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27, 2009
Friday, June 26, 2009
상처입은 치유자
Henri Nouwen - 어느 누구도 상처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육체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또 영적으로든 모든 이는 나름대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상처 앞에서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어떻게 이 상처를 감추고 싸맬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내 자신의 상처를 다른 이를 위한 봉사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더 이상 아픔이나 부끄러움으로만 남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한 치유의 원천이 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상처입고 아픔 많은 자이지만 다른 이의 치유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Nobody escapes being wounded. We all are wounded people, whether physically, emotionally, mentally, or spiritually. The main question is not “How can we hide our wounds?” so we don’t have to be embarrassed, but “How can we put our woundedness in the service of others?” When our wounds cease to be a source of shame, and become a source of healing, we have become wounded healers.
Thursday, June 25, 2009
마지막을 알면 포기하지 않는다
"플로렌스 채드윅" 이라는 수영 선수는 1952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에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부터 35킬로미터 떨어진 카타리나 섬에서 해안까지의 수영에 도전 했습니다. 16시간이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쉬지 않고 상어떼의 위협에서 보호해주는 것이라곤 양편의 구조선이 전부였지만 이젠 마지막 반 마일 (800미터) 이 남아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안개가 꽉찬 한 치 앞도 볼수 없는 바다가 보였습니다. 그만 힘을 잃고 수영을 포기했습니다.
1952년 9월 4일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양편의 구조선이 전부였고 이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안개가 꽉찬 바다였지만 성공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목표지점을 마음속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1952년 9월 4일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양편의 구조선이 전부였고 이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안개가 꽉찬 바다였지만 성공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목표지점을 마음속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QT-창세기 50:15- 26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조와 시작의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알면서 형제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구원의 역전 드라마를 알면 용서할 힘이 생기고 더이상 사단에 농락당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이로써 하나의 부족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이 국가단위로 자라나는 정신적 물질적 기초가 마련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난일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로 사용된다.
창조와 시작의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알면서 형제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구원의 역전 드라마를 알면 용서할 힘이 생기고 더이상 사단에 농락당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이로써 하나의 부족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이 국가단위로 자라나는 정신적 물질적 기초가 마련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난일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로 사용된다.
Wednesday, June 24, 2009
QT-창세기 49:29-33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막벨라 동굴. 약속의 땅이라지만 가나안에 있는 히브리인의 유일한 소유지였다. 아브라함이 장차 후손들이 이국땅에서 400년 종살이를 한 후에 되돌아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후에 믿음으로 구입한 땅이었다. 야곱에게도 그 가나안 땅은 후손들이 지금은 고센지역에서 잘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이었다. 이렇듯 믿음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지금 준비하고 행하는 것이다. 사실 애굽도 가나안도 다 하나님의 땅인데 애굽에서 자손들이 터 잡고 더 잘살수 있도록 야곱을 기념하는 큰 무덤이라도 만들면 될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400년 후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장대한 구원의 역사를 모르는 다분히 인간적인 생각인 것이다. 난 오늘 다시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약속의 땅은 어디인가? 바라 보아야 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막벨라 동굴. 약속의 땅이라지만 가나안에 있는 히브리인의 유일한 소유지였다. 아브라함이 장차 후손들이 이국땅에서 400년 종살이를 한 후에 되돌아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후에 믿음으로 구입한 땅이었다. 야곱에게도 그 가나안 땅은 후손들이 지금은 고센지역에서 잘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이었다. 이렇듯 믿음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지금 준비하고 행하는 것이다. 사실 애굽도 가나안도 다 하나님의 땅인데 애굽에서 자손들이 터 잡고 더 잘살수 있도록 야곱을 기념하는 큰 무덤이라도 만들면 될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400년 후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장대한 구원의 역사를 모르는 다분히 인간적인 생각인 것이다. 난 오늘 다시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약속의 땅은 어디인가? 바라 보아야 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uesday, June 23, 2009
QT-창세기 48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는 야곱은 이제 그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과 축복을 하게된다. 이 예언은 시의 형태로 후대들에게 남겨졌다.
- 르우벤: 장자. 능력이 탁월하였으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함. 아버지의 첩 빌하와 간통. 탁월하지 못하리라는 예언 받게 됨.장자권 중 물질적인 축복은 요셉에게 영적인 축복은 유다에게 옮겨짐.
- 시므온과 레위: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재미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음. 세겜에서의 살육 사건. 분노에 대한 저주와 이스라엘 중에 흩어짐을 예언.
- 유다: 형제간의 용서와 화해의 역할을 함. 형제의 찬송과 높임을 받고, 사탄의 목을 잡게 될 것임을 예언. 통치권이 실로 (참된 평화, 구세주) 오시기까지 미치며 그 앞에 모든 백성들이 복종하게 될 것임을 예언. 나귀를 타고 오실 평화의 왕이 유다에게서 날 것을 예언.
- 스불론: 이름이 거주지를 뜻함. 지중해에 인접한 거주지에 대해 예언.
- 잇사갈: 이름이 일꾼을 뜻함. 기꺼이 어깨에 짐을 멤. 쉼과 기업을 얻음.
- 단: 뱀이요 독사라고 묘사 (사사 시대에 제일 먼저 우상을 숭배함. 계시록에 단지파가 누락).
- 갓: 이름이 추격하다는 뜻. 추격을 받으나 추격함. 요단 건너편의 땅을 받고 모압과 암몬과 싸움.
- 아셀: 지중해변에 위치. 기름지고 풍성한 식물을 수확.
- 납달리: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암사슴. 가나안 북방의 척박한 땅이 기업. 예수님 사역의 무대.
- 요셉 (에브라임과 므낫세): 샘 곁에 있는 무성한 가지. 가지가 담을 넘음. 요셉의 구원이 온 가족과 열방에 미치게 됨을 예언.
- 베냐민: 물어 뜬는 이리 (호전적 성격으로 다른 지파들과 싸우고 진멸당할 위험을 겪음).
야곱은 아들들을 축복하되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 (giving each the blessing appropriate to him). 야곱의 이말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만일 유다라면 혹은 요셉이라면… 아니라면 받은 축복을 감사하면서도 약간 속이 쓰릴것 같다.
Friday, June 19, 2009
스펄전의 아침묵상 중에서
만일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다면 이 아침이 참으로 복된 아침이 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생명과 위로, 빛과 정결, 능력과 화평, 이 외의 다른 많은 소중한 축복들이 성령의 임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기름을 성도의 머리에 부어 그를 제사장으로 삼으며 그가 그 직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진실로 정결케 하는 유일한 물인 성령께서는 우리를 죄의 세력으로부터 씻어 주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가 주의 선하신 뜻을 택해서 행하도록 역사하면서 우리를 거룩하게 성화시키십니다. 빛되신 성령은 처음에 죄 가운데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 주 예수님을 계시하시며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순전한 천국빛을 받아 교육받은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빛입니다. 불로서의 성령은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해 주시며 우리의 성별된 본성이 활활 타오르게 하십니다. 우리는 희생의 불꽃인 그를 통해 우리의 온 영혼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또한 천국의 이슬인 성령은 우리의 메마름을 제거하시고 우리의 삶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오 성령이시여, 이 이른 아침 시간에 이슬되어 위로부터 우리에게 떨어지소서! 이 아침에 성령의 이슬 방울이 떨어진다면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또 비둘기처럼 화평한 사랑의 날개로 그의 교회와 성도들의 영혼을 품어 줍니다. 그리고 위로자로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의 평강에 해를 끼치는 염려나 의심들을 몰아냅니다. 또 여호와께서 요단강에 임하셨던 것처럼 택함받은 백성들 위에 강림하시며 그들 안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의 영을 불어 넣어 줌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바람으로서의 성령은 사람들에게 생기를 가져다 주십니다. 그는 임의대로 부시며 소생케 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영적인 생명들이 살아나고 지탱됩니다.
오 성령이시여, 이 이른 아침 시간에 이슬되어 위로부터 우리에게 떨어지소서! 이 아침에 성령의 이슬 방울이 떨어진다면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또 비둘기처럼 화평한 사랑의 날개로 그의 교회와 성도들의 영혼을 품어 줍니다. 그리고 위로자로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의 평강에 해를 끼치는 염려나 의심들을 몰아냅니다. 또 여호와께서 요단강에 임하셨던 것처럼 택함받은 백성들 위에 강림하시며 그들 안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의 영을 불어 넣어 줌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바람으로서의 성령은 사람들에게 생기를 가져다 주십니다. 그는 임의대로 부시며 소생케 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영적인 생명들이 살아나고 지탱됩니다.
Monday, June 15, 2009
복음과 교회의 회복 - 펌글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용서와 사랑의 권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기는 고사하고 한 가정 한 교회 한 회사 한 정당 한 국가 내에서도 교묘하게 자신과 반대되는 자를 억누르고 핍박합니다. 그것도 명목상으로는 교회를 열심히 섬긴다고 알려진 중직자요 목사요 선교사요 예수의 제자라는 크리스천들이 말입니다. 그리고도 여전히 그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종교인의 거룩함을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그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카인의 제사일 뿐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초라하게 축소되었습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술 한잔 마시고 서로 화해하는 소탈한 용서의 능력조차도 지니지 못한 한심한 모습으로 전락했습니다. 말만 무성할 뿐 능력이 상실된 복음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니 영향은커녕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길에 버려져 밟히는 맛을 잃은 소금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가짜다." 내가 처한 현재의 영적 위치가 내가 받은 권능의 크기를 정해줍니다. 내 안에 십자가의 예수가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권능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가 있는 사람은 부활의 권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 안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의 임재를 날마다 느끼며 사는 사람은 승천의 권능을 누리는 것입니다.우리가 십자가를 우리의 육체로, 머리로만 이해하고 교회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더러는 우리의 혼적인 감성이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많은 눈물과 회개를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의지로 내 영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 까지 나아간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유혹과 분노와 판단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승천한 자리에 까지 나아간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이 사람의 시선은 천국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관점이기에 더 이상 세상의 작은 시시비비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그의 마음에 흐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부활 승천하신 당신의 자유함과 평화와 긍휼과 자비로 우리에게 임하시고 다시 찾아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권능을 받아야 비로소 화목자의 자격을 갖추게 되어 화목케 하는 직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은혜로 구원받아 믿는 자라 할지라도 미처 화목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화목자의 직책을 수행하고자 할 때, 많은 불협화음과 상처와 혼란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을 더 상하게 만드는 일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권능을 받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라고 말씀하십니다.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사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믿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쩌면 신약의 가장 중요한 약속입니다.
구약의 약속이 초림으로 나타나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약속으로 절정에 이르렀다면, 이제 완성된 그 십자가의 약속 위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그의 남은 고난에 채우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제자들에게 부어질 성령의 권능에 대하여 약속하고 떠나셨습니다. 이 권능이 임해야만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했던 약속의 성취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한 새사람을 이루는 신약의 교회의 완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는 우주적 교회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화목된 교회의 완성을 위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보내사 그 일을 맡기셨으며, 보내신 자의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그 성령의 권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정진호 교수 -제삼시
우리의 복음은 초라하게 축소되었습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술 한잔 마시고 서로 화해하는 소탈한 용서의 능력조차도 지니지 못한 한심한 모습으로 전락했습니다. 말만 무성할 뿐 능력이 상실된 복음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니 영향은커녕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길에 버려져 밟히는 맛을 잃은 소금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가짜다." 내가 처한 현재의 영적 위치가 내가 받은 권능의 크기를 정해줍니다. 내 안에 십자가의 예수가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권능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가 있는 사람은 부활의 권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 안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의 임재를 날마다 느끼며 사는 사람은 승천의 권능을 누리는 것입니다.우리가 십자가를 우리의 육체로, 머리로만 이해하고 교회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더러는 우리의 혼적인 감성이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많은 눈물과 회개를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의지로 내 영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 까지 나아간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유혹과 분노와 판단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승천한 자리에 까지 나아간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이 사람의 시선은 천국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관점이기에 더 이상 세상의 작은 시시비비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그의 마음에 흐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부활 승천하신 당신의 자유함과 평화와 긍휼과 자비로 우리에게 임하시고 다시 찾아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권능을 받아야 비로소 화목자의 자격을 갖추게 되어 화목케 하는 직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은혜로 구원받아 믿는 자라 할지라도 미처 화목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화목자의 직책을 수행하고자 할 때, 많은 불협화음과 상처와 혼란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을 더 상하게 만드는 일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권능을 받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라고 말씀하십니다.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사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믿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쩌면 신약의 가장 중요한 약속입니다.
구약의 약속이 초림으로 나타나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약속으로 절정에 이르렀다면, 이제 완성된 그 십자가의 약속 위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그의 남은 고난에 채우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제자들에게 부어질 성령의 권능에 대하여 약속하고 떠나셨습니다. 이 권능이 임해야만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했던 약속의 성취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한 새사람을 이루는 신약의 교회의 완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는 우주적 교회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화목된 교회의 완성을 위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보내사 그 일을 맡기셨으며, 보내신 자의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그 성령의 권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정진호 교수 -제삼시
Tuesday, June 9, 2009
QT-창세기 44:1 - 44:17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유다는 이 은잔을 훔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정말 떳떳했다. 그러나”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고 말한다. 과거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그로인한 죄책감이 일순간 몰려왔을 것이다. 이제 막내 베냐민만 남겨두고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형들은 이제 중대한 선택의 문제 앞에 있게 된다. 그 옛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던 동생 요셉을 버린것처럼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베냐민을 버릴것인가? 아니면 요셉의 제의를 거절하고 베냐민과 같은 배를 탈 것인가? 죄의 유혹이 있다. 그 유혹과 시험은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테스트한다. 과거에 실패했던 비슷한 시험과 어려움이 닥친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로 많이 봐주셨으니 이번에도 봐주시겠지 하면서 은혜를 남용해온 기억이 많다. 그래서 동일하게 실패를 반복해온 기억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임을 아는데…
유다는 이 은잔을 훔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정말 떳떳했다. 그러나”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고 말한다. 과거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그로인한 죄책감이 일순간 몰려왔을 것이다. 이제 막내 베냐민만 남겨두고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형들은 이제 중대한 선택의 문제 앞에 있게 된다. 그 옛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던 동생 요셉을 버린것처럼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베냐민을 버릴것인가? 아니면 요셉의 제의를 거절하고 베냐민과 같은 배를 탈 것인가? 죄의 유혹이 있다. 그 유혹과 시험은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테스트한다. 과거에 실패했던 비슷한 시험과 어려움이 닥친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로 많이 봐주셨으니 이번에도 봐주시겠지 하면서 은혜를 남용해온 기억이 많다. 그래서 동일하게 실패를 반복해온 기억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임을 아는데…
Saturday, June 6, 2009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전문가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누구든지 처음은 있는 법. 독수리도 기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가.
처음이니까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많겠지.
저런 초자가 어떻게 이런 현장에 왔나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일을 시작한 지 겨우 6개월 된 나와 20년차
베테랑을 비교하지 말자.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만을 비교하자.
나아감이란 내가 남보다 앞서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데 있는 거니까.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고 실수하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야.... [한비야]
한비야씨 글을 읽고 있으면, 문득문득 이전에 좋아했던 짧은 글들이 생각이 납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간만에 한비야씨 사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발 한발 걸어서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한비야]
다시금 마음을 추스려봅니다. 잔뜩 먼지끼고 녹이 슨 열정의 엔진에 기름칠을 조금씩 시작해 볼까 합니다. 싱가폴이란 산의 중턱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까지 꼭 올라 그 산을 넘고 싶습니다.
"오늘도 나는 행군한다. 지금은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좀 괴롭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기가 꺾여 자신이 없어 질 때마다, 몸이 지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 일때 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싶을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린다..." [한비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10-11]
누구든지 처음은 있는 법. 독수리도 기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가.
처음이니까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많겠지.
저런 초자가 어떻게 이런 현장에 왔나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일을 시작한 지 겨우 6개월 된 나와 20년차
베테랑을 비교하지 말자.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만을 비교하자.
나아감이란 내가 남보다 앞서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데 있는 거니까.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고 실수하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야.... [한비야]
한비야씨 글을 읽고 있으면, 문득문득 이전에 좋아했던 짧은 글들이 생각이 납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간만에 한비야씨 사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발 한발 걸어서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한비야]
다시금 마음을 추스려봅니다. 잔뜩 먼지끼고 녹이 슨 열정의 엔진에 기름칠을 조금씩 시작해 볼까 합니다. 싱가폴이란 산의 중턱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까지 꼭 올라 그 산을 넘고 싶습니다.
"오늘도 나는 행군한다. 지금은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좀 괴롭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기가 꺾여 자신이 없어 질 때마다, 몸이 지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 일때 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싶을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린다..." [한비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10-11]
Friday, June 5, 2009
말씀묵상-출애굽기 28:15-28:43
28:15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16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17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18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9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20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21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22 순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23 또 금 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위 곧 흉패 두 끝에 그 두 고리를 달고 24 땋은 두 금 사슬로 흉패 두 끝 두 고리에 꿰어 매고 25 두 땋은 사슬의 다른 두 끝을 에봇 앞 두 어깨받이의 금 테에 매고 26 또 금 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아래 양쪽 가 안쪽 곧 에봇에 닿은 곳에 달고 27 또 금 고리 둘을 만들어 에봇 앞 두 어깨받이 아래 매는 자리 가까운 쪽 곧 정교하게 짠 띠 위쪽에 달고 28 청색 끈으로 흉패 고리와 에봇 고리에 꿰어 흉패로 정교하게 짠 에봇 띠 위에 붙여 떨어지지 않게 하라 29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 30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
본문은 대제사장의 장신구 중 흉패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폭과 길이가 한뼘되는 정방형의 주머니다. 금으로 만든 노끈으로 에봇의 가슴에 부착했다. 이 흉패에는 12지파의 이름이 도장처럼 새겨져 있는 12가지의 보석이 가로 네 줄, 세로 세 줄로 달려있었다. 흉패가 "판결흉패"로 불려진 이유는 "우림과 둠밈"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림은 히브리어 첫글자 "알렙"으로 "빛"을 뜻한다. "둠밈"은 히브리어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완전함"을 뜻한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다.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제비뽑기 혹은 빛깔의 변화 등을 통해 판결이 주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과 끝, 빛, 완전함, 이런 것들은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하나님 품속에 계시던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셨다. 오늘 나는 그 분의 품에 안겨서 그 분의 심장 그 분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이 행복을 누가 알겠는가?
본문은 대제사장의 장신구 중 흉패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폭과 길이가 한뼘되는 정방형의 주머니다. 금으로 만든 노끈으로 에봇의 가슴에 부착했다. 이 흉패에는 12지파의 이름이 도장처럼 새겨져 있는 12가지의 보석이 가로 네 줄, 세로 세 줄로 달려있었다. 흉패가 "판결흉패"로 불려진 이유는 "우림과 둠밈"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림은 히브리어 첫글자 "알렙"으로 "빛"을 뜻한다. "둠밈"은 히브리어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완전함"을 뜻한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다.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제비뽑기 혹은 빛깔의 변화 등을 통해 판결이 주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과 끝, 빛, 완전함, 이런 것들은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하나님 품속에 계시던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셨다. 오늘 나는 그 분의 품에 안겨서 그 분의 심장 그 분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이 행복을 누가 알겠는가?
Wednesday, June 3, 2009
우리에게는 바람이 필요하다
환기 집 안 공기 깨끗하게 만들기. 하루 3번 이상, 한 번에 30분 이상 환기를 시키자. 환기할 때는 맞바람이 불도록 마주보는 창문과 현관문을 모두 열어놓는 게 좋다. 장시간 환기가 어렵다면 2~3시간 간격으로 1~2분씩 환기해도 된다. 환기는 낮에 하는게 좋다. 밤에는 도시의 대기오염물질이 땅으로 가라앉으므로 오전 10시 이후 오후 9시 이전에 환기를 하자. -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오염물질이 쌓이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다. 바람이 불면 공기 중에 있던 오염물질이 사라진다. 우리의 영적환경은 어떠한가? 시간나는대로 성령의 바람 (프뉴마 pneuma) 으로 우리의 내면을 환기시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땅을 고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오염물질이 쌓이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다. 바람이 불면 공기 중에 있던 오염물질이 사라진다. 우리의 영적환경은 어떠한가? 시간나는대로 성령의 바람 (프뉴마 pneuma) 으로 우리의 내면을 환기시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땅을 고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Monday, June 1, 2009
말씀묵상-출애굽기 26:1 - 26:14
“고운 모시와 파란 실, 자주색 실, 그리고 빨간 실로 천 열 폭을 짜고 그것으로 회막을 만들어라. 그리고 정교한 솜씨로 날개 달린 생물 모양을 한 그룹을 수놓아라 (출26:1).
본문은 전체 성막을 덮을 막(천)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섯 폭 천 두 세트(모두 10폭)로 되어 있고, 천 끝에 50개의 고리, 50개의 금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각 천의 길이는 28규빗(12.6m), 너비는 4규빗(1.8m)이다. 이것들이 다 연결하여 한 성막을 이룬다. 1절의 “그룹 (cherubim)”이 눈에 들어 온다. 이 그룹은 창세기 3장에 등장한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Genesis 3:22-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다시 그곳에 들어갈 수 없도록 그룹이 지키고 있었다. 이 성막에는 엄격한 조건하에 제사장이나 대제사장 만이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그룹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그 대속의 은혜로 막혔던 담이 허물어 지고 하나님를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나아갈 수 있다. 도저히 갚을수 없던 부채를 탕감받고 빚쟁이들에게 눌려 살다가 이제는 그 무거움과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진 하늘나라 Bank Account 다. 그래도 자랑할 것은 없다. 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복음의 능력을 제한시킨다. 마치 자신이 무슨 스스로 하나님이 된것인양 자신의 가진 기준을 사람들에게 들이댄다. 남보다 조금 더 내세울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사람들을 무시한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결사항전이라도 하겠다는 것이 복음의 정신인가? 은혜입은 우리가 왜이리 자꾸 쪼잔해지는가? 모든 담을 허물어 버리고 원수까지도 품어버리는 복음의 그 폭발적인 능력은 영영 사라져버린 것인가? 사분오열 갈라진 조국을 보며 조국의 교회가 자기의 의를 내려놓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본문은 전체 성막을 덮을 막(천)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섯 폭 천 두 세트(모두 10폭)로 되어 있고, 천 끝에 50개의 고리, 50개의 금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각 천의 길이는 28규빗(12.6m), 너비는 4규빗(1.8m)이다. 이것들이 다 연결하여 한 성막을 이룬다. 1절의 “그룹 (cherubim)”이 눈에 들어 온다. 이 그룹은 창세기 3장에 등장한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Genesis 3:22-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다시 그곳에 들어갈 수 없도록 그룹이 지키고 있었다. 이 성막에는 엄격한 조건하에 제사장이나 대제사장 만이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그룹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그 대속의 은혜로 막혔던 담이 허물어 지고 하나님를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나아갈 수 있다. 도저히 갚을수 없던 부채를 탕감받고 빚쟁이들에게 눌려 살다가 이제는 그 무거움과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진 하늘나라 Bank Account 다. 그래도 자랑할 것은 없다. 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복음의 능력을 제한시킨다. 마치 자신이 무슨 스스로 하나님이 된것인양 자신의 가진 기준을 사람들에게 들이댄다. 남보다 조금 더 내세울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사람들을 무시한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결사항전이라도 하겠다는 것이 복음의 정신인가? 은혜입은 우리가 왜이리 자꾸 쪼잔해지는가? 모든 담을 허물어 버리고 원수까지도 품어버리는 복음의 그 폭발적인 능력은 영영 사라져버린 것인가? 사분오열 갈라진 조국을 보며 조국의 교회가 자기의 의를 내려놓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Subscribe to:
Commen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