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전문가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누구든지 처음은 있는 법. 독수리도 기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가.
처음이니까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많겠지.
저런 초자가 어떻게 이런 현장에 왔나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일을 시작한 지 겨우 6개월 된 나와 20년차
베테랑을 비교하지 말자.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만을 비교하자.
나아감이란 내가 남보다 앞서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데 있는 거니까.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고 실수하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야.... [한비야]
한비야씨 글을 읽고 있으면, 문득문득 이전에 좋아했던 짧은 글들이 생각이 납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간만에 한비야씨 사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발 한발 걸어서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한비야]
다시금 마음을 추스려봅니다. 잔뜩 먼지끼고 녹이 슨 열정의 엔진에 기름칠을 조금씩 시작해 볼까 합니다. 싱가폴이란 산의 중턱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까지 꼭 올라 그 산을 넘고 싶습니다.
"오늘도 나는 행군한다. 지금은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좀 괴롭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기가 꺾여 자신이 없어 질 때마다, 몸이 지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 일때 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싶을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린다..." [한비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10-11]
"내려놓음"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과정일 뿐이다. "새로움"을 덧입기위한 과정이다. 내안의 어두움 그림자를 붙들고 잉잉거리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두움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옮길 때 물러난다. 아무리 힘들어도...
ReplyDelete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는 찡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중 꽤 유명한 작곡가 였었다는 F의 얘기는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자리를 트고 있다. 어느 날 F는 한 방의 프랭클에게 다가왔다. '어제 이상한 꿈을 꾸었지요. 누군가가 알고 싶은 소원을 말하라고 하는 거에요. 무엇이든지 알려줄 수 있다고.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 언제 석방될 수 있는지 물었죠' '그래 꿈속에서 대답을 줍디까?' F는 프랭클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45년 3월 30일 이래요.' 그 후 F는 매우 쾌활하게 수용소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든 일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날짜가 가까이 와도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3월 29일 F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3월 30일 그는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냈다. 3월 31일 그는 죽었다.
ReplyDelete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결국 죽음을 불렀다. '왜 사는지만 안다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은 의미가 있다. 왜 지금 고난 받고 있는지를 분명히 안다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 나의 앞날을 알 수만 있다면.... 사실 F가 한달 뒤를 타임머신을 타고 갔다 왔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 그가 죽은 다음달 30일에 2차대전의 원흉 히틀러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20세기만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할 수 없다. 인류 역사에 확실성 있는 시대는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문제만 해도 그렇다. 석학들의 해석이 제각각이다. 프린스턴의 쿠르그먼과 하바드의 그레고리는 현 경제문제의 해법을 정 반대로 제시하고 있다. 열어야 한다는 말인가? 닫아야 한다는 말인가? 바닥을 쳤다는 얘긴가? 아직 멀었다는 얘긴가? 미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정말 알 수 없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하고 죽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자 깜짝 놀랐다. '능력 많으신 우리 선생님이 그렇게 돌아가실 수는 없을텐데.'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로 불러 책망을 했다. 며칠후 예수님은 몇몇 제자들을 따로 불러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거기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셨다. 그 입으신 옷이 얼마나 희어졌는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영광된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장래 모습을 보여주셨다. 고난이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 미래의 영광된 모습이 있다는 것! 만약 당신의 영광된 장래 모습을 보았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정말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한가지 중요한 힌트가 예수님 변형 사건에 나온다. "높은 산"에 올라갔다는 것. 그 산이 다볼산이냐, 헤르몬 산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영적 의미가 더 크다. 높은 산은 영적인 고지를 상징한다. 세상과 떨어진 곳, 홀로 있는 깊은 곳이다. 때때로 우리에겐 그런 장소,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우린 너무 산 아래에서 아웅다웅거리며 산다. 마치 땅만 내려보며 열심히 모이를 쪼아대는 병아리들처럼. 그러다 더 이상 쫄 것이 없으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나보다 강한 녀석이 내 영역에서 들어오면 숨이 가빠지고 혈압이 올라간다. 이제 어째야 하는 거지? 도망가? 받아버려?
때때로 높은 산에 오르라. 당신 미래를 모두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지금 당면한 한가지 문제에 몰두하면 그 문제의 미래가 보일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일년에 두 번, 한번에 일주일씩 외딴 별장에서 보낸다. 휴가 차 쉬러 가는 것이 아니다. 한 주간 동안 아무런 장애 없이 집중적인 사고를 하는 '생각 주간 Think Week'을 갖기 위해서다. 산처럼 딱 버티고 서있던 현재의 문제. 그런데 높은 산에 올라가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미래가 보인다. 해결점이 생기는 것. 빌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비전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집중 기도 계획을 세워보라고 권하고 싶다. 높은 산에서 그 고통의 문제를 갖고 기도하다 보면 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미래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 미래가 보이면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라. 김춘근 박사는 급성 간경화로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그때 LA의 빅베어 마운튼의 한 산장에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자신의 미래가 열리는 체험을 한다. '내려가서 한국인 2세들을 깨우는 일을 하라'는 음성을 듣는다. 곧 그의 몸은 상쾌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십만명의 한국인 2세들을 각성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작년 필라 집회에는 2만명의 젊은이들이 각지에서 몰려왔다. 당신의 높은 산은 어디인가?
- 최혁목사
"우린 너무 산 아래에서 아웅다웅거리며 산다. 마치 땅만 내려보며 열심히 모이를 쪼아대는 병아리들처럼. 그러다 더 이상 쫄 것이 없으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나보다 강한 녀석이 내 영역에서 들어오면 숨이 가빠지고 혈압이 올라간다. 이제 어째야 하는 거지? 도망가? 받아버려?"
ReplyDelete...ㅋㅋ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을 살고 있는 저의 숨기고 싶은 모습이기에 더욱 실소가 납니다...허허허...
싱가폴이란 산을 절반 가량 올랐을까요...저의 바람은 이미 정상에 올랐다 하산하고 있는데...현실은 정상까지 가는것도 버겁기만 합니다. 오를수있을지...
저에게도 높은 산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아님 별장이라도...ㅋㅋ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집중 기도 계획을 세워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난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우리에게 가장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기도인 것 같아요.
ReplyDelete무엇보다 인생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ReplyDelete정상이 있다해서 끝이 아닌 또 내리막길, 평지 또다시 오르막길 그냥 연속성이라는 것.
생(生)이란 소(牛)가 외나무다리(一)를 걷는 것을 형상화것이라네요.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그래서 일까?
우리가 신을 찾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