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16, 2013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의 고통을 당하였거늘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KJV Isaiah 53:4) Surely he hath borne our griefs, and carried our sorrows

마태는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직접 보고, 이사야 53 장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7).” 이 마태의 기록이 구약의 기록과 다른 것 같지만 히브리 원래 뜻에 부합한다. Strong’s Lexicon 을 보면 구약에서 질고와 슬픔으로 번역된 히브리 말과 뜻은 다음과 같다.

חֳלִי (khol•ē'): sickness
מַכְאֹב (mak•ōve'): pain, sorrow

그래서 이사야 53장 4 절을 그대로 번역하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의 고통을 당하였거늘" 이 된다.

Friday, May 10, 2013

트윗레스

오늘 트위트 계정을 중단했다. 예전에 매일같이 묵상한 말씀을 올리곤 했는데... 인터넷에 주인없는 account가 너무 많다는 기사를 읽고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오랜동안 입지 않던 장농 깊숙히 넣어 두었던 겨울 옷을 정리한 기분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런 것부터 정리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Monday, May 6, 2013

골결정력 부족

흔히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골결정력 부족’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증상이지 문제의 뿌리가 아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적, 개인적 신념에 있다. 자신의 존재의 값어치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믿는 그런 신념체계가 오랜동안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선수들은 엄청난 부담을 진다. 자신의 발끝에 경기의 승부가 갈라지는 상황에서는 더욱…

기말시험결과를 학생들에게 통보하면 의례 몇몇 학생들이 찾아오거나 이메일을 보낸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시간을 투자했는데 성적이 안좋게 나왔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이번에 부족했던 것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할 것이라고. 만일 이런 학생들이 다음 기말시험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나, 그런 학생들이 지게될 심리적 부채는 어떻게 해소되나 딱한 마음이 든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삶이 다름아닌 율법아래의 삶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율법은 한치의 양보와 타협이 없는 완전무결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선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 잠시 마음의 위안을 주는 것 같지만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신음과 정죄감이 견고한 진을 치게 된다. 골 결정력을 높이는 비밀은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지론 저지론

(막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요단강으로 가셔서 세례를 받으신 분.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곳, 변화산 (헐몬산) 에서의 영광스런 모습을 나타내신 분. 그 분은 언제나 같으신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고지론이니 저지론이니 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으시는 분이다.

Wednesday, May 1, 2013

나를 먹이는 말씀은

"우리의 설교가 목회적 필요에 끌려 다니다보면 성경의 뜻을 풀어 진지하게 석의하고 강해하기보다 성경을 인용만하고 설교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로서만 남용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오늘 아침 교계신문에 난 이동원 목사님의 강연내용에 관한 기사이다. 교회를 출석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교회의 분쟁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갈등도 아니었다. 설교의 중심을 목회적 필요가 차지할 때였다. 배가 고팠다. 정확히 말하면 불량식품을 먹을 때처럼 배가 부글거렸다. 나를 살리고 먹이는 말씀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 혹은 랍비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생명의 떡으로서 오신 주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