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31, 2012

로마서 3:21-25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 이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이다. 그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얻는(to earn) 의가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이루신 것을 믿음을 통해 선물로 받는(to receive) 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쌍해서 봐주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댓가을 치루는 방법을 택하셨다. 
  • 속량 (redemption): ἀπολύτρωσις (apolytrōsis): 몸값 (ransom) 지불의 결과로 나타나는 구원, 해방, 자유를 뜻하며, 예수님이 대신 값을 치루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 화목제물 (propitiation): ἱλαστήριον (hilastērion): 이ἱλαστήριον라는 그리스어는 히브리서 9:5에서도 등장하는데 이것을 "mercyseat" 으로 번역해 놓고 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day of atonement ) 에 지성소에서 죄의 댓가로 받아야 하는 죽음을 뚯하는 피가 뿌려지는 언약괘의 덮개를 뜻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mercyseat 이며 더이상 인간의 편에서 드려지는 희생제물이 필요없게 되었다.

Tuesday, May 29, 2012

로마서 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선하지만 그 누구도 의롭게 하지 못한다. 인간의 육체로 이루어낸 어떠한 성과도 의롭게 하지 못한다. 나의 핏속에서 나의 DNA 안에서 나의 무의식에서 흘러 나오는 거부할 수 없는 탄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담이래로 인간은 자신을 증명하려는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 아래에 신음하는 존재이다. 신자는 이런 탄식과 신음을 기도와 찬송으로 바꾸는 비밀을 지닌 사람이다. 이런 존재적 혁명은 죄인이 의인이 될 때 일어난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가 지은--기억하지도 못하는-- 모든 죄는 점도 흠도 없이 완벽하게 드려진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에게 전가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완벽한 만족이신 예수님의 의를 선물로 받을 때 일어난다.

Monday, May 28, 2012

로마서 3:1-8


(3:8)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의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되고, 우리의 거짓됨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더하게 된다. 따라서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비방했다. 이런 오해는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지나치게 은혜를 강조하면 신자의 삶을 잘못된 길로 오도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에 관해 로마서는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Friday, May 25, 2012

신자의 확신은 (로마서 2장)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롬2:5)” 를 스스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율법을 가졌으나 실상은 이방인이나 다를 바 없는 유대인이나, 율법에 대한 지식이 없어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로마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좋은 분이시니 우리를 좀 봐주시겠지" 하는 그런 엉거주춤한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대충 눈감아주고 넘어가주는 그런 허술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믿음을 통해 신자가 선물로 받는 의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율법의 본래적 의미까지 완벽하게 만족시킨 하나님의 의" 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관한 스탠다드가 높으면 높을수록 신자의 확신은 더욱 더 커진다. 로마서, 이 편지의 시작은 이런 타협없는 하나님의 법의 기준을 제시하며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듯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신자는 더더욱 은혜의 풍성함과 구원의 확신으로 인도된다.

요즘 값싼 복음이라는 말이 오용되고 있다. 값싼 복음이 문제다 하면서 슬쩍 복음에 인간의 윤리를 끼워넣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복음을 훼손하는 일이며 "큰 기쁜 소식"을 "뭔가 불안한 소식"으로 변질시키는 일이다. 

Thursday, May 24, 2012

로마서 1:28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죄의 본질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 (retribution)은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서 내어버려지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가진 두려움의 뿌리이며 첫 아담의 저주아래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비극의 근원이다. 우리의 문제는 자신도 어쩔수 없는 죄의 증상들에 매여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복음은 피상에서 본질로 우리를 돌이킨다.

Tuesday, May 15, 2012

한국방문 휴유증

한국에 다녀왔다. 외국생활이 15년이 넘어가면서 한국에서 만나는 풍경들은 마치 이방인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점점 생소하고 멀어져간다. 허드러지게  봄꽃은 피었지만 잔가지에 남아있는 찬바람처럼 내마음은 시렸다. 언젠가는 돌아가야할, 그리워하는 고향과 같은 그곳을 잃어 버리고 온둣한 일종의 허전함 혹은 우울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Saturday, May 12, 2012

purpose-driven life vs. life-driven purpose

아코모다도르!
그것은 내가 즐기는 유일한 운동인
궁술을 연마할 때 경험한 것이다. 사범은 한 화살을
두번 쏠수 없으며, 활을 잘 쏘는 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과녁을 맞춘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릴 때까지, 우리 자신이 화살이 되고 활이 되고
목표점이 될 때까지 수백 수천 번을 다시 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의 에너지가 우리의 움직임을 이끌어,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활시위를
놓게 되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오 자히르》중에서 - 고도원의 아침편지


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읽으며 드는 생각이 있었다. 과녁을 맞추야 된다는 생각이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목표는 심리적 부담이 될 수 있고, 결정적일 때 과녁을 맞추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마치 축구선수가 골에 대한 부담을 가질 때 자칫 슬럼프에 빠지듯이... 골에 대한 집념을 가진 선수는 많다. 동네 축구에서도. 그러나 공과 하나가 되어 어울어지는 선수는 드물다.

위대한 목표를 세워놓고 사람들을 다그칠 일이 아닌 것 같다. 위대함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루어 내는 것이 바로 위대한 목표가 되는 것인데... 

들어야 할 가장 위대한 음성은

우리가 들어야 가장 위대한 음성은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3:17)” 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그런 자녀이다 (…He made us accepted in the Beloved, 1:6). 만일 내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버리는 충분한 믿음의 증거를 보이겠다" 고 생각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hero로 만들려는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다분히 나중심적인 결단을 반복해왔던 것 같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 (His beloved Son)을 다 버리신, 우리의 진정한 hero이신 아버지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Wednesday, May 2, 2012

은혜의 복음은

Ignorance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e Law and Gospel is one of the principle sources of all the abuses which corrupt and still corrupt Christianity.” –Theodore Beza. 

  • 율법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 (demand)이며, 은혜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공급하심 (supply) 이다.
  • 율법아래서 의는 노력으로 얻는 것이며 (to earn), 은혜아래서 의는 값없이 받는 것 (to receive)이다.
  • 율법의 관심은 하나님의 기준과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행위 (performance) 이고, 은혜의 관심은 하나님의 만족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미 이루신 일 (finished work)이다.
  • 율법아래의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 (rejection of God)하는 죄인이며, 은혜아래의 인간은 하나님에게 받아 들여진 (accepted by God) 의인이다.
  • 율법아래의 삶은 무거운 짐이며, 은혜아래의 삶은 안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