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October 27, 2009
고린도전서 15:44 - 15:49
본문은 여러가지의 대조로 구성되어있다. 자연적인 몸 (육의 몸)과 영적인 몸, 첫아담과 마지막 아담, 흙에서 나온 사람과 하늘에서 나온 사람, 땅에 속한 사람과 하늘에 속한 사람 등의 병렬구조로 되어 있다. 정말 좋은 스승이 있으면 묻고 싶다. 전자의 모습으로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후자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인가? 아담의 후손으로 흙을 딛고 그 문화의 영향을 받고 사는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 우리의 부끄러운 삶의 정황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식화 부족 (이를테면 성경적 지식의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실천적 윤리부재 (이를테면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인가? 지식과 삶을 두루 갖춘 사람은 왜 이리 보기 힘든 것인가?
돌아보니 종교적 열정은 있었으나 삶의 피상적 파편들 앞에서 끙끙대면서 살아온 것 같다. 지식의 추구도 실천적 윤리도 나를 살리거나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비록 여전히 일천한 신앙여정을 지나고 있지만). 나의 삶에서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지식도 윤리도 그 어떤 성취도 아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어져서 살아나는 본질이다. 이것을 놓치면 아무리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해도 항상 겉돌게 되는 것을 알았다. 이 본질이 그리운 계절이다. 나는 오늘 기도도 묵상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리.
Saturday, October 24, 2009
로마서에 나타난 부활
부활에 관한 친절한 설명이 있어 소개합니다. 언젠가 코스타에서 뵌적이 있는 조경호 목사님이 쓰신 글입니다.
1. 우리는 아담안에서 아담과 함께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었다: 토론토에서 목회하는 목사 한분은 매주 쇼핑몰에서 전도를 한다. 어느 이슬람 청년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 청년이 이렇게 반문했다. “불가능해요. 어떻게 예수의 피가 인류의 죄를 씻을만큼 충분하다는거죠? ”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막연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용서하고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는걸까?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 해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 비밀을 출생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왜 죄인인가? 아담의 죄로인해 인류가 죄인이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될 수 있는가?” 에 대해 출생이 그 비밀이라고 말한다. 출생은 연합을 가져온다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원죄가 되어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유전설) 출생에 의한 연합(우두머리설 또는 대표설)에 의해 죄인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5:12(새번역)
인간의 게놈(Genome) 프로젝트 결과로 유전자 비밀이 밝혀지고 있다. 만일 죄의 유전자가 존재한다면 죄의 유전인자를 제거한 인간복제 시대가 열린다면 죄없는 신인류의 미래가 열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된 것은 죄의 유전설이 아니라 출생에 의한 연합 때문이다.호박씨 하나를 심었다가 죽으면 호박씨 하나만 죽은 것이 아니다. 만일 그 호박씨가 한 여름동안 300개의 호박을 열매맺었다면 호박 300개가 죽은 씨앗 하나와 함께 죽은 것이 된다. 그 300개의 호박씨를 잘 말려서 그 다음해에 5만개의 호박이 열렸다면 5만개의 호박이 호박씨 하나와 함께 죽은 셈이다. 이와 같이 아담 한사람이 죄를 짓고 죽음의 저주를 받아 에덴에서 추방당했을 때 아담안에서 모든 인류가 함께 죄를 짓고 함께 죽음의 저주를 받았으며 함께 에덴에서 추방당한 인류가 되었다. 아담 이후 출생한 인류는 아담과 <공동행위자>가 되어 죄와 사망의 사람으로 출생하게 된 것이 죄의 기원이다.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먹었으며 아담안에서 아담과 함께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출생은 출생의 시간이 다를 뿐 아담안에서 죄와 사망의 사람을 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아담안에서 출생한 인간은 죄인으로 출생했기에 살아있는 모든 행위가 죄의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사과나무에서 사과만 열리듯이 죄인으로 출생한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죄의 열매일 뿐이다.
2. 아담안에서 출생한 인간이 아담의 타락과 연합하여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인간이 죄인이 된 출생의 방식과 동일하다. 그래서 기독교를 <중생의 종교>라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통해 죄인은 의인으로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롬5:19(새번역)
인류의 두 대표는 아담과 그리스도다. 예수를 마지막 아담으로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담안에서 출생한 인간이 아담의 타락과 연합하여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다. 거듭남은 첫사람 아담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이며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자리에 초대받은 은혜의 사람들이 되었다. 중생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구속행위를 자신의 체험으로 허락받은 동참의 사람들이다.우리가 아담안에서 출생하는 방식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과 10개월의 임신기간을 거쳐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거듭남의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출생의 법칙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요1:12-13(새번역)빌리그래함은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번만 죽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오직 거듭난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모든 죄가 용서받으며 죄로부터 해방되어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3. 거듭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삶과 인격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달라스 윌라드가 말한 것처럼 ‘뱀파이어 크리스챤’이 아니다.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의 피에만 관심을 갖는 뱁파이어들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들이어야만 한다.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에게 교회를 비난받게 만들고 있다. 거듭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삶과 인격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태어난 중생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Wednesday, October 21, 2009
고린도전서 15:12 - 15: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바울이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목숨을 걸고 거짓을 전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혼은 선하고 (그래서 부활하지만) 육체는 악하다는 이분법적 헬라철학 혹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조금 양보하여 육체의 부활은 인정하지 않지만 부활의 은유적 의미(metaphorical meaning)는 인정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렇듯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생각과 통하는 방향으로 부활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설명가능한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 미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린다면 그야말로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오늘이 비록 힘들고 때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가장 소중한 내일을 남겨 두리라...
Tuesday, October 20, 2009
우리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한다
고린도전서 15:1 - 15:11
전장에서 예언과 방언을 말하던 바울은 곧바로 복음의 두가지 핵심을 다시 상기 시킨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기초하며 성령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들린 놋뱀을 보면 살리라는 말처럼 믿기 힘들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죄인인 결정적 증거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 14-15).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3). 주님! 저에게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against all odds) 주님을 바라는 믿음을 주시며 성령을 부어 주시사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Wednesday, October 14, 2009
고린도전서 14:14 - 14:19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나 자아 안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기도를 성령님께서 인도하는 기도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면 우리의 영은 새롭게 되고 건강하게 세움을 받는다.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영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도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혼적인 언어까지 확장되어 나아간다면 예언이 된다. 따라서 방언에 관해서는 우리의 초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을 많이 했다 (18절). 수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하고 뺄 것도 없는 말씀 그대로다.
RA 토레이: “참된 기도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 즉 성령님이 감동을 주고 인도하시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올바로 기도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는 가운데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지도하고 인도하시도록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의 소원을 인도하고 또한 그 소원의 표현을 인도하셔야 한다. 부주의하게 하나님의 존전으로 급히 나아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소행이다. 그분의 존전에서는 그분의 영의 임재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성령님을 보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도록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을 기다려야 하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맡겨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올바로 기도할 수 있다.”
Friday, October 9, 2009
고린도전서 13:1 - 13:7
본문에서 사람의 방언은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방언처럼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이며, 천사의 말이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2장에서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하여 말하고 14장에서 예언과 방언의 은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실상 12장과 14장은 은사에 관한 것이다.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13장은 이 두 장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있다. 본질에서 벗어나서 눈에 보이는 은사적 현상에 열광하기 쉬운 우리를 사랑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다. 천사의 말 - 사랑 = 꽹과리 소리
Thursday, October 8, 2009
고린도전서 12:1 - 12:7
흔히 중세의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한다. 히브리적인 영적 상상력을 헬라적인 사유의 체계로 논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적인 다이나믹스를 경험하는 것은 종합적인 사고가 필요한 반면 헬라적 접근은 분석적 혹은 분리적 사고가 요구된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 쉽고 뭔가 분명하기는 한데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은사.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보수적 신학배경을 가지신 분들의 은사에 대한 설교를 들어보면 상당시간을 은사자체보다는 소위 은사주의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경험에 할당한다 (그러면 말씀파(?) 들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어찌할 것인가?). 이런 설교를 듣고나면 혼란스런 경험들을 정리해주는 분명함이 있어서 후련해진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내 안에서 알지 못할 깊은 슬픔이 밀려오곤 하였다. 이제는 안다. 이를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헬라적 신학적 변증은 우리를 지켜 주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성령의 역사와 그 깊이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의 편지에서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나는 그 누구의 방해에도 성령님을 내 영혼에 샬롬으로 받아 들이는데 그 분을 인격적 하나님으로 그 분을 환영하고 그 분께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엄청난 세월을 보냈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에 울컥 감사가 터져 나온다. 기다려 주시고 찾아오신 성령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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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quick summary:
고린도 교회:
주후 50년경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주후 49-52) 중에 창립. 바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마케도니아를 거쳐 아테네로 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고린도에 와서 1 년반 동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거처(행 18:1-17).
기록동기:
주후 53년경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행18:23) 중에 에베소에 도착하여 3년을 지냄. 그동안 고린도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고린도교회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소식을 접함.
내용요약:
1-4장 : 분쟁의 부당함. 세례문제. 교만. 몸을 더럽힘에 대한 문제 지적
5장 : 근친상간 간음방치에 대한 책망, 음행자 추방
6장 : 성도간의 송사에 대한 책망
7장 : 혼인, 독신생활, 이혼, 재혼
8장 : 우상 제물의 먹는 문제
9-10장 : 자유의 절제. 바울의 모범. 운동선수의 비유.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방종의 위험
11장 : 머리에 쓰는 문제. 성찬식 집전
12장 : 은사의 다양성 (diversity) 과 통일성 (unity). 몸과 지체의 비유
13장 : 최고의 은사 사랑
14장 : 예언과 방언
15장 : 부활
16장 : 예루살렘 성도 구제를 위한 연보와 문안
흔히 틀리는 우리말
Wednesday, October 7, 2009
빌립보서 4: 4-7
4절과 6-7 절 말씀은 너무나 친숙하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5절 말씀을 지나치기 쉽다. 그리스도가 가깝는 것은 공간적 가까움 혹은 시간적으로 임박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시간적인 임박함을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에 대한 신앙을 언제부터인가 이단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리스도의 다시오심… 깨어나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하는데… 너무 졸립고 아득하다. 재림. 이것은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영적인 기상나팔이며 주님의 히든카드다. 복음은 십자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포함하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구원의 소식이다.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온전히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복음의 과거시제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예수를 믿는 것은 십자가의 보혈과 대속, 성령,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믿는 것이다. 때가 찼다. 주 예수여 오소서!
Monday, October 5, 2009
기도하는 곳에는 향기가 있다
저자는 코에 땅냄새가 배어 있어 땅냄새를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코에 땅냄새가 배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인스탄트 식품등의 냄새에 익숙해져서 땅냄새를 모르는 것이다. 땅냄새를 맡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그 냄새를 안다. 나는 어떤 나라의 공항에 도착하면 택시를 기다리면서 깊은 호흡으로 그 나라의 독특한 냄새를 맡아본다.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부는 바람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가 있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그 냄새를 즐기면 그 여행은 즐겁다. 나는 신자들이 모이는 곳에도 냄새 비슷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 눈이 보이고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 모임에 있는 동안 내가 살아나고 행복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내가 원인 모를 그 무엇에 취해서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찬양이 훌륭하고 설교가 좋고 사람들의 열심이 특심인데도 그냥 시계만 보고 끝날 때만 기다려지는 모임도 있다. 반면, 찬양이 시작되기도 전에 들어서는 순간 은혜의 깊은 바다로 빠져들게 하는 모임도 있다. 기도하는 곳에는 향기가 있다...
Sunday, October 4, 2009
Thursday, October 1, 2009
빌립보서 4:8 - 4:13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말은 잘난척하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들리는 것은 자아의 틀안에 갖혀 자신의 유익에만 관심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격려가 되는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말씀도 마찬가지다. 자기 중심적으로 보면 오해하기 쉽상이다. 궁핍과 풍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형편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의 고백이다. 다스리소서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