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29, 2009

삶의 잡동사니와 결별

삶에서 잡동사니를 제거하라. 주변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있다면 결별하라.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고통스러움을 유발하는 것이 있다면 가능한 한 그것과도 결별하라. - 뤼디거 샤헤의《마음의 자석》중에서 -* 삶의 잡동사니가 참 많습니다.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끌어안고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단호하고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하는데 미적대면서끝내 결별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것입니다.내려놓을 것은 얼른 내려놓아야 합니다.내려놓아야 가벼워집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Monday, April 27, 2009

꽉찬시간...

성경에서 시간은 무한한 공간 (infinite space)에 속하는 어떤 특정한 점이나 부분집합을 말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는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도 실상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이고 몰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국가에서 군대에 입대하라는 입영통지서를 받게 된다. 어느날 거울 안에서 낯선 흰머리 소년 혹은 소녀를 만나게 된다. 모든 일에는 기한이 있고 그 기한과 때에 드러난 사건들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은 "때가 찼고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이다. 여기서의 때 (kairos)는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 때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선포에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얼마나 맹숭맹숭한가? 우리의 인생이 무한한 시간 가운데 하나의 부분집합일 뿐인 그런 허무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적으로 알아왔지만 나와는 동떨어지던 진리가 역사하시는 말씀 (rhema)으로 다가오는 때가 오기를 기도한다.

Friday, April 24, 2009


인공위성에서 본 지구

말씀묵상: 요11:17-27

본문은 요 11:17-27 입니다.

본문: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 속에 있은 지 사 일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 때, 제 오빠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주신 말씀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예수님의 강력한 질문이다. 마르다는 내가 하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을 한다. 앵무새처럼하는 신학적인 정답: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 때, 제 오빠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구원과 천국을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닥치는 문제와는 도무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아 나의 믿음이여... 얼마나 허탈하고 무기력한가? 그러나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무슨 잠시잠깐 고통을 잊게하는 모르핀도 아니고 탁상공론하는 신학적 명제도 아니다. 바로 눈 앞에 펼쳐지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그런 것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믿을 것인가? 나는 이것을 믿는가?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믿음 없는 저에게...

말씀묵상: 요22:34-43

오늘 큐티한 내용을 나눕니다 (요한복음 12:34-43):

예수님께서 이 모든 표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에 관하여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을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과 하나님께 칭찬 받는 것" 이다. 사람의 칭찬에 반응하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두려움이다. 요즘 말로 하면 직장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건 좀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 (본문에서는 지도자들) 에게 잘 나타난다. 두려워하는 대상은 바리새인들이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는 범생들이다. 그들에게 꼬투리 잡히면 큰일난다. 잘난 인간들한테 어찌될까봐서... 그런데 수치 중의 수치는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셨다. "인자는 들려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무슨 망신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Lifted up"은 똑똑한 사람들의 눈에는 수치스런 죽음으로 보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이사야는 이 영광을 보았다. 오늘 나는 다시 선포한다. 나의 보스는 예수님이다. 누가 뭐래도.

말씀묵상: 요16:16-16: 24

오늘 큐티한 것을 나눕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16:16-16: 24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할 것이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슬퍼할 것이지만, 너희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다. 출산하는 여인에게는 출산할 때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여인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너무 기뻐서 그 고통을 잊어 버린다.너희도 지금은 근심하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는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너희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전에는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분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것이요, 너희 기쁨이 가득 찰 것이다.”

오늘 주신 말씀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것이요, 너희 기쁨이 가득 찰 것이다." 이 얼마나 익숙한 말씀인가! 그러나 거의 지켜지지 않는 말씀인가! 사실 남들 앞에서 기도하는 척은 할 수있다. 하나님은 속일수 없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들에는 솔깃해지면서 도대체 예수님 말씀은 나에게 뭔가? 헌책방 한켠 어느 책속에 있는 그런 말인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에서 말미암는다고 한다. 그 말씀은 로고스가 아니다. 그것은 레마다. 살아서 역사하는 그런 말씀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자. 언제까지 쇼(show)를 할 것인가? 이제 믿음으로 구하자. 예수님이름으로...

말씀묵상: 요19:17-27

오늘 묵상한 말씀을 나눕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19:17-27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십자가 고난의 절정, 그 마지막 순간에 드러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의 아들이다. 그도 나처럼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고 직업도 친구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의 아들로 믿는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러 오신 분이시다. 사단의 전략은 이분의 두가지 본질을 갈라 놓는다. 그분은 하나님이지만 육신을 입고 사신 분이다. 그분은 육신을 입고 사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내신 분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이 사는 사람이다. 두가지 길에 갈등이 없는 사람이다. 주님. 오늘도 이땅에서 발딛고 살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하루를 살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묵상: 요 20:11-23

말씀묵상을 나눕니다. 본문은 요 20:11-23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마리아는 흰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두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천사는 머리 쪽에, 다른 천사는 발 쪽에 있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소?”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어디론가 가져갔는데,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 관리인인 줄로 생각하고 “저, 당신이 그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면, 어디로 옮겨 놓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셔 갈게요”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한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마리아...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통상적 반응이다. 부활사건 그것은 어느 우스꽝스런 소설 아니면 간절한 집착이 일으킨 정신병적 착란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은 안믿는 사람들의 그저그런 얘기가 아니다. 믿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얘기다.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은 미처 알지 못하던 것들, 믿을수 없는 것들이 마음과 눈앞에 활짝 펼쳐지는 사건이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들을 뛰어넘어 천군천사들의 세계가 열리고, 죽음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계획이 드러난다. "바로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난다. 그 부활의 주님은 바로 오늘 여기에 계신다....

스바냐 1-2장 묵상

스바냐 1-2장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1:12)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1:18)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2:3)

스바냐는 요시야왕이 신앙개혁을 하던 시기의 선지자다. 종교적 타락은 그 시대의 문화와 경제활동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겉으로는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의 기반은 허약하다. 몇년전 미국의 주택경제 쪽으로는 알아준다는 경제학자가 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녀는 미국주택시장에서 버블은 없다고 했다. 그녀는 한마디로 허당이다.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데이타로 현상을 이해하는 학문의 한계인 것이다. 그 데이타라는 것은 많은 경우 조작가능하거나 숨길 수 있다. 이 경제의 위기는 금융시장의 위기이기 이전에 도덕의 위기인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신앙의 위기이다.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못하고 화도 못내는 무능하고 몰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진노와 심판. 언제부터 호랑이 담배피던 노아의 홍수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에나 등장하는 잊혀져 가는 말들이다. 이런 것들은 사탕발림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니 그 분과의 사귐이 너무 얕다. 나는 오늘 개인적인 문제들보다 "하나님의 경제와 정의"를 묵상하고 기도한다. 그 분은 정의를 사랑하고 겸손을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Thursday, April 9,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