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18, 2012

my existence

We often complain about the circumstances we face, but often forget that our mere existence itself is also part of the circumstances others face.

Wednesday, November 21, 2012

일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다. 일이 저주가 된 것은 범죄한 것 때문이다. 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씨리어스하기만하고 책임감에 짓눌려서 하는 노동은 저주일 것이다. 누구 말대로 죽어라 일하다 죽어버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니기 떄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책임있는 일을 맡게 된다. 시간이 모자라고 자다가도 슬그머니 일어나 일을 생각한다. 일의 결과가 가져다 주는 시장적 가치에 몰두하다 보면 일이 주는 기쁨과 감사를 쉽게 빼앗긴다. 우리의 육신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역전현상이다. 견고한 진은 다름아닌 모든 것을 콘트롤하면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생각임을 깨닫는다. 나가 하는 일에서 정오의 내리쬐는 태양아래의 그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Thursday, October 4, 2012

회복해야 할 복음

(Rome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래전에 묵상한 것을 다시 묵상한다.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것들 그리고 내 안에서 굳어져서 딱딱해진 것들이 새롭게 되어야 할 것들을 발견한다. 내가 밟는 땅, 만나는 사람들, 하는 일들, 이 모든 것들에게 예수님의 샬롬을 전하고 싶다. 그러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나자신 그리고 내가 한 일들은 싫어하고 거부하는 상황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억울한 대접을 받고 운이 좋지 못한 케이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말과 하는 일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들이 묻어나고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고 있음에도 양심적으로 더욱 수고하고 정성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스스로 잘못된 길에서 헤매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길을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시작은 은혜로 하였으나 실상은 옛언약 율법의 저주아래서 예수님의 샬롬을 잃어버리고 사는 모습이 이런 꼴이다.

예수님은 행위로 말하자면 죄를 짓지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마땅한 죄가 예수님의 죄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행위로 말하자면 우리는 의가 없지만 예수님에게 마땅한 의가 우리의 의가 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의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다. 그 의는 믿음으로 받는(receive) 선물이지 행위나 노력의 댓가로 얻는 (earn) 것이 아니다. 그 의를 가진 사람은 세상의 빛이다. 그는 숨겨지고 가려지는 않는다. 그가 밟는 땅, 만나는 사람들, 하는 일들에서 반드시 드러난다.

Thursday, August 16, 2012

신명기 9:1-6

1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2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아낙자손에 대한 두려움의 뿌리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바로 교만과 자기 의이다. 담대함으로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처방은 한결같다.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현재진행형으로 선물로 값없이 받는 것이다. 우리의 약함은 우리의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자랑과 감사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통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Tuesday, July 10, 2012

로마서 5:20 (은혜받을만한 최적의 때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But where sin abounded, grace did much more abound:

더욱 넘친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한 단어, ὑπερπερισσεύω (hyperperisseuō), 이다. "ὑπερ" 접두어는 super 혹은 hyper의 뜻이다. Thayer’s Lexicon 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1) to abound beyond measure, abound exceedingly 2) to overflow, to enjoy abundantly.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을 만한 가장 적합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자격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을 만한 가장 적절한 때는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자격없다고 여겨지는 그런 때이다.

Wednesday, June 13, 2012

로마서 7:21-8:1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은 어느 불신자의 고백이 아니다. 나이롱 신자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이 겪는 처절한 좌절이다. 죄의식과 정죄감은 하나님을 모를 때 보다 더욱 그를 괴롭힌다. 나는 예수를 믿는 것이 그런 것이라고 배웠고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유와 해방의 폭포수로 나아 가기 위한 내 안에 있는 음침한 골짜기이다. 진정한 신자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결코 정죄함 (condemnation)이 없다.

Tuesday, June 12, 2012

로마서 7:19-20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신자는 죄에 대하여 (6장) 그리고 율법에 대하여 (7장)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진 사람이다. 여전히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심판을 받았다. 그 존재의 권세에 매여 살 필요가 없다. 진정한 나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한 의인의 권세를 누리고 사는 자유인이다.

Friday, June 8, 2012

로마서 6:14-18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인간의 어떠한 결단도 죄 앞에 무력하다. 죄는 단순히 인간이 통제할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는 권세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죄에 대한 가르침은 “해라 하지 말아라” 하는 인간중심의 규범적이고 율법적인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은혜의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이 됨을 믿지 않으면 은혜아래 있으면 죄를 더 짓게 된다는 오류에 빠지며 또다시 생명력 없는 인간중심의 율법적 신앙의 함정에 갇히게 된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이제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너희를 지배 (dominion)하지 못한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의 통념은 여지없이 깨뜨린다. 믿음을 통하여 선물로 받는 하나님의 의.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Tuesday, June 5, 2012

로마서 5:17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비밀은)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For if by the transgression of the one, death reigned through the one, much more those who receive the abundance of grace and of the gift of righteousness will reign in life through the One, Jesus Christ.

로마서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고 들어왔던 메시지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나는 은혜를 말할 때 조심스러워진다. 은혜가 무절제하게 너무 많이 회자될까 봐서 살짝 걱정이신 분들도 많은 모양이다. 본문은 나와 그런 분들을 더욱 걱정스럽게 만든다. 은혜의 적절함이 아니라 은혜의 풍성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는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도 자격을 갖추고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는 것이다. 적절한 수준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분에 넘치는 풍성함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비밀은 무엇인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것이다. 신자는 은혜와 의의 선물의 무한리필을 받고 사는 사람이다.

Saturday, June 2, 2012

로마서 4:17-25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가 가진 믿음은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졌던 바로 그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믿음의 커트라인을 올려서 탈락자들을 양산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너희는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증거들을 보여라"라는 교훈을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가 전하는 은혜의 풍성함에 이르는데 결정적 방해꾼은 이런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믿는 스탠다드이다. 하나님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어쩔수 없이 믿어야 하는 그런 분도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자격없음에도 먼저) 내어 주시며 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Thursday, May 31, 2012

로마서 3:21-25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 이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이다. 그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얻는(to earn) 의가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이루신 것을 믿음을 통해 선물로 받는(to receive) 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쌍해서 봐주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댓가을 치루는 방법을 택하셨다. 
  • 속량 (redemption): ἀπολύτρωσις (apolytrōsis): 몸값 (ransom) 지불의 결과로 나타나는 구원, 해방, 자유를 뜻하며, 예수님이 대신 값을 치루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 화목제물 (propitiation): ἱλαστήριον (hilastērion): 이ἱλαστήριον라는 그리스어는 히브리서 9:5에서도 등장하는데 이것을 "mercyseat" 으로 번역해 놓고 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day of atonement ) 에 지성소에서 죄의 댓가로 받아야 하는 죽음을 뚯하는 피가 뿌려지는 언약괘의 덮개를 뜻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mercyseat 이며 더이상 인간의 편에서 드려지는 희생제물이 필요없게 되었다.

Tuesday, May 29, 2012

로마서 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선하지만 그 누구도 의롭게 하지 못한다. 인간의 육체로 이루어낸 어떠한 성과도 의롭게 하지 못한다. 나의 핏속에서 나의 DNA 안에서 나의 무의식에서 흘러 나오는 거부할 수 없는 탄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담이래로 인간은 자신을 증명하려는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 아래에 신음하는 존재이다. 신자는 이런 탄식과 신음을 기도와 찬송으로 바꾸는 비밀을 지닌 사람이다. 이런 존재적 혁명은 죄인이 의인이 될 때 일어난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가 지은--기억하지도 못하는-- 모든 죄는 점도 흠도 없이 완벽하게 드려진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에게 전가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완벽한 만족이신 예수님의 의를 선물로 받을 때 일어난다.

Monday, May 28, 2012

로마서 3:1-8


(3:8)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의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되고, 우리의 거짓됨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더하게 된다. 따라서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비방했다. 이런 오해는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지나치게 은혜를 강조하면 신자의 삶을 잘못된 길로 오도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에 관해 로마서는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Friday, May 25, 2012

신자의 확신은 (로마서 2장)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롬2:5)” 를 스스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율법을 가졌으나 실상은 이방인이나 다를 바 없는 유대인이나, 율법에 대한 지식이 없어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로마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좋은 분이시니 우리를 좀 봐주시겠지" 하는 그런 엉거주춤한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대충 눈감아주고 넘어가주는 그런 허술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믿음을 통해 신자가 선물로 받는 의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율법의 본래적 의미까지 완벽하게 만족시킨 하나님의 의" 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관한 스탠다드가 높으면 높을수록 신자의 확신은 더욱 더 커진다. 로마서, 이 편지의 시작은 이런 타협없는 하나님의 법의 기준을 제시하며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듯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신자는 더더욱 은혜의 풍성함과 구원의 확신으로 인도된다.

요즘 값싼 복음이라는 말이 오용되고 있다. 값싼 복음이 문제다 하면서 슬쩍 복음에 인간의 윤리를 끼워넣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복음을 훼손하는 일이며 "큰 기쁜 소식"을 "뭔가 불안한 소식"으로 변질시키는 일이다. 

Thursday, May 24, 2012

로마서 1:28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죄의 본질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 (retribution)은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서 내어버려지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가진 두려움의 뿌리이며 첫 아담의 저주아래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비극의 근원이다. 우리의 문제는 자신도 어쩔수 없는 죄의 증상들에 매여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복음은 피상에서 본질로 우리를 돌이킨다.

Tuesday, May 15, 2012

한국방문 휴유증

한국에 다녀왔다. 외국생활이 15년이 넘어가면서 한국에서 만나는 풍경들은 마치 이방인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점점 생소하고 멀어져간다. 허드러지게  봄꽃은 피었지만 잔가지에 남아있는 찬바람처럼 내마음은 시렸다. 언젠가는 돌아가야할, 그리워하는 고향과 같은 그곳을 잃어 버리고 온둣한 일종의 허전함 혹은 우울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Saturday, May 12, 2012

purpose-driven life vs. life-driven purpose

아코모다도르!
그것은 내가 즐기는 유일한 운동인
궁술을 연마할 때 경험한 것이다. 사범은 한 화살을
두번 쏠수 없으며, 활을 잘 쏘는 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과녁을 맞춘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릴 때까지, 우리 자신이 화살이 되고 활이 되고
목표점이 될 때까지 수백 수천 번을 다시 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의 에너지가 우리의 움직임을 이끌어,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활시위를
놓게 되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오 자히르》중에서 - 고도원의 아침편지


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읽으며 드는 생각이 있었다. 과녁을 맞추야 된다는 생각이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목표는 심리적 부담이 될 수 있고, 결정적일 때 과녁을 맞추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마치 축구선수가 골에 대한 부담을 가질 때 자칫 슬럼프에 빠지듯이... 골에 대한 집념을 가진 선수는 많다. 동네 축구에서도. 그러나 공과 하나가 되어 어울어지는 선수는 드물다.

위대한 목표를 세워놓고 사람들을 다그칠 일이 아닌 것 같다. 위대함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루어 내는 것이 바로 위대한 목표가 되는 것인데... 

들어야 할 가장 위대한 음성은

우리가 들어야 가장 위대한 음성은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3:17)” 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그런 자녀이다 (…He made us accepted in the Beloved, 1:6). 만일 내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버리는 충분한 믿음의 증거를 보이겠다" 고 생각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hero로 만들려는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다분히 나중심적인 결단을 반복해왔던 것 같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 (His beloved Son)을 다 버리신, 우리의 진정한 hero이신 아버지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Wednesday, May 2, 2012

은혜의 복음은

Ignorance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e Law and Gospel is one of the principle sources of all the abuses which corrupt and still corrupt Christianity.” –Theodore Beza. 

  • 율법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 (demand)이며, 은혜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공급하심 (supply) 이다.
  • 율법아래서 의는 노력으로 얻는 것이며 (to earn), 은혜아래서 의는 값없이 받는 것 (to receive)이다.
  • 율법의 관심은 하나님의 기준과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행위 (performance) 이고, 은혜의 관심은 하나님의 만족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미 이루신 일 (finished work)이다.
  • 율법아래의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 (rejection of God)하는 죄인이며, 은혜아래의 인간은 하나님에게 받아 들여진 (accepted by God) 의인이다.
  • 율법아래의 삶은 무거운 짐이며, 은혜아래의 삶은 안식이다.

Thursday, March 15, 2012

영적 갈등의 뿌리에

읽어볼 만한 글이 있어 아래에 옮깁니다. 그토록 부족하다고 외치는 거룩은 은혜를 통해서만 맺어지는 열매다. 그렇지 않은 거룩은 실상 거룩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며 들추어 보면 냄새나는 위선이 된다. 타협없는 은혜의 복음이 전해지는 계절을 기다리며...

새로운 율법주의- 박영돈 교수 / 고신대학교

은혜와 축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가르침이 한국교회 안에 윤리적인 나태와 방종을 조장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제는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가 점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은혜에 치중한 설교가 무율법적 혼란을 초래한다면, 윤리적 설교는 다른 극단,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은혜를거룩함의 열매를 반드시 생산하는 은혜 제시하지 못한 메시지가 한국교회에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다면,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풍성함을 밝혀주지 못하는 설교 또한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 많은 교인들은 도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율법적인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생명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교회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것은 현대교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필립얀시(Philp Yancey) 그의 베스트셀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개신교 안에 만연해 있는 고질적인 병폐인 무율법주의적 혼란보다 율법주의가 교묘하고 무섭게 은혜를 위협하는 요소라는 것을 탁월한 대중적인 필치로 설득력 있게 밝혀주었다. 개신교의 생명력을 시들게 하는 것은 값싼 은혜가 빚어낸 무율법적 혼란만이 아니다. 최근 기독교 상담과 내적 치유를 다루는 저명한 학자들은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율법주의적 신앙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것이 개신교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투르니에(Paul Tournier)가톨릭교도들보다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이러한 (도덕주의적, 행위주의적) 왜곡으로 억압당하는 사람의 비율이 크다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주의와 선행의 종교가 신교의 핵심으로 재진입하였다. 변화는 너무나 교묘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투르니에는 개신교 신자가 자신에게 들려준 의미심장한 말을 소개한다. “개신교는 은혜를 얻기 위해 엄청난 선행의 노력을 요구하는 같지만 가톨릭은 신부에게 구하면 누구에게든지 은혜를 자유롭게 나눠주는 같습니다.”

"상한 마음의 치유"라는 저서로 알려진 데이빗 씨맨즈도 이런 문제가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안고 있는 정서적 영적 갈등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는 신자들의 신앙이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은혜 중심에서 행위 중심으로 전환되어 간다고 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 시작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율법적 성향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는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바르게 행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들은하지만 시점부터는 하나님도 내가 적어도 어떤 수준의 삶을 수행해 내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분명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우리 노력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있고 행위로 간격을 메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씨맨즈의 지적과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성화 과정에서 사랑과 은혜를 실제 의지하고 누리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원받는 데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믿지만, 구원 신앙생활에서는 자신의 경건의 노력과 열심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내려는 고집스러운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 율법주의와 싸운 은혜의 투사 루터마져도 옛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하였다.나는 과거 20 동안 은혜의 메시지를 전해왔고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믿어왔지만, 지금도 내가 무엇인가를 공헌할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기를 원할 아니라 나의 거룩한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교환하려는 구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믿기가 여전히 힘들다

개신교 신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철저히 은혜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율법주의자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그것은 그들 머리 속의 지식보다 그들 안에 깊숙이 잠재해 있는 율법주의적 성향과 욕구가 은밀히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계속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감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경건의 노력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생활 속에 평안과 기쁨을 누림보다 오히려 가시지 않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시달린다. 그들은 모두 죄책에서의 자유함을 선언하는 칭의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실제 속에서는 병적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투루니에의 말과 같이일반적으로 그들은 이론적, 교리적 차원에서 죄사함을 믿고 있지만, 그것을 그들의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와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개신교 강단에서 전파되는 성화론이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적절한 처방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믿음과 행함, 은혜와 윤리를 적절하게 연결시키지 못한 엉성한 성화의 메시지가 신자 안의 율법적 성향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대한 불감증을 심화시킨다.

종교개혁 덕분으로 개신교 신자들은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으나, 성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율법주의의 족쇄에 매여 신음하게 같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자신 안의 율법주의적 성향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자가 되기 위해 그는 끊임없는 고행과 금욕으로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그럴수록 자신 안에 번민과 두려움과 좌절만이 깊어가는 영적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러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려는 헛된 수고에서 벗어났다.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가 대신 치른 영적 홍역 덕분에 곤욕을 되풀이하지 않고 무사히 칭의의 관문을 통과하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율법주의의 망혼이 이제 성화의 과정에서 다시 살아나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종교개혁이 칭의의 복음을 밝혀준 공헌을 남겼다면, 지금 우리는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거스르는 신율법주의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있는 성화의 복음을 분명히 제시해야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