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4, 2011

감사의 과학


출처: 중앙일보--"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카전서 5장 18절)"는 성경 대목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일반인인에게 많이 음송된다. 그런데 여기에 과학적 논리가 숨어있었다. 종교에 무슨 과학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를 미국 심리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감사의 과학적 변화를 확인했다.

연구 요지는 감사하면 뇌 좌측의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해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고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reset(재설정)`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설명했다. 감사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는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재확인한 것이다.

미국 마이애미대 심리학 교수 마이클 맥클로우는 "잠깐 멈춰서서 우리에게 주어진 감사함을 생각해보는 순간 당신의 감정시스템은 이미 두려움에서 탈출해 아주 좋은 상태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승리에 도취된 감정을 느낄 때와 유사한 감정의 선순환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감사하는 게 좋을까. 왜 감사한지를 생각하고, 꼽아보고, 음미하는 게 효과적이다. 감사가 가지는 힘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는 것. 미국 시카고에서 심리클리닉을 운영하는 심리학자이자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르얀 트로이아니는 환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불만을 제한하고 감사함을 더 표현하게 하면서 효과를 봤다. 그는 "감사일기나 공책은 중요한 치유의 도구가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UC데이비스의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에몬스는 실험을 통해 "감사하는 사람은 훨씬 살아있고, 경각심을 가지며 매사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더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감사의 과학』이란 책을 2권 집필하고 감사일기의 효과에 대한 연구발표를 내놓기도 했다. 그는 "생리학적으로 감사는 스트레스 완화제로 분노나, 화, 후회 등 불편한 감정들을 덜 느끼게 한다"고 했다.

에몬스는 12살에서 80살 사이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그룹에는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쓰도록 하고, 또 다른 그룹들에는 그냥 아무 사건이나 적도록 했다. 한달 후 중대한 차이가 발생했다. 감사 일기를 쓴 사람 중 4분의 3은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고, 수면이나 일, 운동 등에서 더 좋은 성과를 냈다. 그저 감사했을 뿐인데 뇌의 화학구조와 호르몬이 변하고 신경전달물질들이 바뀐 것이다.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 사랑과 공감 같은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뇌 좌측의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Thursday, November 17, 2011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다

(Rome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 (the forgiveness of sin), 은혜의 풍성함 (the abundance of grace) 그리고 칭의의 선물 (the gift of righteousness) 을 받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receive) 선물이지 행위나 노력의 댓가로 얻는 (earn)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구원을 삶의 여정에 따라 처음과 끝이 다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개신교의 영성을 중세 카톨릭의 영성으로 되돌리는 위험한 일이다. 복음은 처음의 구원과 나중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달라지는 우리를 옭아매는 그런 소식이 아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바로 그 구원이다. 우리의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undeserved favor 에 대한 thanksgiving 의 표현이며 구원을 얻는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Wednesday, November 16, 2011

회개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metanoia) 이다. 이것은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속사람의 변화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에 연연해서 억지로 되는 Outside-in 변화가 아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아내도 인정하는 Inside-out 의 변화이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면 우리의 몸을 흐르는 전기적 파장이 바뀐다. 그러면 세포안의 DNA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회개는 얼핏 관념적인 것 같지만 너무나 실제적 사건으로 드러난다.

믿음을 낳는 메시지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믿음은 메시지를 들음에서 난다.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심각한 오해가 있다. 그 메시지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면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자유케하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 본문을 보면 들음은 분명히 the word of God 이 아니라 the word of Christ 로 말미암는다고 되어있다. 그리스도가 계시되지 않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불평하는 일은 그만두자. 

Monday, November 14, 2011

토라는 주님을 계시한다-부자청년 vs 삭개오

토라는 결국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이고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데 너무나 유익한 시청각 자료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이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을 넘어서 신자개인의 삶으로 향하는 것--이를테면 옛언약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신자의 성화에 유익한 것으로 보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음이 주는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종의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다 (아래의 성경말씀을 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의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나고 오순절에 시내산에서 10계명을 받았지만 신약의 믿는자들에게는 오순절 성령님이 부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의 원뜻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완성하신 예수님. 그 분은 죄인들과 세리 창기들의 친구였다. 누구보다 계명을 열심히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부자청년 (계명의 우등생) 에게는 한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시면서 (눅18장) 누가 보아도 죄인인 삭개오 (계명의 열등생) 의 집에 머무시면서 구원이 이집에 임하였다고 하신다 (눅 19장).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Rome 7:10-11)"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전 3:6)"

Saturday, November 5, 2011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한다죄가 되는 기준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을 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주신 율법의 오리지날이 훼손되지 않은 pristine 한 기준을 말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죄의 지배 dominion 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한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죄는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 안에 "guilt"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욱 괴로운 것은 도덕적으로 못된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한 율법이 나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신자의 삶이 불신자들의 것과 다른 것이 과연 "이전보다 혹은 다른 사람보다 죄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 하는 것"에 있는가? 우리의 죄를 더욱 묵상하게 하는 가르침이 과연 성경적인가? 이런 착각이 얼마나 흔하게 발견되는지 모른다. 그런 가르침은 우리 안에 우리를 옭아매는 견고한 진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케하는 복음이 아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 (두나미스)을 빼앗고, 인생의 더욱 무거운 짐을 다시 지우는 결과적으로 이적행위가 될 수 있다. 믿는 자는 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Rome 6: (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4-15)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Rome 7: (1-4)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9-10)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Rome 8: (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Tuesday, November 1, 2011

웃음이 없는 강단

나는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 가르치는 일은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것 이상으로 다차원적인 활동을 동반하게 되며 보이지 않는 영적교류가 일어난다. 어떤 날은 내면의 기쁨은 사라지고 서운함과 분노가 지배한다. 도대체 나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가치있게 여기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들 때 그렇다. 이것은 교육의 내용과 상관없이 잘못된 선생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단에서 한번도 웃음을 보이지 않는다. 시종일관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다. 사람들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가르침에 묘한 쾌감을 느끼며 동감하며 화답한다. 웃음을 잃어버린 선생… 그는 우울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이다. 그에게 감염된 사람들이 그를 추켜 세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결코 좋은 리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