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볼 만한 글이 있어 아래에 옮깁니다. 그토록 부족하다고 외치는 거룩은 은혜를 통해서만 맺어지는 열매다. 그렇지 않은 거룩은 실상 거룩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며 들추어 보면 냄새나는 위선이 된다. 타협없는 은혜의 복음이 전해지는 계절을 기다리며...
새로운 율법주의- 박영돈 교수 / 고신대학교
새로운 율법주의-
은혜와 축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가르침이 한국교회 안에 윤리적인 나태와 방종을 조장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제는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가 점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은혜에 치중한 설교가 무율법적 혼란을 초래한다면, 윤리적 설교는 다른 극단,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은혜를 “거룩함의 열매를 반드시 생산하는 은혜”로 제시하지 못한 메시지가 한국교회에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다면,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풍성함을 밝혀주지 못하는 설교 또한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 많은 교인들은 도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율법적인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생명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꼭 한국교회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것은 현대교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필립얀시(Philp Yancey)는 그의 베스트셀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개신교 안에 만연해 있는 고질적인 병폐인 무율법주의적 혼란보다 율법주의가 더 교묘하고 무섭게 은혜를 위협하는 요소라는 것을 탁월한 대중적인 필치로 설득력 있게 밝혀주었다. 개신교의 생명력을 시들게 하는 것은 값싼 은혜가 빚어낸 무율법적 혼란만이 아니다. 최근 기독교 상담과 내적 치유를 다루는 저명한 학자들은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율법주의적 신앙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것이 개신교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가톨릭교도들보다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이러한 (도덕주의적, 행위주의적) 왜곡으로 억압당하는 사람의 비율이 더 크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주의와 선행의 종교가 신교의 핵심으로 재진입하였다. 그 변화는 너무나 교묘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투르니에는 한 개신교 신자가 자신에게 들려준 의미심장한 말을 소개한다. “개신교는 은혜를 얻기 위해 엄청난 선행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 같지만 가톨릭은 신부에게 구하면 누구에게든지 이 은혜를 자유롭게 나눠주는 것 같습니다.”
"상한 마음의 치유"라는 저서로 잘 알려진 데이빗 씨맨즈도 이런 문제가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안고 있는 정서적 영적 갈등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는 신자들의 신앙이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은혜 중심에서 행위 중심으로 전환되어 간다고 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 시작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율법적 성향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는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바르게 행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즉, 그들은 ‘하지만 이 시점부터는 하나님도 내가 적어도 어떤 수준의 삶을 수행해 내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분명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우리 노력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수 있고 행위로 간격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씨맨즈의 지적과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으나, 성화 과정에서 그 사랑과 은혜를 실제 의지하고 누리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원받는 데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믿지만, 구원 후 신앙생활에서는 자신의 경건의 노력과 열심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내려는 고집스러운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 율법주의와 싸운 은혜의 투사 루터마져도 이 옛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하였다. “나는 과거 20년 동안 은혜의 메시지를 전해왔고 그것을 나 자신이 스스로 믿어왔지만, 지금도 내가 무엇인가를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기를 원할 뿐 아니라 나의 거룩한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교환하려는 구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믿기가 여전히 힘들다”
개신교 신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철저히 은혜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율법주의자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그것은 그들 머리 속의 지식보다 그들 안에 깊숙이 잠재해 있는 율법주의적 성향과 욕구가 은밀히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계속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감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경건의 노력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생활 속에 평안과 기쁨을 누림보다 오히려 가시지 않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시달린다. 그들은 모두 죄책에서의 자유함을 선언하는 칭의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실제 삶 속에서는 병적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투루니에의 말과 같이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론적, 교리적 차원에서 죄사함을 믿고 있지만, 그것을 그들의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와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개신교 강단에서 전파되는 성화론이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적절한 처방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믿음과 행함, 은혜와 윤리를 적절하게 연결시키지 못한 엉성한 성화의 메시지가 신자 안의 율법적 성향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대한 불감증을 심화시킨다.
종교개혁 덕분으로 개신교 신자들은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으나, 성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율법주의의 족쇄에 매여 신음하게 된 것 같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자신 안의 율법주의적 성향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자가 되기 위해 그는 끊임없는 고행과 금욕으로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그럴수록 자신 안에 번민과 두려움과 좌절만이 깊어가는 영적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려는 헛된 수고에서 벗어났다.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가 대신 치른 영적 홍역 덕분에 그 곤욕을 되풀이하지 않고 무사히 칭의의 관문을 통과하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율법주의의 망혼이 이제 성화의 과정에서 다시 살아나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종교개혁이 칭의의 복음을 밝혀준 공헌을 남겼다면, 지금 우리는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거스르는 신율법주의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성화의 복음을 분명히 제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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