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뉴조 인터뷰--
은퇴를 앞둔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는 '홀가분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 목사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로서가 아닌, '자연인 이동원'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마음이 가볍다며, 담임목회의 짐을 벗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게 되어 즐겁다고 말했다. 이동원 목사는 인터뷰를 통해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 은퇴 후의 계획, 후임 목회자 선정 배경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최근 이민 교회 목회자의 한국행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후임 목회자 선정 과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밝혔다. 이 목사는 청빙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작업까지만 개입했고, 이후 청빙위원회가 기준에 따라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협의해, 후임 담임목사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애초부터 특정인을 지목하고 추진한 것이 아니라, 조사와 협의 과정을 거친 자연스런 결과라고 설명했다.
목회 현장에서 물러나는 이 목사는 후배 사역자들을 위한 목회적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 목사는 “자기 치유가 덜 된 사람들은 너무 빨리 목회 현장에 들어오지 말았으면 한다"며 목회자의 치열한 자기 성찰을 주문했다. 이 목사는 또 한인 교계에 만연한 분쟁에 대해 “아직 한국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사가 강자”라며 분쟁 국면에서 목회자의 자기 희생을 강조했다.
한국 교회 내에 건축 흐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필요가 없는 교회까지도 건축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며 건축이 일종의 트렌드가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최근 교계가 한국 사회의 보수화를 이끌며 각종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는 "교회가 연구 없이 특정 이슈를 성급히 지지하면 위험하다"며 우려 섞인 지적도 했다.
Wednesday, June 30, 2010
Thursday, June 3, 2010
악은 현실이다
“악은 현실이다” (Evil Is a Reality) 김영봉--마태복음 26:36-46
1.
내일은 Memorial Day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현충일’입니다. 크고 높고 고귀한 뜻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와싱톤 DC에 있는 한국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기억하시지요? Freedom Is Not Free. “자유에는 값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운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젊은 날의 한 때를 그렇게 희생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기원합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직면하게 해 줍니다. 전쟁은 항상 자유나 인권 같은 고상한 목적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난 전쟁 중 절대 다수는 인간의 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터는 인간의 악마성이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현실 앞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게로 하여 거침 없이표현되는 개인의 악마성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인생사를 주관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가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에 처하여 더 큰 혼란스러움을 경험합니다. 선하고 사랑 많고 능력있는 신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만한 단서를 찾기 어렵습니다.
소설 <오두막>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담한 악의 현실을 소재로 듭니다.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 당하고 성폭행 당한 다음 살해 당한 사건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악의 현실입니다. 그 악의 현실 앞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맥이 견지하고 있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신이라면, 그같은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은 셋 중 하나입니다. 1)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2)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악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3)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뜻이 없거나.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맥의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실 것입니까? 얼마 전,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피해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2009년 가을, 한국에서 일어난 ‘나영이 사건’은 그 참혹성으로 볼 때 ‘미시 사건’보다 더 심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한 인간에게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가 능욕을 당할 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같은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기에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폐기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2.
영국의 신학자 톰 라잇(Tom Wright)은 문명 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잘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 사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낭만적인 ‘진화론적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고, 문명의 이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을 대하는 데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공격할 때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예외인 줄로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숙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3쪽.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악에 대해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톰 라잇은 현대인들이 악의 공격에 대해 보통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악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모든 문제를 정부 책임이라고, 사회 책임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 책임이라고 비난합니다. 둘째, 그 반대 극단으로서,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이 두 가지 증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유명인들의 자살 뉴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현대판 전염병 우울증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이같은 미숙한 반응으로 인해 악의 현실은 더 심해지고,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 효력이 없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깊이 상처 받고 앓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현실에 대해 믿는 사람들은 자주 너무도 기계적으로, 너무도 교리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티에 일어난 지진이 부두교(The Voodoo)를 믿은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단정합니다. 거대한 쓰나미로 동남아에 재난이 닥쳤을 때도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맥이 당한 것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성급하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뭔가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말인지, 그리고 악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리고 그 단정이 기독교를 얼마나 해괴망측한 종교로 보이게 만드는지요!
3.
소설 <오두막>에 대해 신학적인 해설서를 쓴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그의 책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Meeting God in the Shack>에서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철학 교수는, 아무리 참혹한 비극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수도 자신의 아들을 잃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고 또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무덤 옆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34쪽, “I will never tell another parent whose child has died, ‘It was God’s will.’”p. 20)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견디기 힘든 악의 현실을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혹은 이혼으로 인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해, 혹은 심각한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힘겨울 때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분들이 던지는 말들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아픈데, 앞에 앉혀 놓고 훈계를 하는 사람이 없나,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나, 심지어는 심문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리다 모랜(Rita Moran)이라는 분이 서른 네 살짜리 딸을 잃고 쓴 시, “제발”(Please)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받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The Compassionate Friends의 웹 싸이트에 올라 있는 것을 제가 우리 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발, 내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발,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이곳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 곁에 없는 것이 문제이니까요.
제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으니 됐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 그 애가 고통 받아야 했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발,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버티고 계속 살아가라고 말하지 마세요.이렇게 버티고 있잖아요?
제발, 좀 나아졌느냐고 묻지 마세요.
상실의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발,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분이 일부러 이렇게 하셨다는 뜻인가요?
제발, 적어도 그와 함께 34년을 함께 살지 않았느냐고 위로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제발, 신은 인간에게 견딜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내력의 정도를 누가 결정하나요?
제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제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진실로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발, 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내가 울어야 한다면 울도록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악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묘사한 시입니다. 생각해 보니, 리타 모랜이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말들 가운데 많은 말들을 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습니다. 저의 생각 없는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를 생각하니, 식은 땀이 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앞으로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겪어 본 분들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악의 현실을 경험했던 분들이 눈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4.
악의 현실에 대해 건강하고 성숙하게 반응하려면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각각의 악의 문제에 대해 단순하고 명쾌한 정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며,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악이 왜 생겼으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신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왜 때로 악에 희생 당하며, 악을 일삼는 자들이 왜 때로 번영하는지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종교적 천재들이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겸손해지고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번민하되, 섣불리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톰 라잇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악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는 한 고상한 기독교 전통은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악에 대하여 어떤 분석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를 축소해 버린 것입니다. (43쪽)
오늘 읽은 본문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악의 현실 앞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악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37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로 표현하기도 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3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현실을 완전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지, 그분은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39절, 42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껴안아야 하는 악의 현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제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거슬립니까?
소설 <오두막>에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내려 앉아 걷고 있다면, 어떤 필요를 위해 자신을 제한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당신 자신을 제한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도 스스로 신성을 제한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그분이 악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심하게 동요되었던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과 똑 같이 악의 현실을 대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악의 현실을 끌어 안고 그 악을 선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5.
둘째, 악의 현실은 대면하여 통과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로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않은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그 사람이 당한 악의 이유에 대해 정답이 있어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설명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고 나니, 이제 슬픔이 사라지는군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 맞은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머리가 띵하고 멍한데 무슨 말이 들어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처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의 문제와 관계하여, 하나님조차도 고난의 터널을 우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악을 한 순간에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행했던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악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진실로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의 현실 앞에서 당연히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번 그같은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연극도 아니었고 쇼도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분도 악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셨습니다. 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처럼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시면서 주님은 믿음을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46절). 예수님은 그렇게, 악의 현실을 마주하기로, 그리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지나가기로 결정하셨고, 그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마음이 동요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도 그러셨다면, 우리가 어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고난을 직면할 용기와 담력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심장을 통과하고 났을 때, 비로소 고난은 변모하게 됩니다. 불교가 말하듯, 고난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엄연한 실상이요 현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면하고 겪어 냈을 때, 고난은 축복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6.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은 처음에는 왜 내 딸 미시를 죽게 했느냐고 하나님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는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분에게는 그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기만 했으면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 때문에 맥은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미시에게 벌어졌던 사고를 내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까? 물론 있었지…… 첫째, 내가 애초에 창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았겠지. 이런 질문들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둘째, 나는 미시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창조하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나는 둘째 방법도 택하지 않았지. 그 이유를 너는 지금 이해할 수 없어. 지금으로서 내가 네게 대답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지. 내가 미시를 죽게 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선한 것을 만들어 낼 거야. (365쪽, translation is mine, p. 224)
하나님께서 맥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의 현실을 마주한 사람에게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으로써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나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많은 질문들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정금같이 연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계십니까? 악의 현실을 마주하여 흔들리고 계십니까? 악의 몽둥이에 얻어맞은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상실의 아픔과 고통 중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라고 물으며 몸부림 치고 계십니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요, 관계요, 우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통해 사랑과 관계와 우정을 발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를 통해 그같은 도움을 찾으실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일이 없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가지기 쉬운 낭만적인 낙관주의나 헛된 기대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악의 현실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의 예상이 맞는다면, 악의 현실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성숙하게 반응하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형제 자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우리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임을 알고, 고난 당한 사람들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어떤 악의 현실이라도 마주할 수 있는 믿음과 시각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난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건, 주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으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모든 것을 사용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그것을 여러분도 아십니까? 그것을 아시고, 믿으시고, 매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난으로써 고난을 이기고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주님,악의 현실 속에 있는 저희를 도우소서.때로 저희는 이리 떼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악의 세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저희는 정신을 잃고 휘청거립니다.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저희도 주님처럼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고난이 축복이 되는 기적을저희도 경험하게 하소서.아멘
1.
내일은 Memorial Day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현충일’입니다. 크고 높고 고귀한 뜻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와싱톤 DC에 있는 한국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기억하시지요? Freedom Is Not Free. “자유에는 값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운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젊은 날의 한 때를 그렇게 희생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기원합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직면하게 해 줍니다. 전쟁은 항상 자유나 인권 같은 고상한 목적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난 전쟁 중 절대 다수는 인간의 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터는 인간의 악마성이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현실 앞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게로 하여 거침 없이표현되는 개인의 악마성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인생사를 주관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가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에 처하여 더 큰 혼란스러움을 경험합니다. 선하고 사랑 많고 능력있는 신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만한 단서를 찾기 어렵습니다.
소설 <오두막>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담한 악의 현실을 소재로 듭니다.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 당하고 성폭행 당한 다음 살해 당한 사건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악의 현실입니다. 그 악의 현실 앞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맥이 견지하고 있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신이라면, 그같은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은 셋 중 하나입니다. 1)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2)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악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3)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뜻이 없거나.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맥의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실 것입니까? 얼마 전,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피해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2009년 가을, 한국에서 일어난 ‘나영이 사건’은 그 참혹성으로 볼 때 ‘미시 사건’보다 더 심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한 인간에게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가 능욕을 당할 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같은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기에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폐기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2.
영국의 신학자 톰 라잇(Tom Wright)은 문명 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잘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 사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낭만적인 ‘진화론적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고, 문명의 이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을 대하는 데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공격할 때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예외인 줄로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숙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3쪽.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악에 대해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톰 라잇은 현대인들이 악의 공격에 대해 보통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악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모든 문제를 정부 책임이라고, 사회 책임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 책임이라고 비난합니다. 둘째, 그 반대 극단으로서,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이 두 가지 증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유명인들의 자살 뉴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현대판 전염병 우울증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이같은 미숙한 반응으로 인해 악의 현실은 더 심해지고,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 효력이 없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깊이 상처 받고 앓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현실에 대해 믿는 사람들은 자주 너무도 기계적으로, 너무도 교리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티에 일어난 지진이 부두교(The Voodoo)를 믿은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단정합니다. 거대한 쓰나미로 동남아에 재난이 닥쳤을 때도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맥이 당한 것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성급하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뭔가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말인지, 그리고 악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리고 그 단정이 기독교를 얼마나 해괴망측한 종교로 보이게 만드는지요!
3.
소설 <오두막>에 대해 신학적인 해설서를 쓴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그의 책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Meeting God in the Shack>에서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철학 교수는, 아무리 참혹한 비극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수도 자신의 아들을 잃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고 또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무덤 옆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34쪽, “I will never tell another parent whose child has died, ‘It was God’s will.’”p. 20)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견디기 힘든 악의 현실을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혹은 이혼으로 인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해, 혹은 심각한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힘겨울 때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분들이 던지는 말들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아픈데, 앞에 앉혀 놓고 훈계를 하는 사람이 없나,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나, 심지어는 심문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리다 모랜(Rita Moran)이라는 분이 서른 네 살짜리 딸을 잃고 쓴 시, “제발”(Please)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받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The Compassionate Friends의 웹 싸이트에 올라 있는 것을 제가 우리 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발, 내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발,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이곳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 곁에 없는 것이 문제이니까요.
제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으니 됐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 그 애가 고통 받아야 했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발,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버티고 계속 살아가라고 말하지 마세요.이렇게 버티고 있잖아요?
제발, 좀 나아졌느냐고 묻지 마세요.
상실의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발,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분이 일부러 이렇게 하셨다는 뜻인가요?
제발, 적어도 그와 함께 34년을 함께 살지 않았느냐고 위로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제발, 신은 인간에게 견딜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내력의 정도를 누가 결정하나요?
제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제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진실로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발, 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내가 울어야 한다면 울도록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악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묘사한 시입니다. 생각해 보니, 리타 모랜이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말들 가운데 많은 말들을 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습니다. 저의 생각 없는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를 생각하니, 식은 땀이 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앞으로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겪어 본 분들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악의 현실을 경험했던 분들이 눈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4.
악의 현실에 대해 건강하고 성숙하게 반응하려면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각각의 악의 문제에 대해 단순하고 명쾌한 정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며,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악이 왜 생겼으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신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왜 때로 악에 희생 당하며, 악을 일삼는 자들이 왜 때로 번영하는지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종교적 천재들이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겸손해지고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번민하되, 섣불리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톰 라잇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악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는 한 고상한 기독교 전통은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악에 대하여 어떤 분석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를 축소해 버린 것입니다. (43쪽)
오늘 읽은 본문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악의 현실 앞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악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37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로 표현하기도 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3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현실을 완전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지, 그분은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39절, 42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껴안아야 하는 악의 현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제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거슬립니까?
소설 <오두막>에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내려 앉아 걷고 있다면, 어떤 필요를 위해 자신을 제한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당신 자신을 제한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도 스스로 신성을 제한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그분이 악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심하게 동요되었던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과 똑 같이 악의 현실을 대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악의 현실을 끌어 안고 그 악을 선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5.
둘째, 악의 현실은 대면하여 통과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로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않은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그 사람이 당한 악의 이유에 대해 정답이 있어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설명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고 나니, 이제 슬픔이 사라지는군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 맞은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머리가 띵하고 멍한데 무슨 말이 들어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처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의 문제와 관계하여, 하나님조차도 고난의 터널을 우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악을 한 순간에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행했던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악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진실로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의 현실 앞에서 당연히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번 그같은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연극도 아니었고 쇼도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분도 악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셨습니다. 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처럼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시면서 주님은 믿음을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46절). 예수님은 그렇게, 악의 현실을 마주하기로, 그리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지나가기로 결정하셨고, 그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마음이 동요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도 그러셨다면, 우리가 어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고난을 직면할 용기와 담력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심장을 통과하고 났을 때, 비로소 고난은 변모하게 됩니다. 불교가 말하듯, 고난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엄연한 실상이요 현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면하고 겪어 냈을 때, 고난은 축복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6.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은 처음에는 왜 내 딸 미시를 죽게 했느냐고 하나님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는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분에게는 그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기만 했으면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 때문에 맥은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미시에게 벌어졌던 사고를 내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까? 물론 있었지…… 첫째, 내가 애초에 창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았겠지. 이런 질문들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둘째, 나는 미시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창조하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나는 둘째 방법도 택하지 않았지. 그 이유를 너는 지금 이해할 수 없어. 지금으로서 내가 네게 대답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지. 내가 미시를 죽게 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선한 것을 만들어 낼 거야. (365쪽, translation is mine, p. 224)
하나님께서 맥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의 현실을 마주한 사람에게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으로써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나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많은 질문들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정금같이 연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계십니까? 악의 현실을 마주하여 흔들리고 계십니까? 악의 몽둥이에 얻어맞은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상실의 아픔과 고통 중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라고 물으며 몸부림 치고 계십니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요, 관계요, 우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통해 사랑과 관계와 우정을 발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를 통해 그같은 도움을 찾으실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일이 없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가지기 쉬운 낭만적인 낙관주의나 헛된 기대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악의 현실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의 예상이 맞는다면, 악의 현실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성숙하게 반응하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형제 자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우리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임을 알고, 고난 당한 사람들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어떤 악의 현실이라도 마주할 수 있는 믿음과 시각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난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건, 주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으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모든 것을 사용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그것을 여러분도 아십니까? 그것을 아시고, 믿으시고, 매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난으로써 고난을 이기고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주님,악의 현실 속에 있는 저희를 도우소서.때로 저희는 이리 떼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악의 세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저희는 정신을 잃고 휘청거립니다.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저희도 주님처럼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고난이 축복이 되는 기적을저희도 경험하게 하소서.아멘
Saturday, May 29, 2010
최춘선 할아버지의 맨발은 무엇인가?
“최춘선 할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길을 봤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달랐다. 그분의 관점과 전략을 보게 되었다. 영상을 통해서 내가 혼자 하면 평생 해도 하지 못할 일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도구였을 뿐이고 최춘선이라는 한사람의 충성에 하나님이 축사하신 것이라 본다. 맨발로 표현된 충성이라는 덕목을 통해서 조폭들만도 못한 우리 크리스천들의 피상성과 유치함을 벌거벗긴 것이다. 내가 그랬다. 아닌 듯 해도 다들 예수를 빙자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간 실존적인 허기를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나였지만, 이제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분이 맨발이 된 계기를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관점과 전략과 역사라는 것은 과연 다르구나... 내 영혼이 계속 놀라면서 그것이 뭘까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지금 굉장히 많은 것을 보게 되었고, 이제는 작업을 하고 책을 쓰면서 나름대로는 더 조심스럽다. 이따금 기도 중에 아버지의 통찰력을 보여주실 때마다 그 실존에 비친 나를 봤을 때 부끄러웠다. 우리가 영광스런 복음에 대해서도 아직 잘 알지 못하면서 부흥을 외치는 현실이 너무 한심스럽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최춘선 할아버지를 통해 분명히 목도하게 되었다. 엄청난 자유를 경험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천명이 내 앞에 있어도 두렵지가 않다. 주변의 다양한 평가와 상관없이 자기가 갖고 있는 소명에 책임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내 안의 동기가 가장 중요하고 사명은 각자 각자이다.”
- 김우현 감독과의 인터뷰 중에서
- 김우현 감독과의 인터뷰 중에서
Friday, May 28, 2010
용서가 세상을 바꾼다
“용서가 세상을 바꾼다”(Forgiveness Transforms the Universe) --에베소서 4:25-32 <김영봉>
1.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아픕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뿐입니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대안입니다. 또 하나의 대안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 치유를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신이 독방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어려움과 힘듦을 견디는 것만이 나 자신과 이 세상에 희망을 끌어 올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품고 있던 ‘거대한 슬픔’은 사랑하는 딸 미시를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지만, 더 깊이 헤쳐 보면 그의 마음에 누적된 분노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린 딸을 해친 살인마에 대한 분노, 딸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그의 마음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 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맥에게는 세 종류의 용서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셋째, 그는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와 자신의 딸을 해친 살인마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이 셋 중에 그 어느 것도 용서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용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맥은 분노와 앙심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는 것이 잃어버린 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생각도, 용서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꿈 속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은 그가 전혀 원치 않았던 용서를 갈망하게 만들었고,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용서를 실천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분노를 다시 돌아보고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맥이 경험했던 세 종류의 용서를 꿈꾸고 기도하며 선택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혹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힘겨워 할 때가 옵니다. 그 각각의 경우에서 어떻게 용서를 꿈꾸고 실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의 말대로, “용서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There is no hope without forgiveness). 그래서 오늘은 세 종류의 용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2.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씀에 놀라실 분들이 계실 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한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용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을 당신의 절대 진리에 따라 절대 사랑으로 행하시기 때문에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할 이유는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분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분노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혹시 그런 감정이 든다면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해야지요. 어떻게 감히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까?”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아픕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뿐입니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대안입니다. 또 하나의 대안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 치유를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신이 독방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어려움과 힘듦을 견디는 것만이 나 자신과 이 세상에 희망을 끌어 올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품고 있던 ‘거대한 슬픔’은 사랑하는 딸 미시를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지만, 더 깊이 헤쳐 보면 그의 마음에 누적된 분노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린 딸을 해친 살인마에 대한 분노, 딸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그의 마음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 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맥에게는 세 종류의 용서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셋째, 그는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와 자신의 딸을 해친 살인마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이 셋 중에 그 어느 것도 용서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용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맥은 분노와 앙심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는 것이 잃어버린 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생각도, 용서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꿈 속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은 그가 전혀 원치 않았던 용서를 갈망하게 만들었고,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용서를 실천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분노를 다시 돌아보고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맥이 경험했던 세 종류의 용서를 꿈꾸고 기도하며 선택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혹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힘겨워 할 때가 옵니다. 그 각각의 경우에서 어떻게 용서를 꿈꾸고 실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의 말대로, “용서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There is no hope without forgiveness). 그래서 오늘은 세 종류의 용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2.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씀에 놀라실 분들이 계실 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한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용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을 당신의 절대 진리에 따라 절대 사랑으로 행하시기 때문에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할 이유는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분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분노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혹시 그런 감정이 든다면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해야지요. 어떻게 감히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교리적인 신앙은 비정한 악의 현실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이나 분노가 스믈스믈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맥과 같은 입장에 처하면, 그같은 감정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을 잠시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분노를 퍼붓는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에 얼마나 화가 났던지,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렘 20:7)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시편을, 그리고 욥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수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대들며 화를 냈습니다.
성경을 잠시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분노를 퍼붓는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에 얼마나 화가 났던지,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렘 20:7)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시편을, 그리고 욥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수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대들며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노를 그냥 참고 지켜 보십니다. 때가 이르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지만, 그 전까지는 잠자코 지켜 보십니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들이 그러시듯 하나님은 분노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분노가 얼토당토 않은데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분노가 잦아들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르면 그 모습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아버지는 분노한 큰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 분노한 사람에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렇게 하여 너의 분노가 풀린다면, 마음껏 화를 내거라. 나에게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은 안전하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네 분노를 쏟아 놓아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섭섭하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믿음이 없었나?”라면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기도로써 혹은 눈물로써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소설 <오두막>의 맥처럼, 그리고 욥기의 주인공처럼, 하나님께 대해 정직한 분노를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실은,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서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내려 놓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분노를 외면하거나 억압하거나 부인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죽어 버립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껍데기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형식일 뿐입니다. 맥이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 안에 그의 마음은 없었습니다. 분노가 하나님과 맥 사이를 가로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 적절하게 표출되지 못한 분노,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3.
둘째,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때때로,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데, 혼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소설 <오두막>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짠한 느낌을 준 사람이 맥의 넷째 딸 케이트입니다. 미시가 실종된 후, 케이트는 스스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에 숨어 버립니다. 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맥과 그 아내 낸은 속을 태웁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어떤 노력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맥이, 아내와 함께 친척 집에 간 케이트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묻습니다. “케이트는 어때?” 그러자 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맥, 나도 좀 알고 싶어.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 애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식구들이랑 같이 있을 때면 껍데기를 벗고 나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다시 쏙 들어가고 말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애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게 해 달라고 파파에게 계속 기도했지만……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 (30쪽)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 분노한 사람에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렇게 하여 너의 분노가 풀린다면, 마음껏 화를 내거라. 나에게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은 안전하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네 분노를 쏟아 놓아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섭섭하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믿음이 없었나?”라면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기도로써 혹은 눈물로써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소설 <오두막>의 맥처럼, 그리고 욥기의 주인공처럼, 하나님께 대해 정직한 분노를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실은,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서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내려 놓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분노를 외면하거나 억압하거나 부인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죽어 버립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껍데기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형식일 뿐입니다. 맥이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 안에 그의 마음은 없었습니다. 분노가 하나님과 맥 사이를 가로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 적절하게 표출되지 못한 분노,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3.
둘째,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때때로,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데, 혼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소설 <오두막>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짠한 느낌을 준 사람이 맥의 넷째 딸 케이트입니다. 미시가 실종된 후, 케이트는 스스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에 숨어 버립니다. 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맥과 그 아내 낸은 속을 태웁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어떤 노력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맥이, 아내와 함께 친척 집에 간 케이트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묻습니다. “케이트는 어때?” 그러자 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맥, 나도 좀 알고 싶어.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 애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식구들이랑 같이 있을 때면 껍데기를 벗고 나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다시 쏙 들어가고 말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애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게 해 달라고 파파에게 계속 기도했지만……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 (30쪽)
꿈 속에서 경험한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대화 중에 하나님은 맥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케이트는 자기 때문에 동생 미시가 유괴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빠와 카누를 타고 놀다가 케이트가 아빠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맥은 손을 흔들어 응답했고, 케이트도 아빠에게 응답하려고 노를 치켜 들었습니다. 그 순간 카누가 뒤집혔습니다. 맥은 물에 빠진 두 아이를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고, 그 사이에 미시가 납치되었습니다. 케이트로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현실로 돌아온 맥은 케이트를 따로 불러 미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케이트에게 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넵니다. “케이트,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긴장을 합니다. 맥이 다시 말합니다. “딸아, 그 일에 대해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는단다.” 그러자 케이트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언제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걸요. 아빠와 엄마가 날 원망한다고 생각했고요.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맥은 딸을 위로하며 이렇게 응답합니다. “케이트, 그 일을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거고 우리는 그 사건을 버텨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거야. 우리 모두 함께. 알겠지?” (이상 401-2쪽, p. 246)
나중에 현실로 돌아온 맥은 케이트를 따로 불러 미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케이트에게 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넵니다. “케이트,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긴장을 합니다. 맥이 다시 말합니다. “딸아, 그 일에 대해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는단다.” 그러자 케이트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언제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걸요. 아빠와 엄마가 날 원망한다고 생각했고요.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맥은 딸을 위로하며 이렇게 응답합니다. “케이트, 그 일을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거고 우리는 그 사건을 버텨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거야. 우리 모두 함께. 알겠지?” (이상 401-2쪽, p. 246)
케이트처럼, 일어난 어떤 사건을 두고 스스로를 징계하고 그 징벌을 매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은 맥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미시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껴졌고, 그래서 스스로를 징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났고, 케이트의 마음에서도 그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 폴 영은 독자들에게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징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분이 아침에 다른 교우와 테니스를 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함께 테니스를 친 교우는 심한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전 날 밤, 자신이 전화를 하여 테니스를 치자고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그 교우님은 “내가 만일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 사고를 피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내 친구를 죽게 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분은 심한 죄책감에 짓눌려 장례식을 치뤘고, 장례식 후에도 그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오랜 친구와 우연한 자리에서 동석하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세상을 떠난 그 친구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대화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고백하는 데까지 갑니다. 그 고백을 듣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입니까? 저는 의사인데, 내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다 내 잘못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순간, 그 교우님은 세상 떠난 그 친구가 그 의사 친구를 보내어 자신을 위로해 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난 그 친구는 늘 그렇게 친구들을 위로하고 품어 안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책감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로부터 서서히 스스로를 용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와 같은 마음의 짐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 계신지요? 나만 아는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나를 징벌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한 범죄가 아니라면, 자신을 용서하고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케이트처럼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안에 자신을 감금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4.
셋째,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상처는 아픔을 느끼게 하고, 그 아픔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분노가 쌓이면 마치 몸에 난 종기처럼 응어리가 됩니다. 혹은 매우 깊은 상처를 받으면 풀기 어려운 분노의 응어리가 생깁니다. 그 응어리가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 영적인 체증이 생깁니다. 이것이 마음과 영혼을 짓누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여러 가지의 질환을 만들어 냅니다.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고, 아무 이유 없이 열이 오르며, 목이나 명치에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CT 촬영을 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분노의 감정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과 상황을 잘 다스려야 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31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뭉쳐진 응어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 사람을 진실로 용서해야만 풀어집니다.
그런데 때로 용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을 때, 혹은 나에게 준 상처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일 때, 분노는 더욱 커지고 용서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사과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상처 때문에 아픈데, 너는 사과하여 짐을 벗으려고 하느냐?”는 생각에 속이 뒤틀립니다. 때로는,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그런 상처를 입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사랑스러운 딸을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는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맥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토로합니다.
파파, 나의 미시를 죽인 그 더러운 놈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놈이 여기에 있다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어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당한 만큼 그놈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어요. 정의를 이루지 못할 바엔 복수라도 하고 싶어요. (368쪽)
때로, 용서는 어렵습니다. 불가능해 보입니다. 용서하기가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억울하게 느껴지고,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만큼, 아니 그 이상 당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친다 해도, 내 마음에 받은 상처는 ‘내가’ 갚아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혼자 만큼은 냉엄한 심판대에서 내려 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상처 받았을 때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나의 앙심과 증오와 원한을 통해 내가 벌하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나의 원한과 증오심으로써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아십니까? 용서하는 것이 때로 죽기보다 힘들지만,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보더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서함으로써 자유함을 얻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소설 <오두막>에서 파파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란 너를 산 채로 먹어 없애는 힘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370쪽, p. 227)
5.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은 분노하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부여하신 건강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자주 분노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속 좁은 투기쟁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질투’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감정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은 냉혹한 관리자가 아니라, 감동하고 기뻐하며 실망하고 후회하며 분노하는, 인격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분노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정당하고, 바르게 표출되지만, 인간의 분노는 자주 근거 없이 폭발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분노를 잘 못 표출하면 ‘죄’가 됩니다. 분노를 마음 안에 쌓아놓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쌓인 분노가 있다면, 결국 용서에 이르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는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 4:26-2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익은 용서는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서두를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볶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 없는 목석 인간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자신을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 마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서 그 분노를 품어 익히시기 바랍니다.
분노를 품에 안고 그 해소를 열망하면 머지 않아 때가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용서를 선택하고 결행하면 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했듯이, 용서는 사건(event)이기보다는 과정(process)입니다. 용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완성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용서를 열망하고 있으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분노가 익습니다. 분노가 잘 익었을 때 용서를 선택하면, 그 응어리는 녹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금새 녹아 버리고,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6.
성경은 용서를 자주 명령형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32절). 용서하는 것이 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명령이 잔인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는 인간을 과대평가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죄성과 나약성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려워 하는 우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우리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를 행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명령하셨습니다.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용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후반부에서 성령의 역할을 맡은 사라유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용서할 때마다 이 지구는 변해요. 당신이 팔을 뻗어서 누군가의 마음이나 삶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 세계는 변해요. 눈에 드러나건 아니건 모든 친절과 봉사를 통해 내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되죠.”(386쪽, p. 237)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이웃을 변화시키며,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30절)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쓴 물을 뿜어내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 하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징벌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분노를 쏟아 놓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씨름하며 아파하면서 치유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용서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환히 웃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비로소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니 온 우주가 변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 기적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용서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초청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대답해 보십시다.
“예, 제가 오늘 용서를 선택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먼저, 용서할 그 사람을 향해 마음으로 선언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자녀의 선언에는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374쪽, p. 229) 그러니 용서를 선택하고 선언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마음 안에 용서가 영글게 하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만나십시오. 그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선 여러분의 마음에서 매듭을 푸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신이 상처를 준 사실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 이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품어 익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열망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어느 날, 소나기같은 은혜가, 혹은 이슬비같은 은혜가 내릴 것입니다.
혹시, 오래도록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징벌해 온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시간, “네가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러분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께 섭섭함이나 분노를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러니 그 마음을 내게 쏟아 놓아라”라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분노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마침내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잠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용서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저희를 용서하신 주님,저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상처를 당하여정직하게 분노하게 하시며,지혜롭게 분노를 다스리게 하시고,때를 따라 용서를 선택하게 하소서.용서로써 나를 바꾸고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꾸며세상을 바꾸고주님을 웃게하도록,주님, 저희를 도우소서.아멘
우리 중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분이 아침에 다른 교우와 테니스를 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함께 테니스를 친 교우는 심한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전 날 밤, 자신이 전화를 하여 테니스를 치자고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그 교우님은 “내가 만일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 사고를 피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내 친구를 죽게 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분은 심한 죄책감에 짓눌려 장례식을 치뤘고, 장례식 후에도 그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오랜 친구와 우연한 자리에서 동석하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세상을 떠난 그 친구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대화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고백하는 데까지 갑니다. 그 고백을 듣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입니까? 저는 의사인데, 내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다 내 잘못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순간, 그 교우님은 세상 떠난 그 친구가 그 의사 친구를 보내어 자신을 위로해 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난 그 친구는 늘 그렇게 친구들을 위로하고 품어 안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책감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로부터 서서히 스스로를 용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와 같은 마음의 짐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 계신지요? 나만 아는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나를 징벌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한 범죄가 아니라면, 자신을 용서하고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케이트처럼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안에 자신을 감금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4.
셋째,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상처는 아픔을 느끼게 하고, 그 아픔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분노가 쌓이면 마치 몸에 난 종기처럼 응어리가 됩니다. 혹은 매우 깊은 상처를 받으면 풀기 어려운 분노의 응어리가 생깁니다. 그 응어리가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 영적인 체증이 생깁니다. 이것이 마음과 영혼을 짓누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여러 가지의 질환을 만들어 냅니다.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고, 아무 이유 없이 열이 오르며, 목이나 명치에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CT 촬영을 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분노의 감정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과 상황을 잘 다스려야 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31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뭉쳐진 응어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 사람을 진실로 용서해야만 풀어집니다.
그런데 때로 용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을 때, 혹은 나에게 준 상처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일 때, 분노는 더욱 커지고 용서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사과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상처 때문에 아픈데, 너는 사과하여 짐을 벗으려고 하느냐?”는 생각에 속이 뒤틀립니다. 때로는,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그런 상처를 입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사랑스러운 딸을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는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맥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토로합니다.
파파, 나의 미시를 죽인 그 더러운 놈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놈이 여기에 있다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어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당한 만큼 그놈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어요. 정의를 이루지 못할 바엔 복수라도 하고 싶어요. (368쪽)
때로, 용서는 어렵습니다. 불가능해 보입니다. 용서하기가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억울하게 느껴지고,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만큼, 아니 그 이상 당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친다 해도, 내 마음에 받은 상처는 ‘내가’ 갚아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혼자 만큼은 냉엄한 심판대에서 내려 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상처 받았을 때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나의 앙심과 증오와 원한을 통해 내가 벌하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나의 원한과 증오심으로써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아십니까? 용서하는 것이 때로 죽기보다 힘들지만,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보더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서함으로써 자유함을 얻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소설 <오두막>에서 파파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란 너를 산 채로 먹어 없애는 힘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370쪽, p. 227)
5.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은 분노하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부여하신 건강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자주 분노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속 좁은 투기쟁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질투’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감정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은 냉혹한 관리자가 아니라, 감동하고 기뻐하며 실망하고 후회하며 분노하는, 인격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분노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정당하고, 바르게 표출되지만, 인간의 분노는 자주 근거 없이 폭발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분노를 잘 못 표출하면 ‘죄’가 됩니다. 분노를 마음 안에 쌓아놓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쌓인 분노가 있다면, 결국 용서에 이르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는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 4:26-2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익은 용서는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서두를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볶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 없는 목석 인간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자신을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 마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서 그 분노를 품어 익히시기 바랍니다.
분노를 품에 안고 그 해소를 열망하면 머지 않아 때가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용서를 선택하고 결행하면 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했듯이, 용서는 사건(event)이기보다는 과정(process)입니다. 용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완성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용서를 열망하고 있으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분노가 익습니다. 분노가 잘 익었을 때 용서를 선택하면, 그 응어리는 녹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금새 녹아 버리고,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6.
성경은 용서를 자주 명령형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32절). 용서하는 것이 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명령이 잔인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는 인간을 과대평가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죄성과 나약성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려워 하는 우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우리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를 행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명령하셨습니다.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용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후반부에서 성령의 역할을 맡은 사라유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용서할 때마다 이 지구는 변해요. 당신이 팔을 뻗어서 누군가의 마음이나 삶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 세계는 변해요. 눈에 드러나건 아니건 모든 친절과 봉사를 통해 내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되죠.”(386쪽, p. 237)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이웃을 변화시키며,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30절)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쓴 물을 뿜어내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 하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징벌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분노를 쏟아 놓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씨름하며 아파하면서 치유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용서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환히 웃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비로소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니 온 우주가 변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 기적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용서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초청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대답해 보십시다.
“예, 제가 오늘 용서를 선택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먼저, 용서할 그 사람을 향해 마음으로 선언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자녀의 선언에는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374쪽, p. 229) 그러니 용서를 선택하고 선언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마음 안에 용서가 영글게 하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만나십시오. 그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선 여러분의 마음에서 매듭을 푸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신이 상처를 준 사실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 이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품어 익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열망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어느 날, 소나기같은 은혜가, 혹은 이슬비같은 은혜가 내릴 것입니다.
혹시, 오래도록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징벌해 온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시간, “네가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러분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께 섭섭함이나 분노를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러니 그 마음을 내게 쏟아 놓아라”라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분노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마침내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잠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용서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저희를 용서하신 주님,저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상처를 당하여정직하게 분노하게 하시며,지혜롭게 분노를 다스리게 하시고,때를 따라 용서를 선택하게 하소서.용서로써 나를 바꾸고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꾸며세상을 바꾸고주님을 웃게하도록,주님, 저희를 도우소서.아멘
지금은 조금 아파도
지금은 조금 아파도-- 범서야, 삶은 마치 조각 퍼즐 같아.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실망과 슬픔의 조각이 네 삶의 그림 어디에 속하는지는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단다. 지금은 조금 아파도, 남보다 조금 뒤떨어지는 것 같아도, 지금 네가 느끼는 배고픔, 어리석음이야말로 결국 네 삶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의미있게 만들 힘이 된다는 것, 네게 꼭 말해주고 싶단다. 장영희의《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중에서
요즘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 아파요. 예전에 애써 묵혀 두었던 아픈 기억들이 잠을 깨웁니다.
요즘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 아파요. 예전에 애써 묵혀 두었던 아픈 기억들이 잠을 깨웁니다.
Wednesday, May 12, 2010
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아나밥티스트 김창규 <복음과 상황 170호 2005.10.15 >
16세기 종교개혁을 살펴보면 기독교 내의 부패한 기존 세력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목표는 유사했으나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과 같은 온건한 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꾸고자 했던 급진적 세력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이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에 대한 교회사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였고, 1920년대가 넘어서야 비로소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입장에서 역사가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다시 말해 1960년대 이전까지 재세례파는 마치 대부분의 미국 서부 영화에서 백인은 문명화된 개척자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인디언은 잔인하고 무지한 이들로 묘사되었던 것처럼, 종교개혁 주류세력의 관점에서 소수파인 그들은 부당하게 평가되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에 출현한 재세례파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며, 그들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이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이단자, 광신자 또는 반란자인 아나뱁티스트?
재세례파(Anabaptists: Re-baptizers)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할 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종교개혁이 한창인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쮜리히에서 쯔빙글리와 함께 개혁운동을 펼치던 그룹 중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온전한 교회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그들만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중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확신하여 스스로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신자의 세례’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로 신자의 세례는 스위스 쮜리히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모라비아, 그리고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러나 재세례파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추구하는 신앙적·교리적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재세례파 운동이 한 사람의 신학사상을 조직적으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동시대에 성경에 근거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소한 신자의 세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하지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지금까지 시행해오던 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심한 냉대를 받았다. 루터는 급진종교개혁자들을 가리켜 “광신자들”이라고 불렀고, 칼빈은 더 나아가 “미혹된 자들”, “두뇌가 산만한 자들”, “고집쟁이들”, “악당들”, “미친개들” 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불링거(Bullinger)는 심지어 “그들은 마귀적인 원수들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현대 역사가들도 재세례파에 대하여 그리 너그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영국의 사학자 엘튼(G. R. Elton)은 재세례파들이 주장하는 신학은 이성을 부인한 비합리적이고 심리적으로 불균형적인 망상에서 탄생한 격렬한 현상으로, 그들은 인간이 직접적 영감을 받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재세례파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기존교회의 전통으로 인정되던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이다. 당시 가톨릭에서의 유아세례란 성례전의 의미를 넘어서, 국가 교회 내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것이며 또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는 곧 교회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법을 위반하여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하는 세례론이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만, 유아세례가 하나님의 자녀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으로 인정하는 데는 유사한 부분이 있으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로 인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염려는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둘째 신자의 세례를 시행한 그룹의 신앙 패턴이 지역과 리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란 ‘종말론을 강조하며 폭력적인 사상을 지닌 그룹’이란 인식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경우 재세례파는 1534~1535년 북부 독일 뮌스터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과 연관해서 판단되었다. 재세례파 중에는 폭력적 성향을 지닌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믿고, 계시를 통해 새 예루살렘이 뮌스터라고 주장하며, 폭력적으로 이 시를 점거하고 신자의 세례를 거부하는 이들을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라이덴의 얀이라는 자는 자신을 스스로 ‘만백성의 의의 왕’으로 추대하여 그곳에서 신정통치를 시작한다. 이들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군이 공격이 시작되고 결국 유혈 대학살로 이들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위의 두 가지 관점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재세례파를 묘사한 것에 비추어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왔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반정부적 집단을 형성하였기에 그들은 국가에 대한 반란자들이고,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이단자들이란 것이다. 더욱이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 즉 종말론적 예언과 예수 재림의 계시, 구약의 관습을 그대로 좇아 행하는 중혼제도, 재세례를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것 등은 분명 이단자로 낙인 받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재세례파에 대한 이런 평가는 몇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 첫째 그들이 주장하는 신자의 세례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질서를 깨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의 의미를 좇아 행함으로써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권력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유아세례의 거부가 가톨릭의 핍박을 유발한 것은 당연했을지 몰라도, 교회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던 개혁자들에게도 걸림이 되었던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쯔빙글리와 같이 국가의 힘을 입어 개혁을 주도하는 이들에게 유아세례의 거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교회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을 말하며, 이는 더 이상 국가의 권력을 업고 개혁을 추진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유아세례의 주장은 성경적인 옳고 그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개혁을 위한 정치적 논리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뮌스터사건이 재세례파를 대표하거나 정의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단지 여러 분파의 재세례파들 중에 일부였고, 실제적으로 재세례파의 큰 줄기인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재산공동체인 후터파(Hutterite), 북부 독일과 화란의 메노나이트(Mennonite) 등의 그룹과는 극히 대조되는 신학과 삶을 보여준다. 뮌스터 사건을 재세례파의 전형적인 또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게 되면 하나의 잘못된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재세례파의 신학과 삶그러면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신학의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재세례파의 운동은 한 사람의 신학에 의해 시작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서로 다양한 신앙과 신학의 노선 중에서 이 운동의 동기와 그들간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재세례파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재세례파 신학의 이해는 먼저 그들의 성경관으로 시작해야 한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처럼 재세례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교리와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명령과 법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따라야 하는 규범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약보다 신약을 더 강조하였는데,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면, 신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성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성경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론 (Christocentrism)으로 연계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규범이며 행동지침이다. 재세례파들이 강조하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 내린 명령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실천했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세례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죄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의 삶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헌신하며 살겠다는 결단이다. 이것은 세례가 죄를 씻는 하나의 성례전임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 믿음이 선행되지 않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기에 재세례파에게 있어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유아세례의 실행은 예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따르려 했던 재세례파들의 모습은 그들의 교회론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했는데, 참된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자신이 죄인임으로 스스로 고백하여 모인 이들 즉 신자의 세례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교회는 국가로부터의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철저히 독립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전쟁과 종교박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의 폭력 앞에서도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를 지켜나갔다.신자의 세례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열심은 교회 내에서의 제자도와 이에 따른 공동체의 치리로 나타났다. 교회는 공동체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격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자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사랑 안에서 그러나 엄격함으로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가 ‘그리스도 믿음이’ (believers of Christ)를 배출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재세례파들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따름이’ (followers of Christ)를 선택한 것이다.
위의 내용은 재세례파에 관한 아주 개략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소수자를 바라보고, 선입견과 편견으로 그들을 정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외쳤던 신앙을 볼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을 쉽게 이단자로 또는 반란자로 정죄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사모하던 자들이었다. 자신들의 세상적 이익에는 관심이 없던 그들, 신자의 세례가 예수의 명령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분의 삶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이로 살아가는가, 따름이로 살아가는가?
16세기 종교개혁을 살펴보면 기독교 내의 부패한 기존 세력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목표는 유사했으나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과 같은 온건한 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꾸고자 했던 급진적 세력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이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에 대한 교회사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였고, 1920년대가 넘어서야 비로소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입장에서 역사가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다시 말해 1960년대 이전까지 재세례파는 마치 대부분의 미국 서부 영화에서 백인은 문명화된 개척자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인디언은 잔인하고 무지한 이들로 묘사되었던 것처럼, 종교개혁 주류세력의 관점에서 소수파인 그들은 부당하게 평가되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에 출현한 재세례파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며, 그들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이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이단자, 광신자 또는 반란자인 아나뱁티스트?
재세례파(Anabaptists: Re-baptizers)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할 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종교개혁이 한창인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쮜리히에서 쯔빙글리와 함께 개혁운동을 펼치던 그룹 중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온전한 교회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그들만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중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확신하여 스스로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신자의 세례’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로 신자의 세례는 스위스 쮜리히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모라비아, 그리고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러나 재세례파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추구하는 신앙적·교리적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재세례파 운동이 한 사람의 신학사상을 조직적으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동시대에 성경에 근거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소한 신자의 세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하지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지금까지 시행해오던 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심한 냉대를 받았다. 루터는 급진종교개혁자들을 가리켜 “광신자들”이라고 불렀고, 칼빈은 더 나아가 “미혹된 자들”, “두뇌가 산만한 자들”, “고집쟁이들”, “악당들”, “미친개들” 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불링거(Bullinger)는 심지어 “그들은 마귀적인 원수들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현대 역사가들도 재세례파에 대하여 그리 너그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영국의 사학자 엘튼(G. R. Elton)은 재세례파들이 주장하는 신학은 이성을 부인한 비합리적이고 심리적으로 불균형적인 망상에서 탄생한 격렬한 현상으로, 그들은 인간이 직접적 영감을 받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재세례파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기존교회의 전통으로 인정되던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이다. 당시 가톨릭에서의 유아세례란 성례전의 의미를 넘어서, 국가 교회 내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것이며 또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는 곧 교회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법을 위반하여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하는 세례론이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만, 유아세례가 하나님의 자녀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으로 인정하는 데는 유사한 부분이 있으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로 인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염려는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둘째 신자의 세례를 시행한 그룹의 신앙 패턴이 지역과 리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란 ‘종말론을 강조하며 폭력적인 사상을 지닌 그룹’이란 인식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경우 재세례파는 1534~1535년 북부 독일 뮌스터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과 연관해서 판단되었다. 재세례파 중에는 폭력적 성향을 지닌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믿고, 계시를 통해 새 예루살렘이 뮌스터라고 주장하며, 폭력적으로 이 시를 점거하고 신자의 세례를 거부하는 이들을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라이덴의 얀이라는 자는 자신을 스스로 ‘만백성의 의의 왕’으로 추대하여 그곳에서 신정통치를 시작한다. 이들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군이 공격이 시작되고 결국 유혈 대학살로 이들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위의 두 가지 관점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재세례파를 묘사한 것에 비추어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왔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반정부적 집단을 형성하였기에 그들은 국가에 대한 반란자들이고,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이단자들이란 것이다. 더욱이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 즉 종말론적 예언과 예수 재림의 계시, 구약의 관습을 그대로 좇아 행하는 중혼제도, 재세례를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것 등은 분명 이단자로 낙인 받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재세례파에 대한 이런 평가는 몇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 첫째 그들이 주장하는 신자의 세례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질서를 깨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의 의미를 좇아 행함으로써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권력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유아세례의 거부가 가톨릭의 핍박을 유발한 것은 당연했을지 몰라도, 교회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던 개혁자들에게도 걸림이 되었던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쯔빙글리와 같이 국가의 힘을 입어 개혁을 주도하는 이들에게 유아세례의 거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교회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을 말하며, 이는 더 이상 국가의 권력을 업고 개혁을 추진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유아세례의 주장은 성경적인 옳고 그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개혁을 위한 정치적 논리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뮌스터사건이 재세례파를 대표하거나 정의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단지 여러 분파의 재세례파들 중에 일부였고, 실제적으로 재세례파의 큰 줄기인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재산공동체인 후터파(Hutterite), 북부 독일과 화란의 메노나이트(Mennonite) 등의 그룹과는 극히 대조되는 신학과 삶을 보여준다. 뮌스터 사건을 재세례파의 전형적인 또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게 되면 하나의 잘못된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재세례파의 신학과 삶그러면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신학의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재세례파의 운동은 한 사람의 신학에 의해 시작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서로 다양한 신앙과 신학의 노선 중에서 이 운동의 동기와 그들간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재세례파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재세례파 신학의 이해는 먼저 그들의 성경관으로 시작해야 한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처럼 재세례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교리와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명령과 법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따라야 하는 규범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약보다 신약을 더 강조하였는데,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면, 신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성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성경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론 (Christocentrism)으로 연계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규범이며 행동지침이다. 재세례파들이 강조하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 내린 명령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실천했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세례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죄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의 삶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헌신하며 살겠다는 결단이다. 이것은 세례가 죄를 씻는 하나의 성례전임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 믿음이 선행되지 않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기에 재세례파에게 있어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유아세례의 실행은 예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따르려 했던 재세례파들의 모습은 그들의 교회론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했는데, 참된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자신이 죄인임으로 스스로 고백하여 모인 이들 즉 신자의 세례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교회는 국가로부터의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철저히 독립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전쟁과 종교박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의 폭력 앞에서도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를 지켜나갔다.신자의 세례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열심은 교회 내에서의 제자도와 이에 따른 공동체의 치리로 나타났다. 교회는 공동체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격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자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사랑 안에서 그러나 엄격함으로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가 ‘그리스도 믿음이’ (believers of Christ)를 배출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재세례파들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따름이’ (followers of Christ)를 선택한 것이다.
위의 내용은 재세례파에 관한 아주 개략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소수자를 바라보고, 선입견과 편견으로 그들을 정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외쳤던 신앙을 볼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을 쉽게 이단자로 또는 반란자로 정죄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사모하던 자들이었다. 자신들의 세상적 이익에는 관심이 없던 그들, 신자의 세례가 예수의 명령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분의 삶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이로 살아가는가, 따름이로 살아가는가?
Tuesday, May 11, 2010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詩.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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