시신 조차도 수습하지 못한 것입니다.

2.
그 이후로, 맥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의 마음에는 ‘거대한 슬픔’(The Great Sadness)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다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맥은 가끔 웃는 일이 있었지만, 그 웃음 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느낍니다. 맥의 감정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미시가 실종된 그해 여름 이후 ‘거대한 슬픔’은 투명하지만 무거운 누비이불처럼 맥의 어깨를 두껍게 감싸고 있었다. 그 무게에 두 눈은 흐려지고 어깨는 축 쳐졌다. 두 팔이 모진 절망과 함께 누비이불에 꿰매지고 자신도 그 일부분이 된 것 같았으며, 그것을 털어내려는 노력 때문에 항상 녹초가 되곤 했다. 맥은 매일 납으로 만든 무거운 목욕가운을 입은 것 마냥 축 쳐진 채 먹고 일하고 사랑하고 꿈을 꾸고, 만물을 퇴색시키는 음산한 낙담 속을 터벅터벅 걸어야 했다.”(35쪽, p. 27)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눈비가 심하게 오던 날, 맥은 우체통에서 발신인 주소도 없는 엽서 한 장을 발견합니다. 그 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맥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다음 주말에 [그]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파파

‘그 오두막’은 말할 것도 없이 미시가 살해된 그곳을 말합니다. 맥은 그 엽서를 받아 들고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엽서를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파파’는 아내 낸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낸 엽서인가? 도대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누가 장난한 것인가? 누가 이렇게 잔인한 장난을 한다는 말인가? 혹시, 그 연쇄 살인범이 나까지 노리고 한 수작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하지만 맥은 끝내 그 엽서를 구겨 버리고 모른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엽서를 보낸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든, 확인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처제 집으로 보내 놓고 친구의 지프를 빌려 그 오두막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전반 약 1/4의 내용입니다. 후반 3/4에서는 그 오두막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오두막에서 맥이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거대한 슬픔’을 치유 받는다는 것이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3.
주인공 맥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상처는 특별합니다만, 저자는 그의 상처를 통해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기를 기대합니다. 이 소설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치유와 변화입니다만,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먼저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도록 독자를 흔듭니다.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혹은 억압하고 살았던, 혹은 망각하고 살았던 상처를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힘은 참으로 강하고도 신비롭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독자는 자신의 상처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뛰어납니다.

지난 2월 초, 멕시코 단기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저는 이 소설을 두 번째로 읽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비행기 안에서 머무는 시간은 독서에 가장 유익한 시간입니다. 보스톤에서 휴스톤으로, 휴스톤에서 메리다(Merida)로 가는 공항 대합실과 비행기 안에서 저는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의 둘째 날, 저는 아주 특별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제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눈망울 안에서 저에 대한 강렬한 원망의 빛이 보입니다.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강렬한 적의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저는 잠에서 소스라쳐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다시 잠을 청하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 꿈에 무슨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내 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무엇일까? 그렇게 강렬한 원망의 감정을 나에게 품고 있을 사람이 누구일까?” 성령께서 그 꿈을 통해 저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필름을 되돌려 보다가, 제 안에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단정할 논리적 근거가 하나도 없었지만, 제 마음에 아주 분명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제게서 받은 상처가 그 사람에게 아직도 있다면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제게 남겨진 상처를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 후, 저는 다시 침대에 누워 부족한 잠을 보충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제 의식은 “나에게는 이같은 상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무의식 속에 있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처를 기억나게 하고, 그것을 다시 보도록 저를 일깨웠던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 하나가 얼마나 신비로운 힘을 발휘하는지요!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는 제자가 있는데, 이번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이 소설을 읽고는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작년에 구입해 놓았지만 왠지모르게 주저하면서 잃지 못했던 소설이었습니다. 그 알 수 없는 주저함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성령님의 신비로운 움직이심과 역사하심이란... 한 소설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상처들과 죄책감을 부드럽게 들추어 내고, 느끼게 하고, 그리고 동시에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4.
이 소설의 저자 폴 영도 많은 상처를 안고 산 사람입니다. 캐나다 출생인 그는 목사이면서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뉴기니(New Guinea)에서 열 살까지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폴은 원주민에게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청소년기에 그는 잠시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또 다시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이 자주 그렇듯이, 그는 졸업할 때가지 13번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로 돌아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었던 상처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로 인한 아픔의 종류를 이렇게 나열합니다. “여러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이어 잃어버리는 아픔, 겨울 한 밤중에 일어나 철길을 따라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던 아픔,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끊임없이 내면을 흔들어 놓는 그 깊고 시끄러운 수치심의 아우성, 개인적인 실패로 인해 깨어지고 지워져 버린 꿈들, 방아쇠만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일 정도로 희미한 희망.” (http://theshackbook.com/)

그는 이 모든 상처와 아픔을 억누르며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로 인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생기고, 일중독에 빠지는 등, 이런 저런 문제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럭 저럭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데 가까스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서른 여덟이 되던 해, 억눌렸던 상처와 아픔이 그 흉한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그의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독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한 순간에 난파선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다행히, 아내 킴(Kim)은 남편을 떠나지 않고, 그로부터 11년 동안 남편의 치유 과정을 함께 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상처와 치유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선물로 시작된 이 소설은 무려 29개의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자비로 출판했고, 광고와 홍보를 위해 2백 달러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2010년 현재 7백만부가 팔려 나갔습니다. 이것은 출판계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이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두에게 상처가 있으며,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잊혀졌거나 억압해 왔던 상처를 기억하도록 돕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너무 단정적이라고 하시겠습니까?

5.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곧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찢어질듯한 울음을 울면서 태어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인생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해(苦海)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정신과 의사이자 사상가인 스캇 펙(M. Scott Peck)은 그의 명저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Life is tough.”
왜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장과 이어지는 4장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는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과 평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3장과 4장에 보면, 그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과 평화에 균열이 생깁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금이 생깁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자, 인간 사이에 금이 갑니다. 2장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 벗었어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하나님께 죄를 짓고 나서는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뭇잎으로 치부를 가립니다. 그 균열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땀흘려 정복해야만 하는 관계로 타락합니다. 창세기 3장과 4장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하나의 진리를 아주 선명한 목소리로 들려 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소설 <오두막>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 가지 진실, 즉 “누구나 아프다”는 진실은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누구는 과거에 심히 아팠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별로 아프지 않다면, 앞으로 아플 것입니다. 협박이 아닙니다. 삶의 진실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Life of the Beloved)라는 책에서 친구 프레드 브랫트만(Fred Bratman)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상처받은 사람이고, 나 역시 상처받은 사람이지.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이네.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며, 너무나 구체적이고 뚜렷해서, 이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쓸 것이 많다는 점을 믿기 어려울 때가 자주 있지”(73쪽).

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고,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적어도 두 가지의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첫째,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있을 때, 누구나 때로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동안에는 나만 당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만 재수에 옴 붙은 줄 알았는데, 혹은 하나님이 나만 피해 다니시는 것 같았는데, 겉으로 멀끔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상처가 있고, 불행할 것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음을 알고 나면, 버틸 힘이 생깁니다. 때로, 다른 사람의 상처는 작아 보이고 내 상처만 커 보일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큰 상처가 있고 가벼운 상처가 있다 할 수 있지만, 상처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늘 절대적인 무게로 느껴지는 법입니다.
이 대목에서 노래 하나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미국의 록 밴드 R. E. M.이 부른 노래인데, 좋은 그림과 함께 편집해 놓은 영상이 있어서 한글 자막과 함께 여러분에게 들려 드립니다. (영상과 음악)Everybody Hurts누구나 아프다

긴 하루가 지나고 밤을, 당신 홀로 밤을 맞을 때,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느껴질 때,그래도 견디세요.포기하지 마세요,누구나 때로 울고, 누구나 때로 아프기 때문이죠. 때로, 모든 것이 엉망일 경우도 있어요.그 때, 노래를 부르세요. 당신의 날들이 어둠 뿐일 때,견디세요, 버티세요.다 포기하고 싶을 때,버티세요.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껴질 때,그래도 버티세요. 누구나 아프기 때문이죠.친구에게서 위로를 찾으세요.누구나 아파요.포기하지 마세요.그래요. 포기하지 마세요. 혼자라고 느껴지나요?아니어요, 아니어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어요. 당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면,낮과 밤들은 견딜 수 없이 길 거여요.더 이상 버티기에 너무 지쳤다고 생각한다면,때로 누구나 아파요. 누구나 울어요.때로 누구나 아파요. 때로 누구나 아파요.그러니, 버티세요, 견디세요.버티세요, 견디세요, 놓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버티세요. 누구나 아파요.당신 혼자만 그런게 아니어요.

둘째, 우리가 사는 세상이 깨어진 세상이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상처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를 보듬어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들려드린 노래는 참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상처 많은 세상의 현실을 그냥 인정하는 데서 끝난다는 점에서 부족함이 있습니다. 때로 누구나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견디고 버티면서,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내가 입은 상처에서 발생합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알고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상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진정한 희망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보듬어 주어야만 합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설 <오두막>을 가지고 씨름하는 이 기간 동안, 우리 각자가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기회를 가지기 바랍니다. 우리의 상처로 우리 자신이 우리 영혼 안에 지은 그 흉칙한 오두막을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치유의 첫 걸음입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 누구를 만나든지 상처입은 사람으로서 대하고, 그 상처에서 나오는 쓴 물을 견뎌 주며, 서로 보듬어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처의 치유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더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다만, 너나 나나 모두 다 아프다는 이 하나의 진실을 생각하고 그 사실에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위로자이신 성령의 위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상처 받은 영혼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상처의 왕이신 주님, 상처 입은 저희가깨어진 세상에서상처 입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게 하시고,저희의 상처를 대면하여 치유의 길을 찾게 하시며, 저희를 사용하여 세상의 깨어짐과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소서. 아멘.

Tuesday, May 4, 2010

코스타 25년-복음, 민족, 땅끝

나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민족은 무엇이며 나에게 땅끝은 어디인가? 코스타가 25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 민족, 땅끝... 아! 주제만 들어도 그 때의 그 순수한 열정으로 가슴이 벅차 뛰어 오릅니다. 조국의 교회여 본질로 돌아갑시다. 제발 가슴 뛰는 주제들로 헌신합시다. 깨어나라 코스탄들이여. 이제 일어나라. 나의 주 나의 사랑 예수 이름으로 영원한 코스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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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코스타 주제소개: KOSTA/USA가 시작된 지 어언 25년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KOSTA/USA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돌이켜보면, 그 안에 있었던 소중한 만남과 추억, 그리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무엇보다 KOSTA/USA를 이끌어왔던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모토가 한국 복음주의권에 시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을 감사드린다. 복음, 민족, 땅끝(삶과 신앙의 통합)은 지난 25년 전 KOSTA를 시작할 때부터 KOSTA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가치(core value)였다. KOSTA/USA가 시작되었던 1986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자. 당시 KOSTAN들은 유학생으로서 고된 삶 가운데 있었고, 암울했던 조국의 상황을 그저 멀리 타국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1980년대를 사는 한국인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복음이 진정으로 한국 민족에게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을 세상에 선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엄숙한 소명이었다. 복음이 삶으로부터 괴리되고 신앙이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당시 기독교 현실의 이원론적인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KOSTA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KOSTAN들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런 고민과 결단은 지난 25년간 KOSTA/USA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복음, 민족, 땅끝'은 여전히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일까? 처음 KOSTA를 시작했던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우리는 올해 KOSTA/USA를 통해 '복음, 민족, 땅끝'의 주제가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먼저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5년 전 복음이 우리 선배 KOSTAN들에게 소망이었듯, 여전히 복음이 우리의 소망임은 분명하다. 복음은 창조주의 선한 창조의지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인간성이 회복될 길이 마침내 열렸다는 선포이자, 끊을 수 없는 죄의 악순환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를 얻었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하지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구원에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연, 사회, 문화, 학문 등 피조세계 전체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우주적 선포인 동시에, 어그러진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예수께서 세우셨다는 공동체적 선포이기도 하다. 즉, 복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 목표이자, 민족과 땅끝의 기초가 되는 포괄적인 가치인 것이다.

민족이라는 가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음을 믿는다. 특별히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가난과 독재 등의 고난 속에서 우리를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으신 목적이 있음을 믿는다. 다만 25년 전 우리 선배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조국을 섬기는 일을 통해 발현시켰다면, 이제 우리는 자민족중심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폐쇄성에 빠지지 않고, 타국에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탤런트와 성품을 사용해 우리 조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폐쇄적이거나 이기적이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섬김’의 정체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끝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민족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복(blessing)을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나눌 것을 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땅끝은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가치이다. 그러나 땅끝의 의미는 단지 선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가 정해놓은 경계(boundary)를 넘도록 요청한다. 예배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편안한 종교행위로 신앙생활의 전부를 채우고자 하는 우리에게, 복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영역에서만 우리의 주(Lord)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가정, 사회, 문화, 인간관계, 직장 등 삶의 전 영역(sphere)에서도 역시 우리의 주로서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5년 전 우리 선배들의 통찰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적용된다.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세속화 및 혼합주의(syncretism)의 도전 또한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명목으로 세상과 대화하려는 시도가 자칫 세속화나 혼합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삶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이원론 및 혼합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피조세계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선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010년, KOSTA/USA 25주년을 맞는 이때에 우리는 복음, 민족, 땅끝의 세 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또한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도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복음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민족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 선교적인 의미로서의 땅끝의 가치, 또한 피조세계 각 영역의 복음으로서의 땅끝의 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뒤틀려진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유대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과의 언약으로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과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신실하심을 표현하셨으며, 그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빛으로 부름받은 새로운 언약 공동체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Wednesday, April 28, 2010

John 17:3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이 설명하는 영생의 의미이다. 짧은 구절이지만 신학적 이론과 탁상공론에 머물고 있으면서 선택 받았다는 자부심으로 목이 굳어 있는 관념적 신앙을 한방에 날려 버린다. 구원받는 원리를 깨닫는 것과 실제로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우리가 가지고 싶어 하고 자랑하는 지식은 마치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제자들이 가졌던 질문 “그것이 알고 싶다”에 대한 정답이다. 그 소경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에는 관심도 없으면서…내가 사랑하는 어떤 녀석은 잘 때마다 아빠를 찾는다. 아빠가 그리 좋은가 보다. 그 녀석은 아빠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고 아빠의 봉급이 얼마인지 아빠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남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녀석은 아빠를 잘 안다. 나이를 먹으면서 또 아빠를 새롭게 알아 갈 것이다. 누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Tuesday, April 13, 2010

사람만 쳐다보고 살기 때문에...

출처 주간조선- 조성관 편집위원

역대 최장수 주중대사와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金夏中·63)씨. 김대중 정부 후반기인 2001년 10월 주중대사에 임명돼 노무현 정부 5년까지 6년 반 동안 베이징에서 재직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통일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서울 온누리교회 장로이기도 한 김하중씨가 지난 1월 말 자신의 신앙 체험을 적은 책 ‘하나님의 대사’(규장)를 펴냈다. 책 출간 이후 김하중씨에게 전국의 교회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김씨는 서문에서 “나는 주중대사로 임명된 다음, 나의 정체성을 대통령이 중국에 파견한 ‘특명전권대사’이자, 중국에 주재하는 ‘하나님의 대사’라고 정립했다”고 말한다. 김씨는 본국의 훈령과 함께 ‘하나님의 훈령’에도 귀를 기울였다고 썼다. 3월 21일(일요일) 오후 7시 김씨는 서울 반포2동에 있는 신반포교회에 강사로 초대받았다. 김씨는 신반포교회의 ‘2010 새생명축제’ 기간 중 첫 번째 강사로 나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김씨는 1시간25분 동안 진행된 강연 도중 30여분을 할애해 한국의 엘리트를 신랄하게 비판해 본당을 꽉 채운 800여 신도의 호응을 이끌었다. 우연히 이 자리에 참석했던 기자는 그의 강연 내용에 놀랐다. 며칠 뒤 기자는 출판사를 통해 김씨에게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김씨는 하루 뒤 “장관 퇴임 이후 일절 인터뷰를 안한다는 원칙을 정했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왔다. 기자는 하는 수 없이 신반포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3월 21일 동영상물 중에서 ‘한국 엘리트 비판’ 부분을 발췌해야 했다.

김씨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장관, 총리, 돈 많다는 사람, 명예 높다는 사람들을 전부 만나봤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100%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사람들의 특징이 있었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 돈을 갖기 위해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모른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 사람들은 강팍하고 교만해서 함부로 아랫사람들을 대하고 욕하고 비판한다.” 김씨는 신도들에게 “왜 그런 줄 아냐”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의 사람만 쳐다보고 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저 사람에게 잘 보이면 돈 많이 벌 수 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잘 보이면 승진할 수 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잘 보이면 쥐꼬리만한 권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사람 앞에서 눈치 보고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 같은 제사장인데,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은 하나도 없고 노예 노릇을 하고 있다. 하는 짓을 보면 완전히 그 사람 종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고도 집에 와서는 권력과 자리를 자랑하고 있다.” 김씨는 “그런 사람들이 능력 있고 지혜가 있어서 그 자리에 갔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또 “그 사람들 만날 한다는 게 좋은 학교 타령만 한다”고 꼬집었다. 김씨의 강연은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저도 막말로 좋은 학교 나왔다. 그래서 좋은 학교 나온 사람들 잘 안다. 그 사람들 만날 자기 출세하는 것만 생각한다. 남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좋은 아파트, 좋은 차, 좋은 음식 얘기만 한다. 머리와 마음속에는 시기, 질투, 교만, 불안, 근심 등이 가득하다. 그런 사람들을 리더라고 한다. 그게 무슨 리더인가?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들 속에서 살아봐서 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

김씨는 여기서 이른바 엘리트 계층에 대해 비판을 했다. “좋은 대학 나왔다는 사람들 전부 이기주의자다.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전부 자기 이익만 찾아다닌다. 좋은 대학 나왔다는 사람치고 나라 생각하는 사람 거의 없다. 전부 자기 학벌과 인적 네트워크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엘리트냐? 어떻게 하면 좋은 차를 계속 탈지, 비서 있는 사무실을 계속 쓸지, 공금으로 좋은 음식을 계속 먹을지, 그딴 생각만 하는 사람이 무슨 엘리트냐?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지 말고 자손들을 위해 기도를 남겨줘라.” 김씨의 강연은 여기서 일부 기독교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어떤 기독교도는) 교회를 자기의 부(富)를 유지하고 명예를 올리고 권력을 얻는 하나의 부적처럼 여기고 있다. 무늬만 크리스천들이 무슨 리더인가.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진정한 축복을 받는 것은 남을 위해 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이다. 말로만 크리스천이고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이 많다. 계속 크리스천으로 행동하다가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에게 돈, 권력, 명예를 받고 싶으면 마치 크리스천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사람이 새벽기도와 중보기도에 나와 간구한다. 그 기도라는 게 만날 자신의 유익과 정욕을 위한 것이다.”

일부 기독교도의 행태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계속된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 사람(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듯)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떤 행사 가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동창을 통해 그 사람에게 줄을 댈 수 있을까, 온통 그런 생각뿐이다. 그런 크리스천들이 무슨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나? 무조건 좋은 차 타고 명품 걸치려고만 한다. 몸에 병이 가득한 사람들이 비싼 명품 걸쳐서 뭣하냐?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더라도 우리 크리스천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 여기서 김씨는 “나는 대사와 장관을 지냈지만 한번도 인적 네트워크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골프 안 치고도 장관까지…”“나는 공무원 생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가장 오래라는 6년 반 대사 생활하면서 누구한테 인사 부탁을 해본 일이 없다. 내가 장관할 때 ‘술도 안하고 기도만 해서 장관 하겠어’라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되는 거다. 외교관 생활 30년 이상 하면서 골프 안 쳤다. 하나님 다시 믿고 나서 세상의 모든 즐거움 다 끊었다. 20년 동안 영화를 한 편도 안 봤고 재미 있다는 드라마도 안 봤다. TV로 중계하는 스포츠 경기도 본 일이 없다. 이번에 밴쿠버 동계올림픽 할 때 집사람이 하도 보라고 해서 김연아 피겨 경기만 봤다. 골프도 안하고 술도 안 마셨지만 주중대사를 78개월했다. 주중대사 평균이 22개월인데…. 통일부 장관할 때 뒤에서 장관이 일 안하고 기도만 한다고 욕하는 사람 많았다. 어떻게 장관이 일 안할 수 있나?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기도할 수 있는 장관을 뒀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도 모르고….” 김씨는 주중대사를 오래 하니까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했다. 그때마다 김씨는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믿으세요?’라고 물어서 ‘안믿는다’고 하면 ‘그럼 중국을 사랑하세요, 중국 사람을 사랑하세요’라고 말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하면 ‘중국을 위해 기도하세요, 중국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세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1973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36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주요 경력은 주중한국대사관 공사 3년, 대통령의전수석·외교안보수석 3년8개월, 주중대사 6년반, 통일부 장관 1년 등이다. 공직자로서 이 기간 동안 김씨는 대통령 8명, 국무총리 20여명을 가까이서 보필했다

Friday, March 26, 2010

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하는가?

송만석 장로 세미나 요약 <출처: 아멘넷>: 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하는가?

1990년 고려신학교 3년 마치고 논문을 쓸때 이스라엘에 관하여 관심이 있는 것을 지도 교수님이 알게됐다. 교수님의 권유로 논문을 쓰기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고 토론했다.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데 무슨 연구를 해야하나 걱정을 했다. 그때 우리가 이스라엘을 제쳐놓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가르쳐야 겠다고 생각하며 기도모임을 시작하고 이스라엘에 관한 교제를 만들었는데 제목이 "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하는가?"라는 책이다.

1. 유대인의 왕(메시아) 예슈아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본다. 그래서 어떤때는 예수님을 왕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문제가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우리들의 왕"이자 "정복하는 영웅"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가 죽는 것을 보았을 때 즉 어린양이자 구원자로 돌아가셨을때 "이런 사람은 왕이 될수가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인 동시에 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예수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셨다.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탄생한 2천년 전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계셨던 분이다. 창세 이전에도 계셨고 구약의 모든 시대를 통해 계셨으며 또한 앞으로 올 세대에도 계실 것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모든 내용이 다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성경 말씀의 중심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 계획의 중심이 예수님이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부터 마지막 때까지 통틀어서 예수님을 이해해야 한다.과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에게 구원자로 오셨다. 그러나 지금은 십자가 상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활동들을 지시하고 계신다. 이 기간 동안에는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를 부어주고 계신다. 그리고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우리는 2천년 전에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현재 주시는 성령의 온전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또한 현재 주시는 것을 받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주님과 함께 일해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 삶 가운데 앞으로 해야 될 또 하나의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는 구원자로 오시는 주님이나 성령의 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는 왕으로서 오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그분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예수님은 과거에는 우리의 구세주였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고 계시고 다시 오실때는 정복하는 왕으로서 오실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때는 이러한 모든 차원에서 예수님을 이해해야 한다.

2. 축복의 근원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시작은 B.C. 1,800년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창12:1-3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시며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것인데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이고 능동적이시며 아브라함의 역활은 수동적이었다.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고 복을 주시며 이 민족을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겠다는 언약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스라엘은 결국 실패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원인은 이 민족을 향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한데 있다.유대인의 숙명은 예수를 세상에 나도록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사탄은 예수가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유대인들을 보호하셔야 했고 이것은 약속의 후손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였다. 이러한 안목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메시아 후손의 언약을 순수하게 지켜 내기 위한 유대 민족의 영적 연단이 설명될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을 향한 수많았던 영적인 공격도 설명이 된다.메시야가 유대민족 계보에서 나오는 한 그들 모두는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유대민족 그 전체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는데 이는 메시아의 씨가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랍은 오늘날 풍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보다 더 풍부한 중동의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그들의 인구는 오늘날 유대인 인구의 열배나 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과 부와 자원을 복으로 주셨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랍인들에게도 유효하다. 아랍인 전부가 이슬람 교도인 것은 아니다. 그들중 몇몇은 적개심에 불타는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여전히 예수를 믿고 그들의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아랍인과 유대인이 화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듯이 아랍 국가들에서 예수를 믿는 능력있는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3.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역사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40년도 안된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 티토가 4개 군단 약 8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로마 통치에 항거하는 유대인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대인 110만명이 기근과 불과 칼에 살육당했고 9만7천여명이 포로로 노예로 팔려 갔다. 그결과 유대인들은 세계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흩어진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멸시와 천대와 박해와 살육을 당하는 고난의 긴 세월을 살아야 했다. 이 재난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것이다. 1900년의 세월이 흐르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부터 다시 모여들었으나 이 재난의 여파는 아직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분명하게 예고한 말씀이 레26장에 나와 있다. 이스라엘의 흩어진 상황을 성경이 그렇게 정확하게 예언하였다면 그 원인에 대해서도 똑 같은 정확성과 권위로 얘기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당연한 추정이다. 그 이유 역시 레26장에 나타나 있다.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했고 그들에게 베푸셨던 언약도 거절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와 같은 거역 가운데 지내오고 있다. 결과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전의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대 고난을 당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고와 역사와 성경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의 일생과 그의 사역들 그리고 모두가 유대인들이었던 제자들의 기록과 편지들을 보고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에 대해 내릴수 있는 결론은 오직 한가지 '그 선지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가 세계 선교를 아무리 외쳐도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않고 회복되지 않으면 구원의 완성은 없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선교는 선교의 허무주의에 빠질수 있다. 선교의 완성인 예루살렘에 예수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이방인의 선교와 이스라엘 선교가 하나가 될때 주님이 오신다. 역사가 완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할때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4.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열심
구원이 이방인에게 미친 것으로 이스라엘의 사명은 하나님앞에서 끝이 났는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국가로서의 존재는 없어지고 말았는가? AD70년이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 견해는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일 유대인들이 버려짐으로써 이방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이스 라엘이 받아들여 지는 것은 죽은자가 살아나는 부활의 생명이 전 세계로 흘러 넘치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이방인들 중에 구원받은 자들의 숫자가 하나님의 계획에 다 차게 될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눈먼 상태에 놓여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10:22, 롬9:27, 롬11:1-4, 말씀을 종합해 볼때 이스라엘 백성중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존하시고 남겨둔 자들 곧 남은 자들을 의미한다. 렘32:37-4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려 쫓아 보내었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다시 불러 모으시는 장면을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모든 재난은 엄연한 객관적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비유적이거나 영적인 어떤것이 전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축복도 단지 비유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닌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다가올 것이다. 렘50:19-20에도 저들을 다시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하나님이 남기신 자들을 용서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와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육체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첫단계이며 필수적인 것이고 지금도 진행중이지만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는 영적인 회복은 다음 단계이며 마지막 단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도 이미 시작하셨다.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에 약 6천명 정도로 추산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그들의 활동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예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된 것처럼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이 희생이 된것이다. 이방인들이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역사가 완성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돌아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을 많은 다른 국가중의 한 국가로 보지 말고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마지막 카드가 될것이다.

5. 다시 오시는 왕 예수님과 우리의 역할
지금까지 말씀을 살펴보면 유대민족 전체와 특별히 이스라엘 국가를 위해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계획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네가지 결론을 얻게 된다.

1)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모아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거기서 또 다시 통일된 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2) 이와 같은 지리적 정치적 회복은 유대 민족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전주곡이다. 3) 이와 같은 유대 민족의 다시 모임과 회복은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4) 종국적으로 모든 나라의 운명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와 맞물려 있다.

우리가 해야하는 선포는 길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흩으신 자가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 고대 히브리어로는 더욱 짧다. 실제 세 단어로 되어 있다. 첫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둘째 단어는 흩으신 자이며 셋째 단어는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중심이 되는 과제 즉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시는 것에 우리의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하신다.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몇몇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가리키고 있는 여러곳에 선포하는 임무를 맡기고 있다.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는 것은 모든 민족들이 볼수 있도록 하나님이 높이 든 구원의 상징이다. 이 시대에 모든 민족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계획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중요하면서도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모든 민족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때가 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는데 그들이 어떻게 공헌 했는지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그때 가서는 어느 민족도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변명할수 없을 것이다.이스라엘이 당한 모든 수모와 희생과 고난은 수세기동안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였다.1948년 독립된 이후에도 국가적인 수난과 고통도 단지 바람을 잉태하였을뿐이었다. 이스라엘은 살아있고 생명을 주는 자궁을 필요로 한다. 이시대의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저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도록 하는 부름을 받았다.

Thursday, March 11, 2010

한국에 다녀온 후 쓴 편지

OO님,

안녕하시지요? 저도 지난 주에 처제 결혼 때문에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학교강의가 있어서 곧바로 돌아왔지만, 5년만에 고국의 추운 바람 좀 쐬었습니다. 외국생활이 길어져서 그런지 이제는 한국이 낯설고 사람들과 그리고 문화에 왠지모르게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봅니다. 사람들이 온통 외모이야기 밖에 하지 않아요. 늙어보인다, 피부가 뽀얗다, 어디서 손 좀 봤다, 어디 미용실이 어떻다 하는 등등... 교회출석이나 헌신도와는 무관하게요... 할말도 없기도 하고 열대지방에서 폭삭 맛이 갔다는 얘기도 많이 들어 지겹고 해서 그냥 아주 조용히 있다가 왔습니다. 대인공포증이 아닌가 할 정도로 아주 조용히요. 이런 생각 혹은 결단(?)도 했어요. 나는 그냥 옛날 초가집에 살면서 학교에서 배급받은 빵 한조각도 감사하고 나눠먹던 그런 소박함으로 살아가리라... 그러다 주님이 부르시면 뒤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가리라...

주님을 기다리는 촌놈 이기명 드림

Wednesday, February 10, 2010

요한복음 6:1 - 6: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자신의 공생애 삼년 중 두 번째 유월절 무렵,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동편의 벳세다 광야로 가셨다. “빈들 이미 저무는 때, 그리고 (남자만) 오천이나 되는 허기진 무리들, 가진 것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정황이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은 이것이다.“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하지 못할 핑계가 많고, 일을 이루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오후 5시 같은 인생들에게 하시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다기 축사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원대로 주셨다. 이것은 일년 후로 임박한 자신이 행하실 일을 보여주시는 그림이다. 바로 예수님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되시고 그 떡을 떼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는 자신을 드리신 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