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29, 2010

최춘선 할아버지의 맨발은 무엇인가?

“최춘선 할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길을 봤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달랐다. 그분의 관점과 전략을 보게 되었다. 영상을 통해서 내가 혼자 하면 평생 해도 하지 못할 일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도구였을 뿐이고 최춘선이라는 한사람의 충성에 하나님이 축사하신 것이라 본다. 맨발로 표현된 충성이라는 덕목을 통해서 조폭들만도 못한 우리 크리스천들의 피상성과 유치함을 벌거벗긴 것이다. 내가 그랬다. 아닌 듯 해도 다들 예수를 빙자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간 실존적인 허기를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나였지만, 이제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분이 맨발이 된 계기를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관점과 전략과 역사라는 것은 과연 다르구나... 내 영혼이 계속 놀라면서 그것이 뭘까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지금 굉장히 많은 것을 보게 되었고, 이제는 작업을 하고 책을 쓰면서 나름대로는 더 조심스럽다. 이따금 기도 중에 아버지의 통찰력을 보여주실 때마다 그 실존에 비친 나를 봤을 때 부끄러웠다. 우리가 영광스런 복음에 대해서도 아직 잘 알지 못하면서 부흥을 외치는 현실이 너무 한심스럽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최춘선 할아버지를 통해 분명히 목도하게 되었다. 엄청난 자유를 경험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천명이 내 앞에 있어도 두렵지가 않다. 주변의 다양한 평가와 상관없이 자기가 갖고 있는 소명에 책임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내 안의 동기가 가장 중요하고 사명은 각자 각자이다.”

- 김우현 감독과의 인터뷰 중에서

Friday, May 28, 2010

용서가 세상을 바꾼다

“용서가 세상을 바꾼다”(Forgiveness Transforms the Universe) --에베소서 4:25-32 <김영봉>

1.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아픕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뿐입니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대안입니다. 또 하나의 대안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 치유를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신이 독방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어려움과 힘듦을 견디는 것만이 나 자신과 이 세상에 희망을 끌어 올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품고 있던 ‘거대한 슬픔’은 사랑하는 딸 미시를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지만, 더 깊이 헤쳐 보면 그의 마음에 누적된 분노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린 딸을 해친 살인마에 대한 분노, 딸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그의 마음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 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맥에게는 세 종류의 용서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셋째, 그는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와 자신의 딸을 해친 살인마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이 셋 중에 그 어느 것도 용서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용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맥은 분노와 앙심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는 것이 잃어버린 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생각도, 용서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꿈 속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은 그가 전혀 원치 않았던 용서를 갈망하게 만들었고,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용서를 실천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분노를 다시 돌아보고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맥이 경험했던 세 종류의 용서를 꿈꾸고 기도하며 선택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혹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힘겨워 할 때가 옵니다. 그 각각의 경우에서 어떻게 용서를 꿈꾸고 실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의 말대로, “용서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There is no hope without forgiveness). 그래서 오늘은 세 종류의 용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2.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씀에 놀라실 분들이 계실 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한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용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을 당신의 절대 진리에 따라 절대 사랑으로 행하시기 때문에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할 이유는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분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분노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혹시 그런 감정이 든다면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해야지요. 어떻게 감히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교리적인 신앙은 비정한 악의 현실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이나 분노가 스믈스믈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맥과 같은 입장에 처하면, 그같은 감정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을 잠시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분노를 퍼붓는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에 얼마나 화가 났던지,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렘 20:7)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시편을, 그리고 욥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수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대들며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노를 그냥 참고 지켜 보십니다. 때가 이르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지만, 그 전까지는 잠자코 지켜 보십니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들이 그러시듯 하나님은 분노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분노가 얼토당토 않은데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분노가 잦아들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르면 그 모습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아버지는 분노한 큰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 분노한 사람에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렇게 하여 너의 분노가 풀린다면, 마음껏 화를 내거라. 나에게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은 안전하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네 분노를 쏟아 놓아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섭섭하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믿음이 없었나?”라면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기도로써 혹은 눈물로써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소설 <오두막>의 맥처럼, 그리고 욥기의 주인공처럼, 하나님께 대해 정직한 분노를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실은,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서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내려 놓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분노를 외면하거나 억압하거나 부인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죽어 버립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껍데기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형식일 뿐입니다. 맥이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 안에 그의 마음은 없었습니다. 분노가 하나님과 맥 사이를 가로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 적절하게 표출되지 못한 분노,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3.
둘째,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때때로,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데, 혼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소설 <오두막>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짠한 느낌을 준 사람이 맥의 넷째 딸 케이트입니다. 미시가 실종된 후, 케이트는 스스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에 숨어 버립니다. 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맥과 그 아내 낸은 속을 태웁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어떤 노력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맥이, 아내와 함께 친척 집에 간 케이트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묻습니다. “케이트는 어때?” 그러자 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맥, 나도 좀 알고 싶어.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 애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식구들이랑 같이 있을 때면 껍데기를 벗고 나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다시 쏙 들어가고 말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애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게 해 달라고 파파에게 계속 기도했지만……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 (30쪽)
꿈 속에서 경험한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대화 중에 하나님은 맥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케이트는 자기 때문에 동생 미시가 유괴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빠와 카누를 타고 놀다가 케이트가 아빠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맥은 손을 흔들어 응답했고, 케이트도 아빠에게 응답하려고 노를 치켜 들었습니다. 그 순간 카누가 뒤집혔습니다. 맥은 물에 빠진 두 아이를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고, 그 사이에 미시가 납치되었습니다. 케이트로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현실로 돌아온 맥은 케이트를 따로 불러 미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케이트에게 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넵니다. “케이트,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긴장을 합니다. 맥이 다시 말합니다. “딸아, 그 일에 대해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는단다.” 그러자 케이트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언제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걸요. 아빠와 엄마가 날 원망한다고 생각했고요.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맥은 딸을 위로하며 이렇게 응답합니다. “케이트, 그 일을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거고 우리는 그 사건을 버텨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거야. 우리 모두 함께. 알겠지?” (이상 401-2쪽, p. 246)
케이트처럼, 일어난 어떤 사건을 두고 스스로를 징계하고 그 징벌을 매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은 맥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미시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껴졌고, 그래서 스스로를 징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났고, 케이트의 마음에서도 그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 폴 영은 독자들에게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징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분이 아침에 다른 교우와 테니스를 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함께 테니스를 친 교우는 심한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전 날 밤, 자신이 전화를 하여 테니스를 치자고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그 교우님은 “내가 만일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 사고를 피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내 친구를 죽게 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분은 심한 죄책감에 짓눌려 장례식을 치뤘고, 장례식 후에도 그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오랜 친구와 우연한 자리에서 동석하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세상을 떠난 그 친구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대화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고백하는 데까지 갑니다. 그 고백을 듣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입니까? 저는 의사인데, 내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다 내 잘못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순간, 그 교우님은 세상 떠난 그 친구가 그 의사 친구를 보내어 자신을 위로해 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난 그 친구는 늘 그렇게 친구들을 위로하고 품어 안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책감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로부터 서서히 스스로를 용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와 같은 마음의 짐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 계신지요? 나만 아는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나를 징벌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한 범죄가 아니라면, 자신을 용서하고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케이트처럼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안에 자신을 감금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4.
셋째,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상처는 아픔을 느끼게 하고, 그 아픔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분노가 쌓이면 마치 몸에 난 종기처럼 응어리가 됩니다. 혹은 매우 깊은 상처를 받으면 풀기 어려운 분노의 응어리가 생깁니다. 그 응어리가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 영적인 체증이 생깁니다. 이것이 마음과 영혼을 짓누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여러 가지의 질환을 만들어 냅니다.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고, 아무 이유 없이 열이 오르며, 목이나 명치에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CT 촬영을 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분노의 감정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과 상황을 잘 다스려야 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31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뭉쳐진 응어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 사람을 진실로 용서해야만 풀어집니다.

그런데 때로 용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을 때, 혹은 나에게 준 상처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일 때, 분노는 더욱 커지고 용서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사과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상처 때문에 아픈데, 너는 사과하여 짐을 벗으려고 하느냐?”는 생각에 속이 뒤틀립니다. 때로는,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그런 상처를 입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사랑스러운 딸을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는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맥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토로합니다.

파파, 나의 미시를 죽인 그 더러운 놈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놈이 여기에 있다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어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당한 만큼 그놈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어요. 정의를 이루지 못할 바엔 복수라도 하고 싶어요. (368쪽)

때로, 용서는 어렵습니다. 불가능해 보입니다. 용서하기가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억울하게 느껴지고,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만큼, 아니 그 이상 당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친다 해도, 내 마음에 받은 상처는 ‘내가’ 갚아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혼자 만큼은 냉엄한 심판대에서 내려 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상처 받았을 때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나의 앙심과 증오와 원한을 통해 내가 벌하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나의 원한과 증오심으로써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아십니까? 용서하는 것이 때로 죽기보다 힘들지만,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보더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서함으로써 자유함을 얻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소설 <오두막>에서 파파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란 너를 산 채로 먹어 없애는 힘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370쪽, p. 227)
5.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은 분노하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부여하신 건강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자주 분노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속 좁은 투기쟁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질투’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감정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은 냉혹한 관리자가 아니라, 감동하고 기뻐하며 실망하고 후회하며 분노하는, 인격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분노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정당하고, 바르게 표출되지만, 인간의 분노는 자주 근거 없이 폭발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분노를 잘 못 표출하면 ‘죄’가 됩니다. 분노를 마음 안에 쌓아놓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쌓인 분노가 있다면, 결국 용서에 이르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는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 4:26-2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익은 용서는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서두를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볶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 없는 목석 인간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자신을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 마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서 그 분노를 품어 익히시기 바랍니다.

분노를 품에 안고 그 해소를 열망하면 머지 않아 때가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용서를 선택하고 결행하면 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했듯이, 용서는 사건(event)이기보다는 과정(process)입니다. 용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완성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용서를 열망하고 있으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분노가 익습니다. 분노가 잘 익었을 때 용서를 선택하면, 그 응어리는 녹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금새 녹아 버리고,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6.
성경은 용서를 자주 명령형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32절). 용서하는 것이 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명령이 잔인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는 인간을 과대평가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죄성과 나약성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려워 하는 우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우리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를 행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명령하셨습니다.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용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후반부에서 성령의 역할을 맡은 사라유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용서할 때마다 이 지구는 변해요. 당신이 팔을 뻗어서 누군가의 마음이나 삶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 세계는 변해요. 눈에 드러나건 아니건 모든 친절과 봉사를 통해 내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되죠.”(386쪽, p. 237)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이웃을 변화시키며,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30절)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쓴 물을 뿜어내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 하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징벌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분노를 쏟아 놓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씨름하며 아파하면서 치유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용서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환히 웃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비로소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니 온 우주가 변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 기적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용서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초청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대답해 보십시다.

“예, 제가 오늘 용서를 선택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먼저, 용서할 그 사람을 향해 마음으로 선언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자녀의 선언에는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374쪽, p. 229) 그러니 용서를 선택하고 선언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마음 안에 용서가 영글게 하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만나십시오. 그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선 여러분의 마음에서 매듭을 푸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신이 상처를 준 사실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 이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품어 익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열망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어느 날, 소나기같은 은혜가, 혹은 이슬비같은 은혜가 내릴 것입니다.
혹시, 오래도록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징벌해 온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시간, “네가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러분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께 섭섭함이나 분노를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러니 그 마음을 내게 쏟아 놓아라”라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분노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마침내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잠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용서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저희를 용서하신 주님,저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상처를 당하여정직하게 분노하게 하시며,지혜롭게 분노를 다스리게 하시고,때를 따라 용서를 선택하게 하소서.용서로써 나를 바꾸고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꾸며세상을 바꾸고주님을 웃게하도록,주님, 저희를 도우소서.아멘

지금은 조금 아파도

지금은 조금 아파도-- 범서야, 삶은 마치 조각 퍼즐 같아.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실망과 슬픔의 조각이 네 삶의 그림 어디에 속하는지는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단다. 지금은 조금 아파도, 남보다 조금 뒤떨어지는 것 같아도, 지금 네가 느끼는 배고픔, 어리석음이야말로 결국 네 삶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의미있게 만들 힘이 된다는 것, 네게 꼭 말해주고 싶단다. 장영희의《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중에서

요즘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 아파요. 예전에 애써 묵혀 두었던 아픈 기억들이 잠을 깨웁니다.

Wednesday, May 12, 2010

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아나밥티스트 김창규 <복음과 상황 170호 2005.10.15 >

16세기 종교개혁을 살펴보면 기독교 내의 부패한 기존 세력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목표는 유사했으나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과 같은 온건한 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꾸고자 했던 급진적 세력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이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에 대한 교회사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였고, 1920년대가 넘어서야 비로소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입장에서 역사가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다시 말해 1960년대 이전까지 재세례파는 마치 대부분의 미국 서부 영화에서 백인은 문명화된 개척자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인디언은 잔인하고 무지한 이들로 묘사되었던 것처럼, 종교개혁 주류세력의 관점에서 소수파인 그들은 부당하게 평가되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에 출현한 재세례파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며, 그들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이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이단자, 광신자 또는 반란자인 아나뱁티스트?

재세례파(Anabaptists: Re-baptizers)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할 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종교개혁이 한창인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쮜리히에서 쯔빙글리와 함께 개혁운동을 펼치던 그룹 중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온전한 교회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그들만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중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확신하여 스스로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신자의 세례’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로 신자의 세례는 스위스 쮜리히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모라비아, 그리고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러나 재세례파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추구하는 신앙적·교리적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재세례파 운동이 한 사람의 신학사상을 조직적으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동시대에 성경에 근거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소한 신자의 세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하지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지금까지 시행해오던 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심한 냉대를 받았다. 루터는 급진종교개혁자들을 가리켜 “광신자들”이라고 불렀고, 칼빈은 더 나아가 “미혹된 자들”, “두뇌가 산만한 자들”, “고집쟁이들”, “악당들”, “미친개들” 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불링거(Bullinger)는 심지어 “그들은 마귀적인 원수들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현대 역사가들도 재세례파에 대하여 그리 너그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영국의 사학자 엘튼(G. R. Elton)은 재세례파들이 주장하는 신학은 이성을 부인한 비합리적이고 심리적으로 불균형적인 망상에서 탄생한 격렬한 현상으로, 그들은 인간이 직접적 영감을 받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재세례파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기존교회의 전통으로 인정되던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이다. 당시 가톨릭에서의 유아세례란 성례전의 의미를 넘어서, 국가 교회 내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것이며 또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는 곧 교회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법을 위반하여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하는 세례론이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만, 유아세례가 하나님의 자녀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으로 인정하는 데는 유사한 부분이 있으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로 인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염려는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둘째 신자의 세례를 시행한 그룹의 신앙 패턴이 지역과 리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란 ‘종말론을 강조하며 폭력적인 사상을 지닌 그룹’이란 인식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경우 재세례파는 1534~1535년 북부 독일 뮌스터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과 연관해서 판단되었다. 재세례파 중에는 폭력적 성향을 지닌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믿고, 계시를 통해 새 예루살렘이 뮌스터라고 주장하며, 폭력적으로 이 시를 점거하고 신자의 세례를 거부하는 이들을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라이덴의 얀이라는 자는 자신을 스스로 ‘만백성의 의의 왕’으로 추대하여 그곳에서 신정통치를 시작한다. 이들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군이 공격이 시작되고 결국 유혈 대학살로 이들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위의 두 가지 관점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재세례파를 묘사한 것에 비추어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왔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반정부적 집단을 형성하였기에 그들은 국가에 대한 반란자들이고,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이단자들이란 것이다. 더욱이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 즉 종말론적 예언과 예수 재림의 계시, 구약의 관습을 그대로 좇아 행하는 중혼제도, 재세례를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것 등은 분명 이단자로 낙인 받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재세례파에 대한 이런 평가는 몇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 첫째 그들이 주장하는 신자의 세례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질서를 깨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의 의미를 좇아 행함으로써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권력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유아세례의 거부가 가톨릭의 핍박을 유발한 것은 당연했을지 몰라도, 교회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던 개혁자들에게도 걸림이 되었던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쯔빙글리와 같이 국가의 힘을 입어 개혁을 주도하는 이들에게 유아세례의 거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교회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을 말하며, 이는 더 이상 국가의 권력을 업고 개혁을 추진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유아세례의 주장은 성경적인 옳고 그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개혁을 위한 정치적 논리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뮌스터사건이 재세례파를 대표하거나 정의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단지 여러 분파의 재세례파들 중에 일부였고, 실제적으로 재세례파의 큰 줄기인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재산공동체인 후터파(Hutterite), 북부 독일과 화란의 메노나이트(Mennonite) 등의 그룹과는 극히 대조되는 신학과 삶을 보여준다. 뮌스터 사건을 재세례파의 전형적인 또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게 되면 하나의 잘못된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재세례파의 신학과 삶그러면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신학의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재세례파의 운동은 한 사람의 신학에 의해 시작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서로 다양한 신앙과 신학의 노선 중에서 이 운동의 동기와 그들간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재세례파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재세례파 신학의 이해는 먼저 그들의 성경관으로 시작해야 한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처럼 재세례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교리와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명령과 법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따라야 하는 규범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약보다 신약을 더 강조하였는데,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면, 신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성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성경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론 (Christocentrism)으로 연계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규범이며 행동지침이다. 재세례파들이 강조하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 내린 명령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실천했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세례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죄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의 삶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헌신하며 살겠다는 결단이다. 이것은 세례가 죄를 씻는 하나의 성례전임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 믿음이 선행되지 않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기에 재세례파에게 있어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유아세례의 실행은 예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따르려 했던 재세례파들의 모습은 그들의 교회론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했는데, 참된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자신이 죄인임으로 스스로 고백하여 모인 이들 즉 신자의 세례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교회는 국가로부터의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철저히 독립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전쟁과 종교박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의 폭력 앞에서도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를 지켜나갔다.신자의 세례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열심은 교회 내에서의 제자도와 이에 따른 공동체의 치리로 나타났다. 교회는 공동체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격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자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사랑 안에서 그러나 엄격함으로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가 ‘그리스도 믿음이’ (believers of Christ)를 배출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재세례파들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따름이’ (followers of Christ)를 선택한 것이다.

위의 내용은 재세례파에 관한 아주 개략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소수자를 바라보고, 선입견과 편견으로 그들을 정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외쳤던 신앙을 볼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을 쉽게 이단자로 또는 반란자로 정죄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사모하던 자들이었다. 자신들의 세상적 이익에는 관심이 없던 그들, 신자의 세례가 예수의 명령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분의 삶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이로 살아가는가, 따름이로 살아가는가?

Tuesday, May 11, 2010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詩.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Wednesday, May 5, 2010

내 영혼의 오두막

<내 영혼의 오두막> 김 영봉 목사: “누구나 아프다”(Everybody Hurts)--창세기 3:1-7

1.
윌리엄 폴 영(Wm. Paul Young)의 소설 <오두막>(The Shack)은 맥켄지 앨런 필립스(Mackenzie Allen Phillips)라는 가상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줄여서 ‘맥’이라고 부르는 그는 미국 중서부의 한 농장 지대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담한 사람이었고, 보수적인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자주 술에 만취하여 부인과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입니다. 저녁 식탁에서 그는 끝도 없는 설교와 훈계를 늘어 놓았고, 즉석에서 내는 성경 퀴즈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끔찍한 벌을 주곤 했습니다.

열 세살 되던 해, 청소년 수양회에 갔다가 맥은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는 지도 교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은혜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 지도 교사가 아버지의 직장 동료라는 것을 깜빡 했습니다. 며칠 후, 지도교사는 맥의 아버지에게 충고를 합니다. 잘 한다고 한 것일텐데, 그것이 맥에게는 큰 화를 초래합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이모집에 보내 놓고는 뒤뜰에 있는 참나무에 맥을 묶어 놓고 허리띠로 때리고, 성경 구절을 들이대면서 훈계를 합니다.

약 2주일 후, 맥은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되자 가출을 결행합니다. 열 세살 나이의 소년에게 세상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크게 탈선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갑니다. 20대 초반에는 신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만나 화해했으며, 내넷 새뮤얼슨(Nannette A, Samuelson)과 결혼하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들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었는데, 두 아들은 독립했고, 조시(Josh)와 케이트(Kate) 그리고 늦둥이 다섯 살 미시(Missy)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해, 노동절 연휴, 맥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왈로와 호수 주립 공원(Wallowa Lake State Park)에 야영을 하러 갑니다. 간호사인 아내 낸은 교육을 받으러 시애틀에서 주말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맥은 세 아이와 꿈 같은 시간을 지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아들 조시와 딸 케이트가 카누를 타고 놀다가 그만 뒤집혀 버립니다. 맥은 강물로 뛰어 들어 허우적 거리는 케이트와 조시를 구조해 냅니다. 한 참 후 뭍으로 올라와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돌아 보니, 벤치에서 색칠 놀이를 하고 있던 미시가 사라졌습니다.

경찰이 오고 비상이 걸렸습니다. 간장을 태우는 초조한 시간이 지난 후, 경찰은 깊은 산 속, 버려진 어느 오두막에서 미시의 피 묻은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미시의 시신은 찾지 못했고, 경찰은 미시를 살해한 범인은 어린 소녀들만 노려 범행을 저질러 온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만을 밝혀 냅니다. 다섯 살 어린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인적 없는 오두막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되었는데, 그 시신 조차도 수습하지 못한 것입니다.

2.
그 이후로, 맥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의 마음에는 ‘거대한 슬픔’(The Great Sadness)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다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맥은 가끔 웃는 일이 있었지만, 그 웃음 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느낍니다. 맥의 감정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미시가 실종된 그해 여름 이후 ‘거대한 슬픔’은 투명하지만 무거운 누비이불처럼 맥의 어깨를 두껍게 감싸고 있었다. 그 무게에 두 눈은 흐려지고 어깨는 축 쳐졌다. 두 팔이 모진 절망과 함께 누비이불에 꿰매지고 자신도 그 일부분이 된 것 같았으며, 그것을 털어내려는 노력 때문에 항상 녹초가 되곤 했다. 맥은 매일 납으로 만든 무거운 목욕가운을 입은 것 마냥 축 쳐진 채 먹고 일하고 사랑하고 꿈을 꾸고, 만물을 퇴색시키는 음산한 낙담 속을 터벅터벅 걸어야 했다.”(35쪽, p. 27)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눈비가 심하게 오던 날, 맥은 우체통에서 발신인 주소도 없는 엽서 한 장을 발견합니다. 그 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맥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다음 주말에 [그]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파파

‘그 오두막’은 말할 것도 없이 미시가 살해된 그곳을 말합니다. 맥은 그 엽서를 받아 들고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엽서를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파파’는 아내 낸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낸 엽서인가? 도대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누가 장난한 것인가? 누가 이렇게 잔인한 장난을 한다는 말인가? 혹시, 그 연쇄 살인범이 나까지 노리고 한 수작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하지만 맥은 끝내 그 엽서를 구겨 버리고 모른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엽서를 보낸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든, 확인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처제 집으로 보내 놓고 친구의 지프를 빌려 그 오두막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전반 약 1/4의 내용입니다. 후반 3/4에서는 그 오두막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오두막에서 맥이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거대한 슬픔’을 치유 받는다는 것이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3.
주인공 맥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상처는 특별합니다만, 저자는 그의 상처를 통해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기를 기대합니다. 이 소설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치유와 변화입니다만,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먼저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도록 독자를 흔듭니다.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혹은 억압하고 살았던, 혹은 망각하고 살았던 상처를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힘은 참으로 강하고도 신비롭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독자는 자신의 상처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뛰어납니다.

지난 2월 초, 멕시코 단기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저는 이 소설을 두 번째로 읽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비행기 안에서 머무는 시간은 독서에 가장 유익한 시간입니다. 보스톤에서 휴스톤으로, 휴스톤에서 메리다(Merida)로 가는 공항 대합실과 비행기 안에서 저는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의 둘째 날, 저는 아주 특별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제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눈망울 안에서 저에 대한 강렬한 원망의 빛이 보입니다.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강렬한 적의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저는 잠에서 소스라쳐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다시 잠을 청하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 꿈에 무슨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내 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무엇일까? 그렇게 강렬한 원망의 감정을 나에게 품고 있을 사람이 누구일까?” 성령께서 그 꿈을 통해 저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필름을 되돌려 보다가, 제 안에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단정할 논리적 근거가 하나도 없었지만, 제 마음에 아주 분명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제게서 받은 상처가 그 사람에게 아직도 있다면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제게 남겨진 상처를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 후, 저는 다시 침대에 누워 부족한 잠을 보충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제 의식은 “나에게는 이같은 상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무의식 속에 있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처를 기억나게 하고, 그것을 다시 보도록 저를 일깨웠던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 하나가 얼마나 신비로운 힘을 발휘하는지요!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는 제자가 있는데, 이번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이 소설을 읽고는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작년에 구입해 놓았지만 왠지모르게 주저하면서 잃지 못했던 소설이었습니다. 그 알 수 없는 주저함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성령님의 신비로운 움직이심과 역사하심이란... 한 소설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상처들과 죄책감을 부드럽게 들추어 내고, 느끼게 하고, 그리고 동시에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4.
이 소설의 저자 폴 영도 많은 상처를 안고 산 사람입니다. 캐나다 출생인 그는 목사이면서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뉴기니(New Guinea)에서 열 살까지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폴은 원주민에게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청소년기에 그는 잠시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또 다시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이 자주 그렇듯이, 그는 졸업할 때가지 13번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로 돌아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었던 상처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로 인한 아픔의 종류를 이렇게 나열합니다. “여러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이어 잃어버리는 아픔, 겨울 한 밤중에 일어나 철길을 따라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던 아픔,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끊임없이 내면을 흔들어 놓는 그 깊고 시끄러운 수치심의 아우성, 개인적인 실패로 인해 깨어지고 지워져 버린 꿈들, 방아쇠만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일 정도로 희미한 희망.” (http://theshackbook.com/)

그는 이 모든 상처와 아픔을 억누르며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로 인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생기고, 일중독에 빠지는 등, 이런 저런 문제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럭 저럭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데 가까스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서른 여덟이 되던 해, 억눌렸던 상처와 아픔이 그 흉한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그의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독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한 순간에 난파선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다행히, 아내 킴(Kim)은 남편을 떠나지 않고, 그로부터 11년 동안 남편의 치유 과정을 함께 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상처와 치유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선물로 시작된 이 소설은 무려 29개의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자비로 출판했고, 광고와 홍보를 위해 2백 달러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2010년 현재 7백만부가 팔려 나갔습니다. 이것은 출판계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이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두에게 상처가 있으며,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잊혀졌거나 억압해 왔던 상처를 기억하도록 돕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너무 단정적이라고 하시겠습니까?

5.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곧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찢어질듯한 울음을 울면서 태어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인생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해(苦海)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정신과 의사이자 사상가인 스캇 펙(M. Scott Peck)은 그의 명저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Life is tough.”
왜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장과 이어지는 4장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는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과 평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3장과 4장에 보면, 그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과 평화에 균열이 생깁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금이 생깁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자, 인간 사이에 금이 갑니다. 2장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 벗었어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하나님께 죄를 짓고 나서는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뭇잎으로 치부를 가립니다. 그 균열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땀흘려 정복해야만 하는 관계로 타락합니다. 창세기 3장과 4장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하나의 진리를 아주 선명한 목소리로 들려 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소설 <오두막>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 가지 진실, 즉 “누구나 아프다”는 진실은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누구는 과거에 심히 아팠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별로 아프지 않다면, 앞으로 아플 것입니다. 협박이 아닙니다. 삶의 진실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Life of the Beloved)라는 책에서 친구 프레드 브랫트만(Fred Bratman)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상처받은 사람이고, 나 역시 상처받은 사람이지.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이네.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며, 너무나 구체적이고 뚜렷해서, 이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쓸 것이 많다는 점을 믿기 어려울 때가 자주 있지”(73쪽).

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고,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적어도 두 가지의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첫째,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있을 때, 누구나 때로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동안에는 나만 당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만 재수에 옴 붙은 줄 알았는데, 혹은 하나님이 나만 피해 다니시는 것 같았는데, 겉으로 멀끔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상처가 있고, 불행할 것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음을 알고 나면, 버틸 힘이 생깁니다. 때로, 다른 사람의 상처는 작아 보이고 내 상처만 커 보일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큰 상처가 있고 가벼운 상처가 있다 할 수 있지만, 상처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늘 절대적인 무게로 느껴지는 법입니다.
이 대목에서 노래 하나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미국의 록 밴드 R. E. M.이 부른 노래인데, 좋은 그림과 함께 편집해 놓은 영상이 있어서 한글 자막과 함께 여러분에게 들려 드립니다. (영상과 음악)Everybody Hurts누구나 아프다

긴 하루가 지나고 밤을, 당신 홀로 밤을 맞을 때,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느껴질 때,그래도 견디세요.포기하지 마세요,누구나 때로 울고, 누구나 때로 아프기 때문이죠. 때로, 모든 것이 엉망일 경우도 있어요.그 때, 노래를 부르세요. 당신의 날들이 어둠 뿐일 때,견디세요, 버티세요.다 포기하고 싶을 때,버티세요.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껴질 때,그래도 버티세요. 누구나 아프기 때문이죠.친구에게서 위로를 찾으세요.누구나 아파요.포기하지 마세요.그래요. 포기하지 마세요. 혼자라고 느껴지나요?아니어요, 아니어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어요. 당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면,낮과 밤들은 견딜 수 없이 길 거여요.더 이상 버티기에 너무 지쳤다고 생각한다면,때로 누구나 아파요. 누구나 울어요.때로 누구나 아파요. 때로 누구나 아파요.그러니, 버티세요, 견디세요.버티세요, 견디세요, 놓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버티세요. 누구나 아파요.당신 혼자만 그런게 아니어요.

둘째, 우리가 사는 세상이 깨어진 세상이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상처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를 보듬어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들려드린 노래는 참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상처 많은 세상의 현실을 그냥 인정하는 데서 끝난다는 점에서 부족함이 있습니다. 때로 누구나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견디고 버티면서,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내가 입은 상처에서 발생합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알고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상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진정한 희망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보듬어 주어야만 합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설 <오두막>을 가지고 씨름하는 이 기간 동안, 우리 각자가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기회를 가지기 바랍니다. 우리의 상처로 우리 자신이 우리 영혼 안에 지은 그 흉칙한 오두막을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치유의 첫 걸음입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 누구를 만나든지 상처입은 사람으로서 대하고, 그 상처에서 나오는 쓴 물을 견뎌 주며, 서로 보듬어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처의 치유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더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다만, 너나 나나 모두 다 아프다는 이 하나의 진실을 생각하고 그 사실에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위로자이신 성령의 위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상처 받은 영혼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상처의 왕이신 주님, 상처 입은 저희가깨어진 세상에서상처 입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게 하시고,저희의 상처를 대면하여 치유의 길을 찾게 하시며, 저희를 사용하여 세상의 깨어짐과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소서. 아멘.

Tuesday, May 4, 2010

코스타 25년-복음, 민족, 땅끝

나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민족은 무엇이며 나에게 땅끝은 어디인가? 코스타가 25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 민족, 땅끝... 아! 주제만 들어도 그 때의 그 순수한 열정으로 가슴이 벅차 뛰어 오릅니다. 조국의 교회여 본질로 돌아갑시다. 제발 가슴 뛰는 주제들로 헌신합시다. 깨어나라 코스탄들이여. 이제 일어나라. 나의 주 나의 사랑 예수 이름으로 영원한 코스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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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코스타 주제소개: KOSTA/USA가 시작된 지 어언 25년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KOSTA/USA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돌이켜보면, 그 안에 있었던 소중한 만남과 추억, 그리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무엇보다 KOSTA/USA를 이끌어왔던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모토가 한국 복음주의권에 시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을 감사드린다. 복음, 민족, 땅끝(삶과 신앙의 통합)은 지난 25년 전 KOSTA를 시작할 때부터 KOSTA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가치(core value)였다. KOSTA/USA가 시작되었던 1986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자. 당시 KOSTAN들은 유학생으로서 고된 삶 가운데 있었고, 암울했던 조국의 상황을 그저 멀리 타국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1980년대를 사는 한국인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복음이 진정으로 한국 민족에게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을 세상에 선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엄숙한 소명이었다. 복음이 삶으로부터 괴리되고 신앙이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당시 기독교 현실의 이원론적인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KOSTA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KOSTAN들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런 고민과 결단은 지난 25년간 KOSTA/USA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복음, 민족, 땅끝'은 여전히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일까? 처음 KOSTA를 시작했던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우리는 올해 KOSTA/USA를 통해 '복음, 민족, 땅끝'의 주제가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먼저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5년 전 복음이 우리 선배 KOSTAN들에게 소망이었듯, 여전히 복음이 우리의 소망임은 분명하다. 복음은 창조주의 선한 창조의지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인간성이 회복될 길이 마침내 열렸다는 선포이자, 끊을 수 없는 죄의 악순환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를 얻었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하지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구원에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연, 사회, 문화, 학문 등 피조세계 전체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우주적 선포인 동시에, 어그러진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예수께서 세우셨다는 공동체적 선포이기도 하다. 즉, 복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 목표이자, 민족과 땅끝의 기초가 되는 포괄적인 가치인 것이다.

민족이라는 가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음을 믿는다. 특별히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가난과 독재 등의 고난 속에서 우리를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으신 목적이 있음을 믿는다. 다만 25년 전 우리 선배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조국을 섬기는 일을 통해 발현시켰다면, 이제 우리는 자민족중심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폐쇄성에 빠지지 않고, 타국에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탤런트와 성품을 사용해 우리 조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폐쇄적이거나 이기적이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섬김’의 정체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끝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민족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복(blessing)을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나눌 것을 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땅끝은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가치이다. 그러나 땅끝의 의미는 단지 선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가 정해놓은 경계(boundary)를 넘도록 요청한다. 예배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편안한 종교행위로 신앙생활의 전부를 채우고자 하는 우리에게, 복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영역에서만 우리의 주(Lord)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가정, 사회, 문화, 인간관계, 직장 등 삶의 전 영역(sphere)에서도 역시 우리의 주로서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5년 전 우리 선배들의 통찰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적용된다.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세속화 및 혼합주의(syncretism)의 도전 또한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명목으로 세상과 대화하려는 시도가 자칫 세속화나 혼합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삶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이원론 및 혼합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피조세계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선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010년, KOSTA/USA 25주년을 맞는 이때에 우리는 복음, 민족, 땅끝의 세 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또한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도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복음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민족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 선교적인 의미로서의 땅끝의 가치, 또한 피조세계 각 영역의 복음으로서의 땅끝의 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뒤틀려진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유대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과의 언약으로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과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신실하심을 표현하셨으며, 그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빛으로 부름받은 새로운 언약 공동체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