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6909개 언어로 성경’기대…컴퓨터와 위성통신 등 첨단기술로인구가 얼마 되지 않은 희귀 종족들을 위한 성경들이 발빠르게 번역되고 있다.가장 최근엔 부고투어로 성경이 발행됐다. 부고투는 솔로몬제도에 거주하는 약 4000명의 종족이다.
크리스찬투데이위클리프성서번역회(WBT)가 140년으로 잡았던‘최후언어캠페인’(LLC)이 오는 2025년까지 15년 내로 끝날 것으로 잡고 있다. 신교 번역자들은 그때까지 현재 적어도 구어로 사용중인 세계 6,909 언어로 고루 성경이 발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휴대용 컴퓨터와 위성통신 등 첨단기술 때문이다. 500년 전엔지상 언어수가 지금의 2배 정도였다.과거엔 선교사 가족 또는 팀이 오지의 현지어 1개를 택해 수십년 걸려야 간신히 언어를 배우고 옮김 사역을 해서 성경을 펴내곤 했다. ‘1개팀∙1개어∙한평생’이 당시의 구호였고 목표 연도는 2150년이었다.현재는 첨단기술로 무장한 사역자가 숙련된 현지인 번역가들과 협력하여 한 명이 평생에 여러 가지 언어의 성경을 펴낼 수 있게 됐다. 위클리프 번역 사역자들은 복음화/신학교육/성경공부/교회개척 대신 문자언어를 다룬다. 모국어로 읽고 쓰기를 가르친다.이 사역자들은 각 희귀언어를 위한 알파벳과 초급 독자들을 계발해낸 뒤 성경을 번역한다. 아직 성경이 없는 언어는 약2,200개. 대부분 중국과 인도, 사하라 이남지역의 아프리카, 파푸아뉴기니 등에 분포된 3억5000만 명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사역자들은 성경 및 언어학 훈련을 받은 6,600명의 경력자와 단기선교사들. 이들은 직접적인 복음화 사역은 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해야 하며 교회 등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콜로라도 주립대 졸업생인 케이티 자트먼(27세)은 플로리도 올랜도에 본부를 둔 위클리프의 상임 그래픽 디자이너. 최근 세네갈로 2주 선교여행을 다녀왔다. 그곳 사피 족에게 성경을 선사하기 위해 레이아웃과 디자인 웍샵 등을 통해 그들의 알파벳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들은 단2주만에 출판자들이 됐다”고 그는 전했다. 12명의 참여자들은 무료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을 사용, 사피어로 된 24쪽짜리 어린이 이야기 책자를 위한 수십 쪽의 초안을 잡았다. 자트먼은“일단 그들의 심정언어(HL)로 된 성경을 갖게 되면 그들의 구전과 문화의 사전 역할도 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렇게 되면 주변문화권에 삼켜질 우려가 있는 사피의 고유문화가 보존될 퍼텐셜도 커지는 셈이다.수많은 구전 언어가 멸종 직전에 처해있다. 생존해 있는 몇몇 노인들만 알 뿐 후손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일단 언어가 기록만 되면,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인류학자들은 구전문화권에 대한 선교사역에 회의를 품어왔다 기사제공ⓒ 크리스찬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us)
Wednesday, July 21, 2010
Saturday, July 17, 2010
알리야
제2 출애굽…‘성경예언 성취’(?)
세계 유대인들 이스라엘로 귀국이민“급물살”
크리스찬투데이-- ‘성경예언 성취’를 위한 것이란 세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국 이민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현지 언론 아루츠 쉐바에 따르면, 가장 최근인 6월 하순에도 100명의 새 이민자들이 미국으로부터 관련 유대계 단체 네페쉬브네페쉬(이하 NBN)와 주이쉬 에이전시(JA)의 제휴로 현지에 도착했다. 곧 이어 캐나다와 영국에서도 유대인들이 오기로 되어 있다.이들 두 단체의 협력만으로 올 여름기간 중 모두 3000여 신규 이민자들이 그립던 모국인 이스라엘에 당도, 정착할 예정이다. 미국계 이민자들 다수는 이미 에일랏으로부터 북부까지 거주지역을 선정한 상태.
정착지를 결정하면 NBN 북지부의 캠페인 지원을 받게 된다. NBN의 활동은 최근 영국에서도 강화돼 그곳 유대인들의 알리야(모국 이민이란 뜻. 이민자들을‘올림’이라고 함)는 50% 이상 증가했다. NBN은 북미주와 영국에서만 활발하지만, JA는 세계적으로 활동해 올해 수십개 국가 유대인들의 모국 귀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과거 활발했던 구소련 지역의 알리야가 줄어들면서 영어권올림들이 크게 늘고 있다. 아울러 프랑스와 예멘 등의 알리야도 증가 중이다. 알리야 자격심사는 NBN과 JA가 함께 개인의 서류 파일을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요서류에는 신청서 외에도 신청자를 아는 랍비의 추천서 등도 포함된다. 자신 또는 부모/조부모의 양쪽이나 한쪽이 유대계임을 입증하는 문서, 관련 이혼증명서, 부모/조부모의 비석 사진 등도 받아들이며 꼭 정통적인 문서가 아니어도 접수된다.지난 90년대엔 심지어 아프리카 흑인들 중 고대 유대계 후손들도 대거 이민을 와 정착한 바 있다. 이들 대다수는 가족전통과 관련 유품 등으로 역사적으로 유대계 혈통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혹 증명되지 못한 사람들도 자비로 정착할 수 있다.유대계 네티즌들은 이런 소식에 흥분하는가 하면, “도대체 누가 진짜 유대인이란 말인가, 과연 뭘로 입증되나?”, “좁은 땅에 정착해 앞으로 어쩌겠다는 건가, 이민 실직자가 늘지 않겠나?”등등 의혹의 눈길도 만만치는 않다.그러나 유럽과 영어권 사람들은 현 거주국가에 무슬림들이 나날이 늘어가는 데다 날로 유대인 혐오사상 또는‘반셈족주의’가 점증해 모국 알리야가 유리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새미’라는 필명의 캐나다 유대인은“미국/캐나다/유럽 등의 경제악화에다 반유대 감정이 날로 심화돼 앞으로도‘올림’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2400여년 전 유다 왕국이 멸망한 뒤 전세계에 흩어져 살아온 유대계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독립한 지난 1948년부터 귀환하기 시작, 60여년 만에 디아스포라(흩어진 무리)의 약40%의 알리야가 이루어졌다.한편 이들 유대인들은 현재의 알리야 물결을 예레미야 30:3, 31:9 등 구약 성구의 성취로 믿고 있다. 이스라엘 지도층은 궁극적으로 이들의 힘을 모아 이른 바‘제3성전’의 건립 추진 계획을 바라보고 있다.유대인들 대부분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스라엘을 정치적 강국으로 만들어 줄 강력한 제2의 메시아를 여전히 대망하고 있다. 그밖에도 시오니즘(시온주의) 등의 운동이 유대계 나름의‘이스라엘 회복’을 추구해 왔다.반면 신약성경과 참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평화 재림과 유대인들의 회개/거듭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교계엔‘이스라엘 회복’을 돕는다는‘크리스천 시온운동’, 다양한 (극)보수주의 운동, 단지 이스라엘 돕기 차원의 재정지원 등이 흔한 실정이다.그런가 하면, 세계교회협의회(WCC) 계열인 진보계 주류 교파/교단들은 팔레스타인계 쪽을 더 지원하면서 최근 이스라엘 해군의 가자지구 구조선 승선 봉사자들 총격 사건을 빌미로 더욱 반이스라엘 감정을 조장해 왔다. 미국장로교(PCUSA)는 올해 총회 중 교단차원으로 미연방정부의 이스라엘 지원반대 발의안을 상정시킨 바 있다.
기사입력: 2010/07/14 [09:27] 최종편집: ⓒ 크리스찬투데이
세계 유대인들 이스라엘로 귀국이민“급물살”
크리스찬투데이-- ‘성경예언 성취’를 위한 것이란 세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국 이민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현지 언론 아루츠 쉐바에 따르면, 가장 최근인 6월 하순에도 100명의 새 이민자들이 미국으로부터 관련 유대계 단체 네페쉬브네페쉬(이하 NBN)와 주이쉬 에이전시(JA)의 제휴로 현지에 도착했다. 곧 이어 캐나다와 영국에서도 유대인들이 오기로 되어 있다.이들 두 단체의 협력만으로 올 여름기간 중 모두 3000여 신규 이민자들이 그립던 모국인 이스라엘에 당도, 정착할 예정이다. 미국계 이민자들 다수는 이미 에일랏으로부터 북부까지 거주지역을 선정한 상태.
정착지를 결정하면 NBN 북지부의 캠페인 지원을 받게 된다. NBN의 활동은 최근 영국에서도 강화돼 그곳 유대인들의 알리야(모국 이민이란 뜻. 이민자들을‘올림’이라고 함)는 50% 이상 증가했다. NBN은 북미주와 영국에서만 활발하지만, JA는 세계적으로 활동해 올해 수십개 국가 유대인들의 모국 귀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과거 활발했던 구소련 지역의 알리야가 줄어들면서 영어권올림들이 크게 늘고 있다. 아울러 프랑스와 예멘 등의 알리야도 증가 중이다. 알리야 자격심사는 NBN과 JA가 함께 개인의 서류 파일을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요서류에는 신청서 외에도 신청자를 아는 랍비의 추천서 등도 포함된다. 자신 또는 부모/조부모의 양쪽이나 한쪽이 유대계임을 입증하는 문서, 관련 이혼증명서, 부모/조부모의 비석 사진 등도 받아들이며 꼭 정통적인 문서가 아니어도 접수된다.지난 90년대엔 심지어 아프리카 흑인들 중 고대 유대계 후손들도 대거 이민을 와 정착한 바 있다. 이들 대다수는 가족전통과 관련 유품 등으로 역사적으로 유대계 혈통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혹 증명되지 못한 사람들도 자비로 정착할 수 있다.유대계 네티즌들은 이런 소식에 흥분하는가 하면, “도대체 누가 진짜 유대인이란 말인가, 과연 뭘로 입증되나?”, “좁은 땅에 정착해 앞으로 어쩌겠다는 건가, 이민 실직자가 늘지 않겠나?”등등 의혹의 눈길도 만만치는 않다.그러나 유럽과 영어권 사람들은 현 거주국가에 무슬림들이 나날이 늘어가는 데다 날로 유대인 혐오사상 또는‘반셈족주의’가 점증해 모국 알리야가 유리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새미’라는 필명의 캐나다 유대인은“미국/캐나다/유럽 등의 경제악화에다 반유대 감정이 날로 심화돼 앞으로도‘올림’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2400여년 전 유다 왕국이 멸망한 뒤 전세계에 흩어져 살아온 유대계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독립한 지난 1948년부터 귀환하기 시작, 60여년 만에 디아스포라(흩어진 무리)의 약40%의 알리야가 이루어졌다.한편 이들 유대인들은 현재의 알리야 물결을 예레미야 30:3, 31:9 등 구약 성구의 성취로 믿고 있다. 이스라엘 지도층은 궁극적으로 이들의 힘을 모아 이른 바‘제3성전’의 건립 추진 계획을 바라보고 있다.유대인들 대부분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스라엘을 정치적 강국으로 만들어 줄 강력한 제2의 메시아를 여전히 대망하고 있다. 그밖에도 시오니즘(시온주의) 등의 운동이 유대계 나름의‘이스라엘 회복’을 추구해 왔다.반면 신약성경과 참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평화 재림과 유대인들의 회개/거듭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교계엔‘이스라엘 회복’을 돕는다는‘크리스천 시온운동’, 다양한 (극)보수주의 운동, 단지 이스라엘 돕기 차원의 재정지원 등이 흔한 실정이다.그런가 하면, 세계교회협의회(WCC) 계열인 진보계 주류 교파/교단들은 팔레스타인계 쪽을 더 지원하면서 최근 이스라엘 해군의 가자지구 구조선 승선 봉사자들 총격 사건을 빌미로 더욱 반이스라엘 감정을 조장해 왔다. 미국장로교(PCUSA)는 올해 총회 중 교단차원으로 미연방정부의 이스라엘 지원반대 발의안을 상정시킨 바 있다.
기사입력: 2010/07/14 [09:27] 최종편집: ⓒ 크리스찬투데이
오워박사의 메시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
오워박사의 메시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 이태형 국민일보 i미션라이프부 부장
‘점쟁이 문어’ 파울(Paul)은 2010 남아공월드컵 최고의 스타였다. 파울은 독일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모든 경기의 승패와 결승전 스페인의 승리까지 정확하게 맞히며 유명세를 탔다. 독일의 수족관에 사는, 지능이 잘해야 강아지 정도인 이 문어 파울이 어떻게 신통력 있게 예측을 할 수 있었을까. 여러 분석이 있겠지만 파울의 예언은 거듭된 우연이 빚어낸 하나의 해프닝일 가능성이 크다. 파울의 '예언'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던 지난 6월 말부터 7월 초에 데이비드 오워라는 케냐인이 한국을 방문했다. 오워는 이스라엘과 독일 등지에서 공부한 뒤에 분자유전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 당시 기독교 관련 인터넷에는 ‘오워 박사의 예언’이라는 내용의 글이 돌았다. 일부에서는 핸드폰으로, 메일로 그 내용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실제로 문자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언의 핵심은 ‘한국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2개월 내에 전쟁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미 오워 박사가 아이티 및 칠레의 지진을 사전에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오워 박사는 2003년에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한 이후 지금까지 교회들의 회개와 거룩함,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예언과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해오고 있다. 아이티 지진과 관련한 예언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2009년 11월에 아이티와 인접한 도미니카공화국을 방문하여 가진 집회에서 아이티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이티를 흔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아이티에는 성적인 죄악이 가득했고 교회 안에 죄악이 만연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언급이었다. 그의 ‘예언’이 나온 지 1년이 지난 2010년 1월 12일에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나 30만 명이 죽었다. 오워 박사는 한국에서의 집회에서 “그들(아이티인)이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그런 일(지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칠레에서도 비슷한 예언을 했다. 집회와 TV 생방송에 나와 회개하지 않으면 칠레에도 지진이 날 것으로 예언했다. 그가 예언한 지 1년 여만에 칠레에 진도 8.8의 강진이 일어났다. 이같이 아이티와 칠레에 대한 예언이 정확한 사실(Fact)인지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아이티와 칠레에 대한 그의 예언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도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 가운데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대부분 ‘전해 들은’ 이야기다. 전해들은 이야기가 증폭되어 신비화 되고, 그렇게 해서 신화화 되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또한 그의 말이 사실일지라도 비슷한 예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문어 파울이 8경기 연속 경기의 승패를 맞추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운 예언 일 수 있다. 가령 한 목회자가 일본에서 집회를 갖고 “앞으로 일본이 회개하지 않으면 지진이 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고 해 보자. 지진 발생이 잦은 일본에서는 언젠가는 고베 대지진과 같은 큰 지진이 날 것이다. 그것을 갖고 “내 예언이 맞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워 박사는 아직 한국교회내에서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정확히 그가 누구인지, 신학적 배경은 어떠한지, 교회와의 관계는 건강한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한국교회에 대해서 '영적 사자후'와 같은 말씀을 '공식적으로' 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물론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인적인 것이 일반화 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오워 박사의 ‘2개월 내 한반도 전쟁설’은 다소간의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퇴근해 집의 컴퓨터를 보니 데이비드 오워의 내용들이 떠 있었다. 아내가 검색한 것이었다. “어떻게 오워 박사를 알게 됐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교회 셀 모임에서 오워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문자 메시지를 받은 한 교회 성도가 오워 박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국민일보 내 기자들 가운데서도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오워 박사를 직접 인터뷰한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2달 내 한반도 전쟁설’은 와전됐다. 오워 박사는 결코 시한을 적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한국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경고 사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으로 받았다는 한국을 향한 메시지에는 음미할 점이 많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떼어 놓고 메지지 자체만을 볼때에 우리를 깨우치게 하는 어떤 것이 있는 듯 하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신앙계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옮겨본다. “하나님은 늘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데 한국 교회 안에 부를 좇는 번영 신학이 십자가 복음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학은 절대로 죄를 책망할 수 없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이 땅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하나님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온전한 복음에서 세상의 누룩을 제거하십시오. 또한 한국 교회 안에 성적인 죄가 만연해 있습니다. 동성애와 음란함과 낙태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책망하는 설교가 사라졌습니다. 죄를 죄라고 지적하고 회개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한국교회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이 땅에도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을 사랑하시고 한국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기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깨끗한 혼인예복을 예비한 신부들을 찾고 계십니다. 때가 임박했음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십시오.” 결국 한국 교회와 사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 땅에 내렸던 부흥의 촛대가 옮겨질 수 있으며 한반도가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오워 박사가 강조한 것은 회개와 거룩함이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오워 박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몇 주전 국민일보를 방문했던 국제예수전도단 설립자 로렌 커닝햄 목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다가오는 부흥을 한국교회는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준비는 회개였다. 철저하게 마음을 찢는 회개가 교회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면 부흥의 물결은 한국을 우회해 갈 것이라는 언급이었다. 특별히 커닝햄 목사는 한국 교회가 남북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은 수년내에 한국에서 엄청난 일을 행하시려 하는데 한국교회가 그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오워 박사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 부흥이 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어요. 회개와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가져오는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허락하시기 전에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바로 서야 합니다. 국가적인 회개가 한국의 지도자들로부터 일어나길 바랍니다.” 마침 이 글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60대 목회자가 교회에서 10대 여성도를 성폭행했다는 보도가 인터넷 속보로 올라왔다. 또한 부흥의 준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교회내 분쟁, 교단내 분쟁으로 일그러진 한국 교회에 관한 소식들도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있다. 사실 파울이건, 오워 박사건, 예언 자체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워 박사의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듯 하다. 오워 박사와 로렌 커닝햄 목사의 메시지를 통해서 한국 교회와 성도가 묵상하고 깊이 돌아봐야 할 것들이 있다. 갑자기 한국에 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그들의 메시지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도 깊이 인식하는 내용이다. 인식하지만 돌아서지 못하는 것들이다. 국민일보는 지난 12일 인터넷(missionlife.co.kr)에 메인 기사로 오워 박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게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사를 클릭했다. 평균 조회수를 훨씬 상회하는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는 생소한 한 젊은 케냐 박사의 이야기에 수많은 한국 크리스천들이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흥미 때문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 이를테면 영적인 공명현상이 있는 것일까? 오워 박사건, 커닝햄 목사건 그들의 경력을 볼 필요는 없다. 예언도 너무 깊이 생각하면 자충수에 빠진다. 우리에게는 예언보다 더 중요한 성경이 있다. 성경에서도 수없이 비슷한 '예언'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와 전했던 그들의 메시지만은 반드시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교회 모습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목회자건, 장로건, 성도건)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 메시지의 본질은 너무나 성경의 말씀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예레미야 2장13절)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예레미야 8장6절)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예레미야 8:11)
‘점쟁이 문어’ 파울(Paul)은 2010 남아공월드컵 최고의 스타였다. 파울은 독일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모든 경기의 승패와 결승전 스페인의 승리까지 정확하게 맞히며 유명세를 탔다. 독일의 수족관에 사는, 지능이 잘해야 강아지 정도인 이 문어 파울이 어떻게 신통력 있게 예측을 할 수 있었을까. 여러 분석이 있겠지만 파울의 예언은 거듭된 우연이 빚어낸 하나의 해프닝일 가능성이 크다. 파울의 '예언'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던 지난 6월 말부터 7월 초에 데이비드 오워라는 케냐인이 한국을 방문했다. 오워는 이스라엘과 독일 등지에서 공부한 뒤에 분자유전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 당시 기독교 관련 인터넷에는 ‘오워 박사의 예언’이라는 내용의 글이 돌았다. 일부에서는 핸드폰으로, 메일로 그 내용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실제로 문자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언의 핵심은 ‘한국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2개월 내에 전쟁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미 오워 박사가 아이티 및 칠레의 지진을 사전에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오워 박사는 2003년에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한 이후 지금까지 교회들의 회개와 거룩함,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예언과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해오고 있다. 아이티 지진과 관련한 예언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2009년 11월에 아이티와 인접한 도미니카공화국을 방문하여 가진 집회에서 아이티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이티를 흔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아이티에는 성적인 죄악이 가득했고 교회 안에 죄악이 만연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언급이었다. 그의 ‘예언’이 나온 지 1년이 지난 2010년 1월 12일에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나 30만 명이 죽었다. 오워 박사는 한국에서의 집회에서 “그들(아이티인)이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그런 일(지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칠레에서도 비슷한 예언을 했다. 집회와 TV 생방송에 나와 회개하지 않으면 칠레에도 지진이 날 것으로 예언했다. 그가 예언한 지 1년 여만에 칠레에 진도 8.8의 강진이 일어났다. 이같이 아이티와 칠레에 대한 예언이 정확한 사실(Fact)인지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아이티와 칠레에 대한 그의 예언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도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 가운데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대부분 ‘전해 들은’ 이야기다. 전해들은 이야기가 증폭되어 신비화 되고, 그렇게 해서 신화화 되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또한 그의 말이 사실일지라도 비슷한 예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문어 파울이 8경기 연속 경기의 승패를 맞추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운 예언 일 수 있다. 가령 한 목회자가 일본에서 집회를 갖고 “앞으로 일본이 회개하지 않으면 지진이 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고 해 보자. 지진 발생이 잦은 일본에서는 언젠가는 고베 대지진과 같은 큰 지진이 날 것이다. 그것을 갖고 “내 예언이 맞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워 박사는 아직 한국교회내에서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정확히 그가 누구인지, 신학적 배경은 어떠한지, 교회와의 관계는 건강한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한국교회에 대해서 '영적 사자후'와 같은 말씀을 '공식적으로' 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물론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인적인 것이 일반화 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오워 박사의 ‘2개월 내 한반도 전쟁설’은 다소간의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퇴근해 집의 컴퓨터를 보니 데이비드 오워의 내용들이 떠 있었다. 아내가 검색한 것이었다. “어떻게 오워 박사를 알게 됐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교회 셀 모임에서 오워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문자 메시지를 받은 한 교회 성도가 오워 박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국민일보 내 기자들 가운데서도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오워 박사를 직접 인터뷰한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2달 내 한반도 전쟁설’은 와전됐다. 오워 박사는 결코 시한을 적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한국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경고 사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으로 받았다는 한국을 향한 메시지에는 음미할 점이 많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떼어 놓고 메지지 자체만을 볼때에 우리를 깨우치게 하는 어떤 것이 있는 듯 하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신앙계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옮겨본다. “하나님은 늘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데 한국 교회 안에 부를 좇는 번영 신학이 십자가 복음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학은 절대로 죄를 책망할 수 없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이 땅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하나님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온전한 복음에서 세상의 누룩을 제거하십시오. 또한 한국 교회 안에 성적인 죄가 만연해 있습니다. 동성애와 음란함과 낙태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책망하는 설교가 사라졌습니다. 죄를 죄라고 지적하고 회개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한국교회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이 땅에도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을 사랑하시고 한국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기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깨끗한 혼인예복을 예비한 신부들을 찾고 계십니다. 때가 임박했음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십시오.” 결국 한국 교회와 사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 땅에 내렸던 부흥의 촛대가 옮겨질 수 있으며 한반도가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오워 박사가 강조한 것은 회개와 거룩함이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오워 박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몇 주전 국민일보를 방문했던 국제예수전도단 설립자 로렌 커닝햄 목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다가오는 부흥을 한국교회는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준비는 회개였다. 철저하게 마음을 찢는 회개가 교회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면 부흥의 물결은 한국을 우회해 갈 것이라는 언급이었다. 특별히 커닝햄 목사는 한국 교회가 남북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은 수년내에 한국에서 엄청난 일을 행하시려 하는데 한국교회가 그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오워 박사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 부흥이 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어요. 회개와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가져오는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허락하시기 전에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바로 서야 합니다. 국가적인 회개가 한국의 지도자들로부터 일어나길 바랍니다.” 마침 이 글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60대 목회자가 교회에서 10대 여성도를 성폭행했다는 보도가 인터넷 속보로 올라왔다. 또한 부흥의 준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교회내 분쟁, 교단내 분쟁으로 일그러진 한국 교회에 관한 소식들도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있다. 사실 파울이건, 오워 박사건, 예언 자체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워 박사의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듯 하다. 오워 박사와 로렌 커닝햄 목사의 메시지를 통해서 한국 교회와 성도가 묵상하고 깊이 돌아봐야 할 것들이 있다. 갑자기 한국에 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그들의 메시지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도 깊이 인식하는 내용이다. 인식하지만 돌아서지 못하는 것들이다. 국민일보는 지난 12일 인터넷(missionlife.co.kr)에 메인 기사로 오워 박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게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사를 클릭했다. 평균 조회수를 훨씬 상회하는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는 생소한 한 젊은 케냐 박사의 이야기에 수많은 한국 크리스천들이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흥미 때문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 이를테면 영적인 공명현상이 있는 것일까? 오워 박사건, 커닝햄 목사건 그들의 경력을 볼 필요는 없다. 예언도 너무 깊이 생각하면 자충수에 빠진다. 우리에게는 예언보다 더 중요한 성경이 있다. 성경에서도 수없이 비슷한 '예언'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와 전했던 그들의 메시지만은 반드시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교회 모습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목회자건, 장로건, 성도건)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 메시지의 본질은 너무나 성경의 말씀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예레미야 2장13절)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예레미야 8장6절)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예레미야 8:11)
Wednesday, July 14, 2010
beetroot의 효능
근대뿌리쥬스(beetroot juice)를 마시는 것이 스태미나를 증진시키고 운동시간을 16% 가량 늘릴 수 있다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7일 엑스터대학 연구팀이 'Applied Physiology' 저널에 밝힌 19~38세 연령의 8명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근대뿌리속에 함유된 질산염이 산소흡수능을 줄여 운동시 피로도를 덜 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결과 이 같은 효과는 규칙적인 운동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효과보다 더욱 큰 것으로 나타났다.근대뿌리는 이미 혈압을 낮추는데 효과적인 것으로 잘 알려져 온 바 연구팀은 이번 연구결과 근대뿌리쥬스를 마시는 것이 심혈관장애나 호흡기장애, 대사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선수들에 있어서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이어 연구팀은 "정확한 기전은 알 수 없지만 근대뿌리쥬스속 질산염이 스태미나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Thursday, July 1, 2010
미주 한인 교회의 아픔
<이용규 선교사>
필자는 미국 텍사스의 작은 도시에 머물면서 이민 교회로부터 집회 요청을 받아 두 달 동안 거의 매주 집회로 섬기게 되었다. 어차피 이번에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게 되면 다시 미국 땅을 밟으며 이민 교회들을 섬길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무리해서 일정을 잡고 말씀 집회를 가졌다. 집회를 다니면서 각각의 지역에 세워진 한인 교회들마다 특징이 있고 사명이 있고 또 도전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민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그 분의 계획을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집회 가운데 미주 지역의 한인 이민 교회가 가진 근원적인 문제점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민 온 동기와 목적이 복음 안에서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신의 이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결국 자신들이 이민 온 땅에서 사명이 아닌 세속의 풍요와 번영을 추구했던 롯으로서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남아있는 이유는 교회 안에 자신을 위한 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구에서였다. 이민 생활에서의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자신의 자존감과 중요도를 확인시켜주는 교제의 장으로서 또 어려울 때 의지가 되는 장소로서 교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교회가 이민자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것이 근본 목적인 것처럼 오해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시카고 지역을 포함한 한인이 밀집된 대도시와 그 인근 교외지의 교회들은 지속적인 분열을 경험해 왔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적어도 세 교회 이상 교회를 옮겨본 경험이 있다. 교회에 문제가 터질 때마다 분란을 피해서 수평이동을 해 왔다. 결국 교회들간의 관계들도 깨어져서 연합 행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다수의 교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타지 생활의 위로와 의지처를 제공해 줄 “좋은” 교회들을 찾으며 이주하고 있다. 그리고 연배와 수준과 관심이 맞는 교제권을 그 안에서 찾기 원한다. 많은 이들은 끝내 그런 교회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을 다 보내버리곤 한다. 물론 이와 같이 교인들 다수가 필요만을 위해서 교회를 찾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민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한 번은 유럽의 어느 교회에서 신년에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내려놓음과 십자가”라는 주제의 말씀을 전하기에 묵상하면서 기도하다가 문득 강대상 위에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거기에는 “신년 금식 축복 대성회”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문득 당혹감이 찾아왔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주최측에서 기대하는 메시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물었다.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 제가 전해야 할 말씀이 무엇인가요?” 내 마음 가운데 질문이 찾아왔다. “너 무엇이 진짜 축복인지 아니? 그것은 나를 소유하는 것이란다.”한국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보다는 하나님 손에 들려있는 축복, 또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주어지는 대가에 관심이 더 많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전통적인 신관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천지신명에게 또는 삼신 할머니나 산신령에게 빌거나 무당 굿을 해 왔던 이유를 안다. 그들은 이렇게 비는 행위를 통해 영적인 존재에게 잘 보이고 그래서 해를 면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했다. 천지신명이나 삼신 할머니 등을 사랑해서 지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기를 원했다. 목적이 이루어지면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 분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시카고 인근의 여러 교회들이 분열을 경험하고 아파하는 상황이다. 거의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들이 갈라졌고 교인들이 흩어졌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소행으로만 보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이면에 그 공격을 허용한 큰 약점이 교회에 있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교회가 그들의 필요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는 점이다. 시카고 지역이 팽창하면서 인근에 신도시들이 자라나면서 가정을 가진 중산층 이민자들도 학군이 좋고 생활이 편리한 신도시에 집을 사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교회가 옮겨갔다. 다운타운 지역에는 유학생들만이 남았지만 외곽의 신도시(서버브) 지역에 들어간 교회들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곧 떠나갈 사람들이고 보살펴 주어도 교회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자신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논리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들 교회는 자신들의 이세들의 신앙을 돌보기 위해 영어 예배를 만들었고 그 사역의 성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 즉 교회는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지역의 교회들은 사명을 잃어 버렸다. 관심이 내부를 향하면서 교회에서는 누가 더 많은 입김을 가질 것인가를 가지고 다투기 시작했다. 필자가 뉴저지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한 알의 밀알’에 대해서 묵상하게 하셨다. 썩어지는 밀알을 통해서 수많은 열매가 맺히듯이 교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연합이라는 것은 간단히 “나 잡아먹고 당신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나를 밟고 당신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죽고 희생할 이민자 교회를 찾고 계신다는 메시지였다. 당신의 한 교회가 죽어서 다른 많은 주변의 교회가 살아나고 귀한 연합의 열매가 맺히기 소망한다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교역자 분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 메시지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십자가 복음을 경험하지도 누려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민의 목적과는 다른 목적의 이민이다. 그 예가 될만한 사례 두 가지를 잠시 나누고자 하는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지만 보안상의 문제가 있어서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현재 중동 지역의 이슬람의 견고한 진으로 둘려진 도시 가운데 필리핀 기독인 여성들이 들어가 있다. 그들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하여 가정부 또는 보모라는 신분으로 그곳에 들어간다. 그리고 귀족과 명망가 자제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양육하며 복음을 심어주고 있다. 때로는 성폭력의 위험 가운데 노출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그녀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체험하는 일이 일어난다. 중국의 가정 교회 지도자들 중에 많은 수가 중동 지역의 한 국가의 부유층 종교 지도자 가정으로 가정부나 하인 신분으로 들어갔다. 말을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삼년간 급료 없이 그 집에서 봉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계약 기간 동안 정성껏 주인을 섬겼다. 그러나 보통 일년이 지나면서 주종 관계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에 있는 아픈 지체를 위해 이 중국인 가정부들이 기도하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의 삶과 기도에 담긴 능력을 보면서 그 가정에 있는 구성원들이 그들이 믿는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하고 제자화가 진행되었다. 그와 관련된 놀라운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으며 그 지역으로 성경이 지속적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갈 때 주인들이 감사의 뜻으로 자신들이 가진 희귀 보석들을 선물로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그것들을 타선진국 선교 단체나 교회에 보내주었다. 우리가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가정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이민자 교회가 선교 헌금을 많이 하고 선교지를 위해 많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내심을 받은 땅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이민자로 그리고 선교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학 교육을 받고 선교 훈련 과정을 마쳐서 파송 받아야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보내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내 몫의 십자가를 들고 따르는 사람이 선교사이다. 그 선교의 삶을 이룬 자는 선교지에서 온 선교사가 그 삶을 나눌 때 동일한 감동으로 반응하며 동일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미국 텍사스의 작은 도시에 머물면서 이민 교회로부터 집회 요청을 받아 두 달 동안 거의 매주 집회로 섬기게 되었다. 어차피 이번에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게 되면 다시 미국 땅을 밟으며 이민 교회들을 섬길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무리해서 일정을 잡고 말씀 집회를 가졌다. 집회를 다니면서 각각의 지역에 세워진 한인 교회들마다 특징이 있고 사명이 있고 또 도전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민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그 분의 계획을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집회 가운데 미주 지역의 한인 이민 교회가 가진 근원적인 문제점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민 온 동기와 목적이 복음 안에서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신의 이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결국 자신들이 이민 온 땅에서 사명이 아닌 세속의 풍요와 번영을 추구했던 롯으로서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남아있는 이유는 교회 안에 자신을 위한 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구에서였다. 이민 생활에서의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자신의 자존감과 중요도를 확인시켜주는 교제의 장으로서 또 어려울 때 의지가 되는 장소로서 교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교회가 이민자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것이 근본 목적인 것처럼 오해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시카고 지역을 포함한 한인이 밀집된 대도시와 그 인근 교외지의 교회들은 지속적인 분열을 경험해 왔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적어도 세 교회 이상 교회를 옮겨본 경험이 있다. 교회에 문제가 터질 때마다 분란을 피해서 수평이동을 해 왔다. 결국 교회들간의 관계들도 깨어져서 연합 행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다수의 교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타지 생활의 위로와 의지처를 제공해 줄 “좋은” 교회들을 찾으며 이주하고 있다. 그리고 연배와 수준과 관심이 맞는 교제권을 그 안에서 찾기 원한다. 많은 이들은 끝내 그런 교회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을 다 보내버리곤 한다. 물론 이와 같이 교인들 다수가 필요만을 위해서 교회를 찾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민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한 번은 유럽의 어느 교회에서 신년에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내려놓음과 십자가”라는 주제의 말씀을 전하기에 묵상하면서 기도하다가 문득 강대상 위에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거기에는 “신년 금식 축복 대성회”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문득 당혹감이 찾아왔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주최측에서 기대하는 메시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물었다.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 제가 전해야 할 말씀이 무엇인가요?” 내 마음 가운데 질문이 찾아왔다. “너 무엇이 진짜 축복인지 아니? 그것은 나를 소유하는 것이란다.”한국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보다는 하나님 손에 들려있는 축복, 또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주어지는 대가에 관심이 더 많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전통적인 신관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천지신명에게 또는 삼신 할머니나 산신령에게 빌거나 무당 굿을 해 왔던 이유를 안다. 그들은 이렇게 비는 행위를 통해 영적인 존재에게 잘 보이고 그래서 해를 면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했다. 천지신명이나 삼신 할머니 등을 사랑해서 지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기를 원했다. 목적이 이루어지면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 분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시카고 인근의 여러 교회들이 분열을 경험하고 아파하는 상황이다. 거의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들이 갈라졌고 교인들이 흩어졌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소행으로만 보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이면에 그 공격을 허용한 큰 약점이 교회에 있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교회가 그들의 필요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는 점이다. 시카고 지역이 팽창하면서 인근에 신도시들이 자라나면서 가정을 가진 중산층 이민자들도 학군이 좋고 생활이 편리한 신도시에 집을 사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교회가 옮겨갔다. 다운타운 지역에는 유학생들만이 남았지만 외곽의 신도시(서버브) 지역에 들어간 교회들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곧 떠나갈 사람들이고 보살펴 주어도 교회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자신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논리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들 교회는 자신들의 이세들의 신앙을 돌보기 위해 영어 예배를 만들었고 그 사역의 성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 즉 교회는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지역의 교회들은 사명을 잃어 버렸다. 관심이 내부를 향하면서 교회에서는 누가 더 많은 입김을 가질 것인가를 가지고 다투기 시작했다. 필자가 뉴저지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한 알의 밀알’에 대해서 묵상하게 하셨다. 썩어지는 밀알을 통해서 수많은 열매가 맺히듯이 교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연합이라는 것은 간단히 “나 잡아먹고 당신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나를 밟고 당신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죽고 희생할 이민자 교회를 찾고 계신다는 메시지였다. 당신의 한 교회가 죽어서 다른 많은 주변의 교회가 살아나고 귀한 연합의 열매가 맺히기 소망한다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교역자 분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 메시지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십자가 복음을 경험하지도 누려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민의 목적과는 다른 목적의 이민이다. 그 예가 될만한 사례 두 가지를 잠시 나누고자 하는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지만 보안상의 문제가 있어서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현재 중동 지역의 이슬람의 견고한 진으로 둘려진 도시 가운데 필리핀 기독인 여성들이 들어가 있다. 그들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하여 가정부 또는 보모라는 신분으로 그곳에 들어간다. 그리고 귀족과 명망가 자제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양육하며 복음을 심어주고 있다. 때로는 성폭력의 위험 가운데 노출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그녀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체험하는 일이 일어난다. 중국의 가정 교회 지도자들 중에 많은 수가 중동 지역의 한 국가의 부유층 종교 지도자 가정으로 가정부나 하인 신분으로 들어갔다. 말을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삼년간 급료 없이 그 집에서 봉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계약 기간 동안 정성껏 주인을 섬겼다. 그러나 보통 일년이 지나면서 주종 관계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에 있는 아픈 지체를 위해 이 중국인 가정부들이 기도하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의 삶과 기도에 담긴 능력을 보면서 그 가정에 있는 구성원들이 그들이 믿는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하고 제자화가 진행되었다. 그와 관련된 놀라운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으며 그 지역으로 성경이 지속적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갈 때 주인들이 감사의 뜻으로 자신들이 가진 희귀 보석들을 선물로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그것들을 타선진국 선교 단체나 교회에 보내주었다. 우리가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가정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이민자 교회가 선교 헌금을 많이 하고 선교지를 위해 많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내심을 받은 땅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이민자로 그리고 선교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학 교육을 받고 선교 훈련 과정을 마쳐서 파송 받아야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보내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내 몫의 십자가를 들고 따르는 사람이 선교사이다. 그 선교의 삶을 이룬 자는 선교지에서 온 선교사가 그 삶을 나눌 때 동일한 감동으로 반응하며 동일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Wednesday, June 30, 2010
은퇴를 앞둔 이동원 목사 인터뷰
미주뉴조 인터뷰--
은퇴를 앞둔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는 '홀가분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 목사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로서가 아닌, '자연인 이동원'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마음이 가볍다며, 담임목회의 짐을 벗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게 되어 즐겁다고 말했다. 이동원 목사는 인터뷰를 통해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 은퇴 후의 계획, 후임 목회자 선정 배경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최근 이민 교회 목회자의 한국행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후임 목회자 선정 과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밝혔다. 이 목사는 청빙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작업까지만 개입했고, 이후 청빙위원회가 기준에 따라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협의해, 후임 담임목사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애초부터 특정인을 지목하고 추진한 것이 아니라, 조사와 협의 과정을 거친 자연스런 결과라고 설명했다.
목회 현장에서 물러나는 이 목사는 후배 사역자들을 위한 목회적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 목사는 “자기 치유가 덜 된 사람들은 너무 빨리 목회 현장에 들어오지 말았으면 한다"며 목회자의 치열한 자기 성찰을 주문했다. 이 목사는 또 한인 교계에 만연한 분쟁에 대해 “아직 한국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사가 강자”라며 분쟁 국면에서 목회자의 자기 희생을 강조했다.
한국 교회 내에 건축 흐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필요가 없는 교회까지도 건축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며 건축이 일종의 트렌드가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최근 교계가 한국 사회의 보수화를 이끌며 각종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는 "교회가 연구 없이 특정 이슈를 성급히 지지하면 위험하다"며 우려 섞인 지적도 했다.
은퇴를 앞둔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는 '홀가분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 목사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로서가 아닌, '자연인 이동원'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마음이 가볍다며, 담임목회의 짐을 벗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게 되어 즐겁다고 말했다. 이동원 목사는 인터뷰를 통해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 은퇴 후의 계획, 후임 목회자 선정 배경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최근 이민 교회 목회자의 한국행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후임 목회자 선정 과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밝혔다. 이 목사는 청빙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작업까지만 개입했고, 이후 청빙위원회가 기준에 따라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협의해, 후임 담임목사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애초부터 특정인을 지목하고 추진한 것이 아니라, 조사와 협의 과정을 거친 자연스런 결과라고 설명했다.
목회 현장에서 물러나는 이 목사는 후배 사역자들을 위한 목회적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 목사는 “자기 치유가 덜 된 사람들은 너무 빨리 목회 현장에 들어오지 말았으면 한다"며 목회자의 치열한 자기 성찰을 주문했다. 이 목사는 또 한인 교계에 만연한 분쟁에 대해 “아직 한국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사가 강자”라며 분쟁 국면에서 목회자의 자기 희생을 강조했다.
한국 교회 내에 건축 흐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필요가 없는 교회까지도 건축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며 건축이 일종의 트렌드가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최근 교계가 한국 사회의 보수화를 이끌며 각종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는 "교회가 연구 없이 특정 이슈를 성급히 지지하면 위험하다"며 우려 섞인 지적도 했다.
Thursday, June 3, 2010
악은 현실이다
“악은 현실이다” (Evil Is a Reality) 김영봉--마태복음 26:36-46
1.
내일은 Memorial Day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현충일’입니다. 크고 높고 고귀한 뜻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와싱톤 DC에 있는 한국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기억하시지요? Freedom Is Not Free. “자유에는 값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운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젊은 날의 한 때를 그렇게 희생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기원합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직면하게 해 줍니다. 전쟁은 항상 자유나 인권 같은 고상한 목적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난 전쟁 중 절대 다수는 인간의 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터는 인간의 악마성이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현실 앞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게로 하여 거침 없이표현되는 개인의 악마성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인생사를 주관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가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에 처하여 더 큰 혼란스러움을 경험합니다. 선하고 사랑 많고 능력있는 신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만한 단서를 찾기 어렵습니다.
소설 <오두막>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담한 악의 현실을 소재로 듭니다.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 당하고 성폭행 당한 다음 살해 당한 사건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악의 현실입니다. 그 악의 현실 앞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맥이 견지하고 있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신이라면, 그같은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은 셋 중 하나입니다. 1)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2)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악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3)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뜻이 없거나.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맥의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실 것입니까? 얼마 전,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피해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2009년 가을, 한국에서 일어난 ‘나영이 사건’은 그 참혹성으로 볼 때 ‘미시 사건’보다 더 심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한 인간에게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가 능욕을 당할 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같은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기에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폐기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2.
영국의 신학자 톰 라잇(Tom Wright)은 문명 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잘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 사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낭만적인 ‘진화론적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고, 문명의 이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을 대하는 데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공격할 때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예외인 줄로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숙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3쪽.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악에 대해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톰 라잇은 현대인들이 악의 공격에 대해 보통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악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모든 문제를 정부 책임이라고, 사회 책임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 책임이라고 비난합니다. 둘째, 그 반대 극단으로서,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이 두 가지 증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유명인들의 자살 뉴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현대판 전염병 우울증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이같은 미숙한 반응으로 인해 악의 현실은 더 심해지고,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 효력이 없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깊이 상처 받고 앓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현실에 대해 믿는 사람들은 자주 너무도 기계적으로, 너무도 교리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티에 일어난 지진이 부두교(The Voodoo)를 믿은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단정합니다. 거대한 쓰나미로 동남아에 재난이 닥쳤을 때도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맥이 당한 것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성급하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뭔가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말인지, 그리고 악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리고 그 단정이 기독교를 얼마나 해괴망측한 종교로 보이게 만드는지요!
3.
소설 <오두막>에 대해 신학적인 해설서를 쓴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그의 책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Meeting God in the Shack>에서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철학 교수는, 아무리 참혹한 비극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수도 자신의 아들을 잃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고 또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무덤 옆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34쪽, “I will never tell another parent whose child has died, ‘It was God’s will.’”p. 20)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견디기 힘든 악의 현실을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혹은 이혼으로 인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해, 혹은 심각한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힘겨울 때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분들이 던지는 말들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아픈데, 앞에 앉혀 놓고 훈계를 하는 사람이 없나,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나, 심지어는 심문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리다 모랜(Rita Moran)이라는 분이 서른 네 살짜리 딸을 잃고 쓴 시, “제발”(Please)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받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The Compassionate Friends의 웹 싸이트에 올라 있는 것을 제가 우리 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발, 내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발,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이곳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 곁에 없는 것이 문제이니까요.
제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으니 됐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 그 애가 고통 받아야 했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발,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버티고 계속 살아가라고 말하지 마세요.이렇게 버티고 있잖아요?
제발, 좀 나아졌느냐고 묻지 마세요.
상실의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발,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분이 일부러 이렇게 하셨다는 뜻인가요?
제발, 적어도 그와 함께 34년을 함께 살지 않았느냐고 위로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제발, 신은 인간에게 견딜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내력의 정도를 누가 결정하나요?
제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제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진실로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발, 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내가 울어야 한다면 울도록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악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묘사한 시입니다. 생각해 보니, 리타 모랜이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말들 가운데 많은 말들을 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습니다. 저의 생각 없는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를 생각하니, 식은 땀이 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앞으로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겪어 본 분들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악의 현실을 경험했던 분들이 눈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4.
악의 현실에 대해 건강하고 성숙하게 반응하려면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각각의 악의 문제에 대해 단순하고 명쾌한 정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며,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악이 왜 생겼으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신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왜 때로 악에 희생 당하며, 악을 일삼는 자들이 왜 때로 번영하는지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종교적 천재들이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겸손해지고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번민하되, 섣불리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톰 라잇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악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는 한 고상한 기독교 전통은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악에 대하여 어떤 분석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를 축소해 버린 것입니다. (43쪽)
오늘 읽은 본문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악의 현실 앞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악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37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로 표현하기도 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3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현실을 완전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지, 그분은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39절, 42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껴안아야 하는 악의 현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제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거슬립니까?
소설 <오두막>에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내려 앉아 걷고 있다면, 어떤 필요를 위해 자신을 제한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당신 자신을 제한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도 스스로 신성을 제한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그분이 악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심하게 동요되었던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과 똑 같이 악의 현실을 대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악의 현실을 끌어 안고 그 악을 선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5.
둘째, 악의 현실은 대면하여 통과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로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않은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그 사람이 당한 악의 이유에 대해 정답이 있어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설명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고 나니, 이제 슬픔이 사라지는군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 맞은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머리가 띵하고 멍한데 무슨 말이 들어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처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의 문제와 관계하여, 하나님조차도 고난의 터널을 우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악을 한 순간에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행했던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악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진실로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의 현실 앞에서 당연히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번 그같은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연극도 아니었고 쇼도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분도 악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셨습니다. 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처럼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시면서 주님은 믿음을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46절). 예수님은 그렇게, 악의 현실을 마주하기로, 그리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지나가기로 결정하셨고, 그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마음이 동요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도 그러셨다면, 우리가 어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고난을 직면할 용기와 담력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심장을 통과하고 났을 때, 비로소 고난은 변모하게 됩니다. 불교가 말하듯, 고난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엄연한 실상이요 현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면하고 겪어 냈을 때, 고난은 축복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6.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은 처음에는 왜 내 딸 미시를 죽게 했느냐고 하나님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는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분에게는 그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기만 했으면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 때문에 맥은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미시에게 벌어졌던 사고를 내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까? 물론 있었지…… 첫째, 내가 애초에 창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았겠지. 이런 질문들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둘째, 나는 미시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창조하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나는 둘째 방법도 택하지 않았지. 그 이유를 너는 지금 이해할 수 없어. 지금으로서 내가 네게 대답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지. 내가 미시를 죽게 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선한 것을 만들어 낼 거야. (365쪽, translation is mine, p. 224)
하나님께서 맥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의 현실을 마주한 사람에게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으로써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나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많은 질문들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정금같이 연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계십니까? 악의 현실을 마주하여 흔들리고 계십니까? 악의 몽둥이에 얻어맞은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상실의 아픔과 고통 중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라고 물으며 몸부림 치고 계십니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요, 관계요, 우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통해 사랑과 관계와 우정을 발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를 통해 그같은 도움을 찾으실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일이 없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가지기 쉬운 낭만적인 낙관주의나 헛된 기대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악의 현실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의 예상이 맞는다면, 악의 현실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성숙하게 반응하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형제 자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우리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임을 알고, 고난 당한 사람들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어떤 악의 현실이라도 마주할 수 있는 믿음과 시각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난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건, 주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으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모든 것을 사용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그것을 여러분도 아십니까? 그것을 아시고, 믿으시고, 매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난으로써 고난을 이기고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주님,악의 현실 속에 있는 저희를 도우소서.때로 저희는 이리 떼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악의 세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저희는 정신을 잃고 휘청거립니다.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저희도 주님처럼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고난이 축복이 되는 기적을저희도 경험하게 하소서.아멘
1.
내일은 Memorial Day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현충일’입니다. 크고 높고 고귀한 뜻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와싱톤 DC에 있는 한국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기억하시지요? Freedom Is Not Free. “자유에는 값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운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젊은 날의 한 때를 그렇게 희생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기원합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직면하게 해 줍니다. 전쟁은 항상 자유나 인권 같은 고상한 목적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난 전쟁 중 절대 다수는 인간의 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터는 인간의 악마성이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현실 앞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게로 하여 거침 없이표현되는 개인의 악마성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인생사를 주관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가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에 처하여 더 큰 혼란스러움을 경험합니다. 선하고 사랑 많고 능력있는 신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만한 단서를 찾기 어렵습니다.
소설 <오두막>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담한 악의 현실을 소재로 듭니다.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 당하고 성폭행 당한 다음 살해 당한 사건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악의 현실입니다. 그 악의 현실 앞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맥이 견지하고 있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신이라면, 그같은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은 셋 중 하나입니다. 1)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2)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악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3)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뜻이 없거나.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맥의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실 것입니까? 얼마 전,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피해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2009년 가을, 한국에서 일어난 ‘나영이 사건’은 그 참혹성으로 볼 때 ‘미시 사건’보다 더 심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한 인간에게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가 능욕을 당할 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같은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기에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폐기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2.
영국의 신학자 톰 라잇(Tom Wright)은 문명 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잘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 사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낭만적인 ‘진화론적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고, 문명의 이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을 대하는 데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공격할 때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예외인 줄로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숙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3쪽.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악에 대해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톰 라잇은 현대인들이 악의 공격에 대해 보통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악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모든 문제를 정부 책임이라고, 사회 책임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 책임이라고 비난합니다. 둘째, 그 반대 극단으로서,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이 두 가지 증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유명인들의 자살 뉴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현대판 전염병 우울증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이같은 미숙한 반응으로 인해 악의 현실은 더 심해지고,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 효력이 없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깊이 상처 받고 앓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현실에 대해 믿는 사람들은 자주 너무도 기계적으로, 너무도 교리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티에 일어난 지진이 부두교(The Voodoo)를 믿은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단정합니다. 거대한 쓰나미로 동남아에 재난이 닥쳤을 때도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맥이 당한 것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성급하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뭔가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말인지, 그리고 악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리고 그 단정이 기독교를 얼마나 해괴망측한 종교로 보이게 만드는지요!
3.
소설 <오두막>에 대해 신학적인 해설서를 쓴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그의 책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Meeting God in the Shack>에서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철학 교수는, 아무리 참혹한 비극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수도 자신의 아들을 잃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고 또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무덤 옆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34쪽, “I will never tell another parent whose child has died, ‘It was God’s will.’”p. 20)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견디기 힘든 악의 현실을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혹은 이혼으로 인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해, 혹은 심각한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힘겨울 때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분들이 던지는 말들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아픈데, 앞에 앉혀 놓고 훈계를 하는 사람이 없나,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나, 심지어는 심문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리다 모랜(Rita Moran)이라는 분이 서른 네 살짜리 딸을 잃고 쓴 시, “제발”(Please)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받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The Compassionate Friends의 웹 싸이트에 올라 있는 것을 제가 우리 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발, 내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발,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이곳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 곁에 없는 것이 문제이니까요.
제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으니 됐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 그 애가 고통 받아야 했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발,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버티고 계속 살아가라고 말하지 마세요.이렇게 버티고 있잖아요?
제발, 좀 나아졌느냐고 묻지 마세요.
상실의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발,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분이 일부러 이렇게 하셨다는 뜻인가요?
제발, 적어도 그와 함께 34년을 함께 살지 않았느냐고 위로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제발, 신은 인간에게 견딜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내력의 정도를 누가 결정하나요?
제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제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진실로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발, 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내가 울어야 한다면 울도록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악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묘사한 시입니다. 생각해 보니, 리타 모랜이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말들 가운데 많은 말들을 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습니다. 저의 생각 없는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를 생각하니, 식은 땀이 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앞으로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겪어 본 분들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악의 현실을 경험했던 분들이 눈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4.
악의 현실에 대해 건강하고 성숙하게 반응하려면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각각의 악의 문제에 대해 단순하고 명쾌한 정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며,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악이 왜 생겼으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신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왜 때로 악에 희생 당하며, 악을 일삼는 자들이 왜 때로 번영하는지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종교적 천재들이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겸손해지고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번민하되, 섣불리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톰 라잇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악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는 한 고상한 기독교 전통은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악에 대하여 어떤 분석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를 축소해 버린 것입니다. (43쪽)
오늘 읽은 본문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악의 현실 앞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악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37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로 표현하기도 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3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현실을 완전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지, 그분은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39절, 42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껴안아야 하는 악의 현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제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거슬립니까?
소설 <오두막>에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내려 앉아 걷고 있다면, 어떤 필요를 위해 자신을 제한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당신 자신을 제한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도 스스로 신성을 제한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그분이 악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심하게 동요되었던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과 똑 같이 악의 현실을 대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악의 현실을 끌어 안고 그 악을 선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5.
둘째, 악의 현실은 대면하여 통과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로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않은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그 사람이 당한 악의 이유에 대해 정답이 있어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설명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고 나니, 이제 슬픔이 사라지는군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 맞은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머리가 띵하고 멍한데 무슨 말이 들어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처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의 문제와 관계하여, 하나님조차도 고난의 터널을 우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악을 한 순간에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행했던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악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진실로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의 현실 앞에서 당연히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번 그같은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연극도 아니었고 쇼도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분도 악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셨습니다. 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처럼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시면서 주님은 믿음을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46절). 예수님은 그렇게, 악의 현실을 마주하기로, 그리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지나가기로 결정하셨고, 그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마음이 동요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도 그러셨다면, 우리가 어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고난을 직면할 용기와 담력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심장을 통과하고 났을 때, 비로소 고난은 변모하게 됩니다. 불교가 말하듯, 고난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엄연한 실상이요 현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면하고 겪어 냈을 때, 고난은 축복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6.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은 처음에는 왜 내 딸 미시를 죽게 했느냐고 하나님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는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분에게는 그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기만 했으면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 때문에 맥은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미시에게 벌어졌던 사고를 내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까? 물론 있었지…… 첫째, 내가 애초에 창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았겠지. 이런 질문들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둘째, 나는 미시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창조하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나는 둘째 방법도 택하지 않았지. 그 이유를 너는 지금 이해할 수 없어. 지금으로서 내가 네게 대답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지. 내가 미시를 죽게 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선한 것을 만들어 낼 거야. (365쪽, translation is mine, p. 224)
하나님께서 맥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의 현실을 마주한 사람에게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으로써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나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많은 질문들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정금같이 연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계십니까? 악의 현실을 마주하여 흔들리고 계십니까? 악의 몽둥이에 얻어맞은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상실의 아픔과 고통 중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라고 물으며 몸부림 치고 계십니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요, 관계요, 우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통해 사랑과 관계와 우정을 발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를 통해 그같은 도움을 찾으실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일이 없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가지기 쉬운 낭만적인 낙관주의나 헛된 기대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악의 현실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의 예상이 맞는다면, 악의 현실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성숙하게 반응하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형제 자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우리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임을 알고, 고난 당한 사람들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어떤 악의 현실이라도 마주할 수 있는 믿음과 시각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난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건, 주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으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모든 것을 사용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그것을 여러분도 아십니까? 그것을 아시고, 믿으시고, 매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난으로써 고난을 이기고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주님,악의 현실 속에 있는 저희를 도우소서.때로 저희는 이리 떼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악의 세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저희는 정신을 잃고 휘청거립니다.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저희도 주님처럼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고난이 축복이 되는 기적을저희도 경험하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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