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는 "미국교회의 6가지 변화" 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싣고 있다. 이것은 미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기반은 취약해지는 반면 눈에 보이는 사업들에 열을 올리는 것이 큰 흐름의 핵심이다. 이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알지만 이것을 돌이키기에는 지금이 그리고 여기가 너무 좋고 할일이 많은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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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독교 관련 전문리서치 기관인 바나그룹은 자신들이 올 한 해 동안 실시한 5천여 설문조사들을 분석, 미국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변화 6가지’를 최근 발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뉴스미션
1. 성경에 관해 점점 더 무지해지고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도 보편적인 진리들에 대해 점점 무지해져 가고 있다. 조사결과 부활절이 기독교의 절기인 것은 알지만 어떤 절기인지 아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성령을 살아계신 삼위의 한분으로 알지 않고 ‘하나님 임재나 능력의 상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 등이 이러한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저들만의 리그가 돼 가고 있어: 핸드폰, 스마트폰, 트위터 등과 같이 즉각적이고도, 원거리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비기독교인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조사 결과 교회 행사에 지인을 초대할 생각이 있다고 밝힌 응답자가 1/3도 안 됐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인이나 교회들이 행한 사회적 공헌에 과거보다 덜 감동받으며, 비기독교인들에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이 줄어 든 것으로 나타났다.
3. ‘영적 원리들’ 보다 ‘실제적 삶에 도움이 되는 원리’에 더 관심 가져: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를 묻는 질문에 10대들은 교육ㆍ경력 쌓기ㆍ우정ㆍ여행 등을, 성인들은 삶의 안락ㆍ성공ㆍ개인적 성취 등을 꼽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신앙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러한 인생의 성취 목표들보다는 덜 중요해져 가고 있다. 조사결과 많은 이들은 영원의 삶에 대한 보장보다는 현재에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4. 지역사회 봉사에 관심을 갖는 기독교인 수 늘고 있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봉사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이 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 정의와 봉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자극과 도전을 주기도 하지만 영적인 기반이 없으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단순히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일이기에 하는 봉사가 아닌 순수한 기독교의 사랑에 의한 봉사가 되도록 교회가 성경적인 관점을 제공해야 한다.
5.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용’이 만연되고 있어: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영적 자신감의 부재로 인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불확실한 행동들과 사상들이 교회에 쉽게 허용되고 있다. 조사결과 교회가 교리로서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 삶의 덕복들은 점점 줄고 있다. 일례로 사랑이라는 것은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로 정의되고 있다. 즉 성경에 씌어진 그대로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따라 사는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수는 매우 적다.
6. 문화와 개인의 삶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 사라져: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삶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어떻게 일치하느냐를 보면서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결정짓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은 문화적 영향력의 원천이 될 만큼 충분한 결실을 맺고 있지 못하다. 그 어느 종교나 철학, 사상보다도 미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제공해 온 기독교였기에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 의해 받고 있는 영향에 대해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Tuesday, December 28, 2010
Monday, December 27, 2010
John 1:9-12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 청년요셉 자매들과 한편의 설교 동영상을 보았다. 요지는 이것이었다. Every Christmas, we exchange the gifts that we can live without. But we often forget the gift of Christmas that we cannot live without, Jesus Christ.
오늘 청년요셉 자매들과 한편의 설교 동영상을 보았다. 요지는 이것이었다. Every Christmas, we exchange the gifts that we can live without. But we often forget the gift of Christmas that we cannot live without, Jesus Christ.
Tuesday, December 21, 2010
요한복음 7:53 - 8:12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8: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초막절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 다음날인 안식일에 간음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와서 재판을 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스스로 모세율법의 충실한 따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형권이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자신들은 여인을 실제로 죽이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에게 곤혹스런 재판을 떠넘기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통렬한 메시지이다. 이 말씀은 바로 오만한 지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어두움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메시지이다.
초막절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 다음날인 안식일에 간음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와서 재판을 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스스로 모세율법의 충실한 따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형권이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자신들은 여인을 실제로 죽이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에게 곤혹스런 재판을 떠넘기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통렬한 메시지이다. 이 말씀은 바로 오만한 지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어두움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메시지이다.
Saturday, December 18, 2010
고린도전서 12:13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3 For we were all baptized by one Spirit into one body--whether Jews or Greeks, slave or free--and we were all given the one Spirit to drink.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 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는 성령을 마셔야 비로소 살아난다. 성령을 마시지 못하면 마셔도 또다시 목마른 그 무엇을 유행처럼 따라다니며 허덕이게 된다. 먹을 음식 말씀과 마실 음료 성령을 주시사 오늘을 살게 하소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 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는 성령을 마셔야 비로소 살아난다. 성령을 마시지 못하면 마셔도 또다시 목마른 그 무엇을 유행처럼 따라다니며 허덕이게 된다. 먹을 음식 말씀과 마실 음료 성령을 주시사 오늘을 살게 하소서.
Friday, December 17, 2010
빌립보서 4:14-16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가난하고 핍박받던 교회,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냐로 선교사역을 떠날 때에도 연약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길 때에도 바울의 후원이 되었다. 자신의 가난함을 나눔을 통해 부요함으로 바꾼 빌립보 교인들. 진정 믿음의 본이며 하나님의 칭찬이다.
가난하고 핍박받던 교회,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냐로 선교사역을 떠날 때에도 연약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길 때에도 바울의 후원이 되었다. 자신의 가난함을 나눔을 통해 부요함으로 바꾼 빌립보 교인들. 진정 믿음의 본이며 하나님의 칭찬이다.
Thursday, December 16, 2010
아나뱁티스트 영성
나는 신자의 침례를 인정한다. 나는 유아세례를 믿지 않으며 종교국가주의는 신뢰하지 않는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부모에서 태어났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가 누구이든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다. 아나뱁티스트들에 대한 재평가들이 이루어지고 있어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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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2010년 7월 22일은 세계 기독교 역사를 새로 쓴 날이다. 루터란세계연맹(LWF·Lutheran World Federation)은 독일의 슈튜트가르트에서 제11회 총회를 열어 16세기 당시 루터란이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를 박해했던 일에 대해 깊은 용서와 회개를 선포했다. 총회에서는 아나뱁티스트 후예인 메노나이트 교회 대표자들이 참석했고 루터란 지도자들은 이들에게 사죄했다. 루터와 칼뱅 등 개혁가의 반대를 받으며 500년간 박해 속에서 받아온 오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나뱁티스트는 종교개혁 시대에 출현했던 개혁적 분파다. 형식에만 그쳤던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세례는 개인의 철저한 신앙고백에 근거해 시행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몸 전체가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실시했다. 이 때문에 반대파들은 이들을 유아세례에 이어 또 한번의 세례를 받는다고 비꼬며 ‘Anabaptist’, 즉 ‘재세례파’라는 별명을 붙였다. 개혁시대 초기에 이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유아세례 거부뿐 아니라 당시 마르틴 루터 등이 추구하던 정교일치를 비판하고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대치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사회의 권력구조가 교회 속으로 전이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세속사회로부터 분리된 자발적 공동체로 정의하고 당시 전통과 관습에 도전했다.
개혁파들보다 더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던 이들은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마태복음 5∼7장에 이르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제자도를 추구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확실한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의식, 정교분리, 공동체, 제자도, 평화주의 등은 당시 기독교 환경에서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단과 반역자로 몰리며 루터파와 가톨릭교회 둘 다에게 핍박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나뱁티스트 이단’을 두 발을 묶은 채 물에 빠뜨려 살해하기도 했다. 교회역사가 후스토 곤잘레스는 “순교자의 수는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숫자는 아마 콘스탄틴 대제가 회심하기 전 3세기 박해 기간에 죽은 이들보다 많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최근 한국교회에 이 같은 아나뱁티스트 신앙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배우자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 배경은 한국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정교일치를 추구하고, 공동체 정신을 상실해가며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제자들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는 많지만 산상수훈에 따라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삶이 고귀하게 비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왜 루터와 칼뱅이 아니라 아나뱁티스트일까. 김기현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목사는 “화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 공동체 지향, 제자도 추구 등이 현대 한국교회의 병폐를 치유할 요소가 되기 때문”이라며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예수 정신의 근본을 잃어가며 종교화되는 교회를 향한 치료제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목회자를 비롯해 평신도 역시 본질 회복에 대한 목마름으로 넘쳐난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들은 말 대신 삶으로 예수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소재 아미시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아나뱁티스트의 삶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피해자 가족은 즉각적으로 범인을 용서한다고 알렸고 그 어떤 보복이나 원망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을 별난 사람으로만 치부하다 용서의 모습 앞에 경의를 표했다.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김경중 총무는 “현대 아나뱁티스트의 특징은 제자도와 비폭력 평화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며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용서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했다.현대 아나뱁티스트는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시파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신앙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선조들이 추구했던 신앙적 전통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메노나이트는 가장 큰 규모의 교단으로 메노나이트세계교회 총회 소속 신자만 160만명에 이르고 있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전 세계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걸출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고(故)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전 노트르담대학 교수는 현대 메노나이트파 대표적 신학자다. 요더의 신학은 스탠리 하우어스(듀크대), 글랜 스타센(풀러신학교) 등 기독교윤리학 대가들에게 이어졌다. 하우어스와 스타센 교수는 자신을 각각 ‘아나뱁티스트적 감리교도’ ‘아나뱁티스트적 침례교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메노나이트파의 경우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김경중 KAC 총무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메노나이트 봉사자들이 국내에 입국해 대구와 경산 지방에서 71년까지 활동했었다”며 “이들은 구호 원조활동뿐 아니라 직업학교를 세워 사람을 키웠다”고 말했다. 2001년 KAC가 설립돼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전통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으며 서울과 춘천에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설립돼 있다. 침례신학대학교 출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아나뱁티스트 모임 등도 형성돼 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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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2010년 7월 22일은 세계 기독교 역사를 새로 쓴 날이다. 루터란세계연맹(LWF·Lutheran World Federation)은 독일의 슈튜트가르트에서 제11회 총회를 열어 16세기 당시 루터란이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를 박해했던 일에 대해 깊은 용서와 회개를 선포했다. 총회에서는 아나뱁티스트 후예인 메노나이트 교회 대표자들이 참석했고 루터란 지도자들은 이들에게 사죄했다. 루터와 칼뱅 등 개혁가의 반대를 받으며 500년간 박해 속에서 받아온 오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나뱁티스트는 종교개혁 시대에 출현했던 개혁적 분파다. 형식에만 그쳤던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세례는 개인의 철저한 신앙고백에 근거해 시행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몸 전체가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실시했다. 이 때문에 반대파들은 이들을 유아세례에 이어 또 한번의 세례를 받는다고 비꼬며 ‘Anabaptist’, 즉 ‘재세례파’라는 별명을 붙였다. 개혁시대 초기에 이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유아세례 거부뿐 아니라 당시 마르틴 루터 등이 추구하던 정교일치를 비판하고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대치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사회의 권력구조가 교회 속으로 전이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세속사회로부터 분리된 자발적 공동체로 정의하고 당시 전통과 관습에 도전했다.
개혁파들보다 더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던 이들은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마태복음 5∼7장에 이르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제자도를 추구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확실한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의식, 정교분리, 공동체, 제자도, 평화주의 등은 당시 기독교 환경에서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단과 반역자로 몰리며 루터파와 가톨릭교회 둘 다에게 핍박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나뱁티스트 이단’을 두 발을 묶은 채 물에 빠뜨려 살해하기도 했다. 교회역사가 후스토 곤잘레스는 “순교자의 수는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숫자는 아마 콘스탄틴 대제가 회심하기 전 3세기 박해 기간에 죽은 이들보다 많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최근 한국교회에 이 같은 아나뱁티스트 신앙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배우자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 배경은 한국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정교일치를 추구하고, 공동체 정신을 상실해가며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제자들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는 많지만 산상수훈에 따라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삶이 고귀하게 비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왜 루터와 칼뱅이 아니라 아나뱁티스트일까. 김기현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목사는 “화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 공동체 지향, 제자도 추구 등이 현대 한국교회의 병폐를 치유할 요소가 되기 때문”이라며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예수 정신의 근본을 잃어가며 종교화되는 교회를 향한 치료제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목회자를 비롯해 평신도 역시 본질 회복에 대한 목마름으로 넘쳐난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들은 말 대신 삶으로 예수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소재 아미시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아나뱁티스트의 삶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피해자 가족은 즉각적으로 범인을 용서한다고 알렸고 그 어떤 보복이나 원망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을 별난 사람으로만 치부하다 용서의 모습 앞에 경의를 표했다.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김경중 총무는 “현대 아나뱁티스트의 특징은 제자도와 비폭력 평화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며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용서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했다.현대 아나뱁티스트는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시파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신앙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선조들이 추구했던 신앙적 전통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메노나이트는 가장 큰 규모의 교단으로 메노나이트세계교회 총회 소속 신자만 160만명에 이르고 있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전 세계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걸출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고(故)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전 노트르담대학 교수는 현대 메노나이트파 대표적 신학자다. 요더의 신학은 스탠리 하우어스(듀크대), 글랜 스타센(풀러신학교) 등 기독교윤리학 대가들에게 이어졌다. 하우어스와 스타센 교수는 자신을 각각 ‘아나뱁티스트적 감리교도’ ‘아나뱁티스트적 침례교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메노나이트파의 경우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김경중 KAC 총무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메노나이트 봉사자들이 국내에 입국해 대구와 경산 지방에서 71년까지 활동했었다”며 “이들은 구호 원조활동뿐 아니라 직업학교를 세워 사람을 키웠다”고 말했다. 2001년 KAC가 설립돼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전통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으며 서울과 춘천에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설립돼 있다. 침례신학대학교 출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아나뱁티스트 모임 등도 형성돼 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상목 기자
히브리서 13:3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3 Remember those in prison as if you were their fellow prisoners, and those who are mistreated as if you yourselves were suffering (히브리서 13:3).
이렇게 번역을 바꾸어 보았다. 갇힌 사람들을 생각하기를 너희가 갇힌 것처럼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기를 너희가 고통받는 것처럼 하라. 주위에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너무나 드물다.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선생들은 이 세상은 물론 자신도 바꿀 수 없는 허망한 존재이다. 고통받는 북한의 형제들이 언제쯤 우리의 기도제목이 될 수 있을까? 주여 속히 오셔서 그들의 신원을 들어주소서.
이렇게 번역을 바꾸어 보았다. 갇힌 사람들을 생각하기를 너희가 갇힌 것처럼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기를 너희가 고통받는 것처럼 하라. 주위에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너무나 드물다.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선생들은 이 세상은 물론 자신도 바꿀 수 없는 허망한 존재이다. 고통받는 북한의 형제들이 언제쯤 우리의 기도제목이 될 수 있을까? 주여 속히 오셔서 그들의 신원을 들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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