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2, 2011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했던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이 다시 복음을 전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금하여 이런저런 강해서와 설교를 참고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솔직히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동안 이런저런 사역을 해오면서 나는 나의 사역의 대상자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어야 한다는 그런 부담이 늘 있었다. 돌이켜 보건데 나의 사역에 가장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자신이라는 것이다. 날마다 은혜의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은 불신자이기 이전에 신자이다.

Thursday, December 1, 2011

IQ도 변한다

Many people think of IQ as a genetic trait, like brown eyes or short legs: You're born with it and you're stuck with it. Now, a growing body of research is showing that a person's IQ can rise—and even fall—over the years.--Wall Street Journal 많은 사람들이 IQ가 유전적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구 결과 IQ는 세월이 지나며 오르거나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월스트리트 저널

Thursday, November 24, 2011

감사의 과학


출처: 중앙일보--"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카전서 5장 18절)"는 성경 대목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일반인인에게 많이 음송된다. 그런데 여기에 과학적 논리가 숨어있었다. 종교에 무슨 과학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를 미국 심리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감사의 과학적 변화를 확인했다.

연구 요지는 감사하면 뇌 좌측의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해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고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reset(재설정)`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설명했다. 감사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는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재확인한 것이다.

미국 마이애미대 심리학 교수 마이클 맥클로우는 "잠깐 멈춰서서 우리에게 주어진 감사함을 생각해보는 순간 당신의 감정시스템은 이미 두려움에서 탈출해 아주 좋은 상태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승리에 도취된 감정을 느낄 때와 유사한 감정의 선순환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감사하는 게 좋을까. 왜 감사한지를 생각하고, 꼽아보고, 음미하는 게 효과적이다. 감사가 가지는 힘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는 것. 미국 시카고에서 심리클리닉을 운영하는 심리학자이자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르얀 트로이아니는 환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불만을 제한하고 감사함을 더 표현하게 하면서 효과를 봤다. 그는 "감사일기나 공책은 중요한 치유의 도구가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UC데이비스의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에몬스는 실험을 통해 "감사하는 사람은 훨씬 살아있고, 경각심을 가지며 매사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더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감사의 과학』이란 책을 2권 집필하고 감사일기의 효과에 대한 연구발표를 내놓기도 했다. 그는 "생리학적으로 감사는 스트레스 완화제로 분노나, 화, 후회 등 불편한 감정들을 덜 느끼게 한다"고 했다.

에몬스는 12살에서 80살 사이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그룹에는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쓰도록 하고, 또 다른 그룹들에는 그냥 아무 사건이나 적도록 했다. 한달 후 중대한 차이가 발생했다. 감사 일기를 쓴 사람 중 4분의 3은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고, 수면이나 일, 운동 등에서 더 좋은 성과를 냈다. 그저 감사했을 뿐인데 뇌의 화학구조와 호르몬이 변하고 신경전달물질들이 바뀐 것이다.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 사랑과 공감 같은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뇌 좌측의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Thursday, November 17, 2011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다

(Rome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 (the forgiveness of sin), 은혜의 풍성함 (the abundance of grace) 그리고 칭의의 선물 (the gift of righteousness) 을 받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receive) 선물이지 행위나 노력의 댓가로 얻는 (earn)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구원을 삶의 여정에 따라 처음과 끝이 다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개신교의 영성을 중세 카톨릭의 영성으로 되돌리는 위험한 일이다. 복음은 처음의 구원과 나중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달라지는 우리를 옭아매는 그런 소식이 아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바로 그 구원이다. 우리의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undeserved favor 에 대한 thanksgiving 의 표현이며 구원을 얻는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Wednesday, November 16, 2011

회개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metanoia) 이다. 이것은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속사람의 변화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에 연연해서 억지로 되는 Outside-in 변화가 아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아내도 인정하는 Inside-out 의 변화이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면 우리의 몸을 흐르는 전기적 파장이 바뀐다. 그러면 세포안의 DNA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회개는 얼핏 관념적인 것 같지만 너무나 실제적 사건으로 드러난다.

믿음을 낳는 메시지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믿음은 메시지를 들음에서 난다.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심각한 오해가 있다. 그 메시지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면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자유케하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 본문을 보면 들음은 분명히 the word of God 이 아니라 the word of Christ 로 말미암는다고 되어있다. 그리스도가 계시되지 않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불평하는 일은 그만두자. 

Monday, November 14, 2011

토라는 주님을 계시한다-부자청년 vs 삭개오

토라는 결국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이고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데 너무나 유익한 시청각 자료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이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을 넘어서 신자개인의 삶으로 향하는 것--이를테면 옛언약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신자의 성화에 유익한 것으로 보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음이 주는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종의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다 (아래의 성경말씀을 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의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나고 오순절에 시내산에서 10계명을 받았지만 신약의 믿는자들에게는 오순절 성령님이 부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의 원뜻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완성하신 예수님. 그 분은 죄인들과 세리 창기들의 친구였다. 누구보다 계명을 열심히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부자청년 (계명의 우등생) 에게는 한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시면서 (눅18장) 누가 보아도 죄인인 삭개오 (계명의 열등생) 의 집에 머무시면서 구원이 이집에 임하였다고 하신다 (눅 19장).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Rome 7:10-11)"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전 3:6)"

Saturday, November 5, 2011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한다죄가 되는 기준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을 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주신 율법의 오리지날이 훼손되지 않은 pristine 한 기준을 말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죄의 지배 dominion 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한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죄는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 안에 "guilt"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욱 괴로운 것은 도덕적으로 못된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한 율법이 나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신자의 삶이 불신자들의 것과 다른 것이 과연 "이전보다 혹은 다른 사람보다 죄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 하는 것"에 있는가? 우리의 죄를 더욱 묵상하게 하는 가르침이 과연 성경적인가? 이런 착각이 얼마나 흔하게 발견되는지 모른다. 그런 가르침은 우리 안에 우리를 옭아매는 견고한 진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케하는 복음이 아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 (두나미스)을 빼앗고, 인생의 더욱 무거운 짐을 다시 지우는 결과적으로 이적행위가 될 수 있다. 믿는 자는 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Rome 6: (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4-15)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Rome 7: (1-4)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9-10)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Rome 8: (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Tuesday, November 1, 2011

웃음이 없는 강단

나는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 가르치는 일은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것 이상으로 다차원적인 활동을 동반하게 되며 보이지 않는 영적교류가 일어난다. 어떤 날은 내면의 기쁨은 사라지고 서운함과 분노가 지배한다. 도대체 나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가치있게 여기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들 때 그렇다. 이것은 교육의 내용과 상관없이 잘못된 선생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단에서 한번도 웃음을 보이지 않는다. 시종일관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다. 사람들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가르침에 묘한 쾌감을 느끼며 동감하며 화답한다. 웃음을 잃어버린 선생… 그는 우울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이다. 그에게 감염된 사람들이 그를 추켜 세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결코 좋은 리더가 아니다.

Friday, October 21, 2011

은혜에 관한 오해

은혜 (unmerited, undeserved favor of God) 에 관한 여러가지 오해 중에서 아마도 가장 흔하고 가장 심각한 것은 은혜는 (은혜를 강조하면) 신자들을 쉽게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다정반대이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온전함을 입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은혜는 눈에 보이는 증상만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한다. 따라서 은혜는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를 죄가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한다. 은혜를 묵상하면 할수록 완전한 용서를 받은 자로 더 용서하고, 조건없는 사랑을 받은 자로 더 사랑하게 된다.

(롬 6:14-15)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Wednesday, October 19, 2011

Why Your DNA Isn't Your Destiny?

이제는 부모 탓할 것 없다. 유전자는 변할 수 있고 뱃속에 있는 자식에게 좋은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다.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1952313,00.html

Tuesday, October 18, 2011

지루함의 미학

인텔의 문화인류학자 제네비브 벨 박사: "현대인들은 지루할 틈이 없어졌고, 그 대신 넘쳐나는 일로 과부하가 걸려 있다.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에 뇌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결국 지루함은 한없이 매력적인 주제이며 우리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다" (동아일보)

Thursday, October 13, 2011

등교길의 시인

감나무 너머의 하늘
마음은 오늘 가을을 보았다.
된장찌게를 사랑하는
속에 흐르는 묵은 디엔에이
보다 오래된 태고 (太古).
심비에 새겨진 아름다움
가을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적도에서 꺼내보다.

Saturday, October 8, 2011

안전한 믿음?


(조선일보 2011.10.8)  "우리 몸에서 암세포를 잡아먹는 대표적인 면역세포가 '자연 살해(殺害)세포' (NK·Natural Killer Cell). 이게 많으면 치료가 되고 암에도 걸리지 않는다.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세포의 수치를 조사했더니, 항상 웃고 즐겁게 사는 사람에서 수치가 높게 나타났다. 교회 성가대 찬양대원들은 일반인보다 수치가 1000 높게 나와, 나도 놀란 적이 있다. 기쁨 속에서 노래하고, 감사 기도하고, 인생을 밝게 사는 사람이 암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것이다. 이는 이제 의학계에서 정설이 됐다. 어느 종교를 믿건, '찬양대원의 NK 세포 천배'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가길 바란다." (데살로니가전서 5: 16-18) 항상 기뻐하라쉬지 말고 기도하라범사에 감사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인간은 결코 물질적 존재가 아니다. 영적인 존재이다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실제적이고 현재적 사건이다. 우리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을 예수님의 재림과 천년왕국 이후의 사건으로 미루는 것은 신학적으로 안전한 믿음일지는 몰라도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실제적이고 모험을 동반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다.

Tuesday, September 27, 2011

복음과 편견

강단에서 예수의 피흘리심을 원색적(?)으로 전하는 것은 사람들을 거북하게 할까? 이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변명이고 편견이지 진리가 아니다. 정반대로 신자들을 깊은 평안과 기쁨으로 인도한다. 우리의 죄사함의 근거를 멋있게 들리고 그럴듯하고 좀 덜 거북한 다른 것으로 포장하려는 시도는 모두 엉터리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쁜 소식을 뭔가 불안한 소식으로 변질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대충 봐주셔서 디스카운트 해주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에누리 없이 값을 치루셨다. 우리가 얻는 죄사함은 어정쩡하거나 뭔가 찜찜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빚진 사람처럼 속고 살아 가는가? "It is finished..."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안식을 누리게 된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복음에 목말라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Tuesday, September 6, 2011

육신 vs 은혜

(마 11: 26)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종교는 인간에게 결국은 무거운 짐이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를 확실히 그렇게 보셨다. 우리의 육신은 언제나 은혜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어떤 괴로움과 역경을 통해 자신의 헌신과 믿음의 경지를 검증해줄 객관적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절차를 밟아야만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미니스트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믿음으로 받고 그분의 다스림에 참예하는 은혜의 삶이요 안식의 삶이다.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Saturday, August 27, 2011

영생을 사는 비밀-달라스 윌라드 설교중

Sermon by Dallas Willard at Global Mission Church in Korea-Teaching of Jesus gives ways of lining up with Kingdom of God. When you obey His commandment, your life runs with His Kingdom.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Then everything else you need will be added. You find Kingdom and Kingdom finds you. Lord is shepherd and I shall not want or lack.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it’s in His son. We appropriate it by staying with Jesus. He is our Savior, our Lord and our teacher. He knows about everything I involved in work; Teaching classes, dealing with students, writing books. He helps me do those things if I expect Him to. That’s where faith comes in. Faith makes us trust and rely on the presence of God and our life becomes supernatural. Not because of we deserve it, it is not our righteousness, it is grace of God. Grace is God acting in my life to accomplish what I can’t accomplish on my own. For the surrendered persons, grace accompanies everything they do. So we can be sure that everything in our life that is precious and good will be preserved in the life of God.


(잠언3: 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Proverbs 3:5-6)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Friday, August 19, 2011

에스더 3:1 - 3:4

3: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2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3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4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유대인으로서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것은 모르드개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인 배후를 알지 못하면 그는 그저 자존심이 강한 사람 정도로 오해하기 쉽다. 그가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하만이 아각 사람 바로 하나님의 백성 유다의 원수인 아말렉 족속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에스더의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모르드개에게 배운 것이 었다.

Tuesday, August 16, 2011

종교와 복음의 차이 - Tim Keller

RELIGION: I obey, therefore I am accepted by God. THE GOSPEL: I am accepted through the costly grace of God, therefore I obey.

Saturday, July 23, 2011

목사님 복음을 전하세요

00 목사님께. 오랜만입니다. 얼마전에 저희들의 사역을 내려놓고 현지인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사역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희 나름의 안식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목사님과도 여전히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때가 되었기에 결단을 하였고 지금은 주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한인교회들을 섬기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나에게 젖어있는 습관들과 신앙의 틀, 이런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는 어깨의 힘을 빼고 사역중심의 신앙에서 예수중심의 신앙으로 옮겨 가고자 합니다. 아내는 정말 오랜만에 자유함과 기쁨을 회복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어요.

어제 한국에서 손님이 왔었어요. 직장에서 잘못한 것 때문에 사람이 완전히 풀이 죽은 죄인의 모습이 되었더군요. 지난 2년간 회개하라는 주위의 믿음좋은 사람들과 목사님들의 말씀에 너무 무거운 인생을 짐을 지고, 여전히 그 죄의 영향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어요. 한국은 이런 문제들이 여기저기 터지면서 목사님들은 말씀에 더욱 신앙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추세인 것 같아요. 저는 이것이 잘못된 방향이라고 믿거든요... 제가 평신도로서 목사님들에게 한가지 드리고 싶은 조언은 이럴 때일수록 제발 복음을 원색적이고 우선적으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 복음의 실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멋있는 헬라철학으로 너무 신앙을 관념화하고 있어요. 복음의 능력은 어두움에 묶였던 것에서 자유함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거든요. 헬라어 원문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박식한 친구이지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늘 죄송한 아들,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지 못해 아버지 앞에 늘 면목없는 아들, 공중기도는 유창하지만 개인기도의 절반은 한숨을 쏟아내는 아들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아들로 나를 받아 주시는 아버지를 소개하고 싶어요. 이시대에 깨어있는 영성으로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Tuesday, July 12, 2011

행 19:1 - 19:3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소아시아의 상업 중심지, 아데미 전각이 있던 우상숭배의 도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에서 비로소 에베소에 도착한다. 에베소 교인들은 아직도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고 요한의 회개의 세례에 머물러 있었다. 나에게 이것은 그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나또한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회개하고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메시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죽어버린 나, 주님과 영광스럽게 부활한 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주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는 나, 주님을 다시오심을 사모하는 나를 주님안에서 발견할 때까지...

Saturday, July 9, 2011

삶을 바꾸는 감사의 언어

믿는 자에게 감사의 언어가 바뀐다. FROM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O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다른 감사의 언어는 삶을 혁명적으로 바꾼다.

Saturday, July 2, 2011

달라스 윌라드 박사 인터뷰

[미션라이프] (중략) 윌라드 박사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Here and Now) 있는 어떤 실체다. 지금 여기서 제자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제자가 누리는 천국의 삶이라는 것이다.

“영원이란 장차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먼 훗날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지요. 지금 여기가 바로 영원입니다. 모든 시간은 영원 안에서 각기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윌라드 박사는 목사는 자신이 속한 도시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그 행복의 이유를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공을 어떻게 풀이할까.

“크리스천들에게 성공은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공입니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마음의 혁신을 이뤄야 합니다. 그 혁신은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돌아서야 합니다. 자기를 찢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성공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거룩함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Friday, July 1, 2011

행 10: 25-26

(행 10: 25-26)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기도와 찬송은 사람의 매인 것을 풀고 자유케 하는 능력이다.

Thursday, June 30, 2011

Secret of Greatness- 위대함의 비밀

"... the striking, liberating news is that greatness isn't reserved for a preordained few. It is available to you and to everyone." For further detail, read the article titled "What it takes to be great."

A video worth watching

인간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는 사람을 하나의 물질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세포중 하나인 유전자가 우리의 몸을 제어하는 "블루프린트" 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컴퓨터의 하드웨어들을 제어하는 일종의 스프트웨어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흔한 얘기로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받았다"고 한다. 일견 옳은 얘기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유전자는 어떤 바꿀수 없는 고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신호체계에 문제가 발생하면 병이 난다. 유전자에 정상적으로 불을 켜 주는 것은 어떤 영적 정신적 파장이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는 영적존재이다.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는 살아난다. 이것은 그 어떤 훈련과정을 수료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을 Input-Output 이라는 물질적, 기계론적 관점으로 보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의 마음 (heart) 을 새롭게 하는 것, 내 안에 있던 옛 프로그램을 지우고 하늘의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는 것이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Do not confi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http://www.2011tappingworldsummit.com/VideoSeries/?page_id=60&blog_prm=6465

Tuesday, June 28, 2011

노암 헨드렌- 이스라엘은 지금 영적 추수기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은정 기자-- 이스라엘 유일의 공인 기독교 대학인 이스라엘 성서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노암 핸드렌(57) 교수는 최근 기자와 만나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미 있는 변화를 소개하며 “이스라엘에서 영적 부흥이 이어질 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호소했다.

최근 이스라엘 선교회 세미나 인도 차 내한한 노암 교수는 현지 기독교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국립 복음전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고 있으며 교회연합 회장을 역임했다. 대학 교단에 서기 전에는 14년간 현지 교회를 담임했다. 미국 태생인 노암 교수는 유대인 아내를 만나 이스라엘에서 두 딸을 낳았다. 가족 모두는 이스라엘 군복무를 마쳤다.

노암 교수에 따르면 현재 이스라엘 민족 711만 명 가운데 ‘메시아닉주’는 1만5000명으로 집계된다. 0.002%로 참혹한 비율이지만 기독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노암 교수의 설명이다. 15년 전 수 십 개에 불과했던 교회도 현재 200여개로 늘어났다고 했다. 군대에서 예수를 섬기는 청년도 지난 3~4년 동안 수백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상전도도 과거보다 훨씬 수월해졌다고 노암 교수는 전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들이 이스라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습니다. 대외적 정세도 한몫 하고 있습니다. 우방인 미국이 등을 돌리면서 이스라엘은 고립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댈 곳을 찾고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처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노암 교수는 한국교회의 세밀한 기도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항목 별로 깊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도 제목은 3가지로 정리됐다. 먼저 군대에 있는 젊은 크리스천들의 영적 각성을 위해서다. 이스라엘에서 남자는 3년 여성은 2년간 복무해야한다. 살생과 살육이 횡행한 군대에서 신앙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노암 교수는 “영적으로 타락할 수 있는 시기에 복음을 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특히 누구나 가야하는 군대이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에 나갔을 때 ‘복음화의 핵심’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는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다. 교계 지도자의 80%이상이 신학 훈련을 받지 못했다. 제대로 된 말씀과 복음이 심어지기 위해 지도자 교육은 필수다. 세 번째는 전도를 불법화하려는 움직임을 막기위해서다. 노암교수는 “지금까지 공개 전도는 합법이지만 현재 국회에 전도를 불법화하려는 법안이 제출돼 있다”며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선교사들이 믿음을 전하다 감옥이 가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암 교수는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사랑과 열린 마음을 갖고 유대인과 교류하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거라고 확신했다. 현지에 선교를 가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만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Tuesday, June 21, 2011

혈압관리를 위한 팁

혈압관리의 핵심은 혈액순환이며 특히 모세혈관에서의 혈액순환이다. 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생활습관은 다음과 같다.

1. 물을 많이 마신다
2. 고기를 줄이고 현미와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한다
3. 스트레칭과 운동
4. 말씀묵상과 기도

Saturday, June 18, 2011

Seven Deadly Sins - Gandhi

1. 원칙없는 정치 (Politics without Principle)
2. 노동없는 치부 (Wealth without Work)
3. 양심없는 향락 (Pleasure without Conscience)
4. 품성없는 지식 (Knowledge without Character)
5. 도의없는 상업 (Commerse without Moral)
6. 인간성없는 과학 (Science without Humanity)
7. 희생없는 종교 (Religion without Sacrefice)


죄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이것은 현실과 거리가 먼 무슨 형이상학적 명제가 아니라 실제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말씀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다. 그 분을 믿는 자는 죄로 인한 어떠한 부채도 없는 자유인이며, 그 분의 통치에 즐거움으로 참예하는 자이다. 죄가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실제이듯, 예수 안에서 살아나는 것 또한 실제이다. 바이러스를 먹은 컴퓨터가 프로그램이 치료되어 살아나듯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들이 치유되고 살아나는 그런 실제이다.

Friday, June 10, 2011

행 11:16-18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부어지는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율법과 전통에 매이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그 어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도 구원과 성령은 그들의 혈통이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자격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처음부터 교회는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몸을 이루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교회의 회복은 바로 이 한몸의 회복을 의미한다.

Tuesday, May 24, 2011

사람이 문제다 - 김영봉 목사

“사람이 문제다”(We Are the Problem)
--창세기 3:1-7; 로마서 12:1-2


1.
2011년 5월 1일, 오바마 대통령은 알 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201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이 서방 세계와 함께 벌여 온 ‘테러와의 전쟁’에서 아주 의미 있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뉴스를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전한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식에 많은 미국 국민들이 백악관 주변에 몰려들어 “USA! USA!”를 외치며 자축했습니다. 반면, 알 카에다와 그들에게 동조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이 소식은 재앙과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빈 라덴의 살해 소식을 전하면서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했는데, 알 카에다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정의를 위해 죽기까지 싸우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을 김구 선생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김구 선생은 일본인들에게 테러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가 일으킨 테러의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빈 라덴과 김구 선생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Kite Runner)에 보면, 알 카에다가 얼마나 무자비한 살육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방 세계에 대한 ‘지하드’(Jihad) 즉 ‘거룩한 전쟁’ 혹은 ‘정의로운 전쟁’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조직되었지만, 자신들의 권력과 명분을 위해 무슬림들조차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살육해 왔습니다. 그 잔인성이 <연을 쫓는 아이>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반면, 김구 선생은 동족만이 아니라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을 사랑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그분의 박애 정신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 시민들도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분은 단지 불의한 권력자들만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분은 폭력의 사용을 원치 않았습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그 정신과 도덕성에 있어서 빈 라덴은 김구 선생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서 김구 선생을 두둔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겠지만, 누가 보더라도 온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와 동일한 판단을 할 것입니다.

빈 라덴의 경우와 김구 선생의 경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정의가 서로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 알 카에다가 생각하는 정의는 미국과 서방 세계에 불의입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정의는 알 카에다가 보기에 불의입니다. 김구 선생이 생각하는 정의가 일본 정부에게는 불의로 보였고, 일본 정부가 생각하는 정의는 김구 선생과 한국인들에게는 불의로 보였습니다. 영어 속담에 “누군가의 손해는 다른 누군가의 이익이다.”(Somebody's loss is somebody's gain.)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누군가의 정의는 누군가의 불의다.”라고 바꾸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정의에 대해 여러 가지의 질문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정의로운 일은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할까?” “그런 정의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과연 우리에게는 그 같은 정의를 실천할 능력이 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선뜻 “그럼요. 가능하죠.”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2.
살다 보면, 정의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만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는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꼴통’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공부 못하는 사람을 부르는 욕설이었는데, 요즈음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믿는 바가 절대적인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꼴통’이 ‘말썽꾸러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믿는 바가 절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말썽꾸러기입니다.

2010년 여름, 9/11을 기념하여 이슬람교 경전을 불태우겠다고 해서 문제를 일으킨 테리 존스(Terry Jones) 목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 때,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서 만류했고, 존스 목사는 결국 물러섰습니다. 하지만 2011년 3월 20일, 존스 목사는 결국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불태웠습니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자극 받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유엔 사무소에 테러를 일으켜 여러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켰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테리 목사는 옳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에 그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자신은 옳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극단적인 경우입니다만, 우리 주변에서 이처럼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닌데, 본인들은 착각하고 있음을 모릅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도 그렇고,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싶은 문제가 나오면 얼굴을 붉히면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자신의 의견과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싸울 듯이 흥분합니다. 그래서 말썽이 생깁니다.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나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자신의 정의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경향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납니다. 소위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청년 시절부터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일보다는 다른 사람의 불의를 캐내고 고발하고 투쟁하는 일에 더 많은 정열을 쏟은 까닭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은 정의롭고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정의롭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까이 아는 사람이 한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벤처 기업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몇 해 전에 그 회사로부터 스카웃을 받고 이직했는데, 지난 2월 한국 방문 때 아주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회사의 창업자와 간부들은 대학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회사보다도 더 정의로울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곧 실망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의를 위해 투쟁했던 그들이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의로울 줄 알았는데, 실은 때로 더 불의하고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현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은 언제나 정의롭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고, 자신들이 하는 모든 행위를 기가 막히는 논리로써 정의로 미화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일 년에 두 세 차례 외부 집회에 다녀옵니다. 그럴 때 가끔 정의감이 특심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은 강사인 제게 자신이 속한 교회의 문제점들을 털어 놓으면서 조언을 구합니다. 처음에는 그분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배우자에게도,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제게 쏟아놓는 비판의 말들은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소외감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좋아하지만, 정작 아집과 모순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말썽꾸러기가 되었는데, 본인은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정의감이 없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정의감이 지나친 사람들 문제가 생길 때가 더 많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믿는 바를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며 고집을 피우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자신의 주장을 절대화시키고 고집불통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은폐하고 싶은 열등감이 있거나, 과거에 심하게 무시당한 경험이 있거나, 그와 유사한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3.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진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고, 무엇이 옳은지 알더라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삼척동자가 보아도 명명백백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정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인생살이 경험만을 가지고도 그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너무도 자주, 나의 정의가 다른 사람에게 불의가 됩니다.

성경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줍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맡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 2:16-17)

지난 수 천 년 동안 수많은 종교적인 천재들이 선악과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는지? 왜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지?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가 곧 그 명령에 불복종하게 될 것을 예측하지 못하셨는지? 이처럼 풀기 어려운 질문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하며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그분과 하나가 될 때, 그분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 넘어 들어옵니다.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우리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행하면 그것이 곧 진리가 되고 정의가 되며 사랑이 됩니다. 보통 이것을 ‘순종’(obedience)이라고 부릅니다만, 적당한 단어가 아닙니다. 순종 혹은 복종이라는 말은 뭔가 억지로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고안된 것은 억지로 하는 ‘순종의 삶’(life of obedience)이 아니었습니다. ‘동화의 삶’(life of union)이 원래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살아 선과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화되어 살아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을 하면서 사탄이 하와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 3:5)

사탄이 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협한 시각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의의 이름으로 서로 충돌하여 온갖 비극이 일어날 것을 내다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이 진실을 왜곡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속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기보다는 독립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아 보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과 분리되어 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그 능력은 더욱 심하게 손상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나 혹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인류와 우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물질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영적 세계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조건 중에서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것은 기껏해야 나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게만 유익한 것이며,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조건에서만 옳은 것이며, 당장에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정의는 다른 사람에게 불의가 될 수 있고, 가까운 장래에 재앙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보실 때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믿는 것을 절대 옳다고 고집을 부리고 살아갑니다.

4.
바로 이런 까닭에 정의로운 삶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말하면서 바울 사도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서로 대조 되는 두 단어 즉 ‘수스케마티조마이’(suschematizomai)와 ‘메타모르포마이’(metamorphomai)를 붙여놓았습니다. 많은 영어 번역 성경들은 이 두 단어를 con-form과 trans-form으로 번역하여 원문의 뉘앙스를 전하고 있습니다. 숭실대의 권연경 교수는 우리말로 이 대조를 잘 담아냈습니다.

이 세대와 ‘동형’이 되지 말고, ‘변형’되라.

이 말씀에 따르면,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무신론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행동 양식이 이 세상에 틀에 찍히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새로워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상태 그대로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안다 해도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변화를 받으라.”는 표현입니다. 헬라어 ‘메타모르포마이’는 그 사람의 근본적인 성격이 변화하는 것, 즉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태로 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번역하면서 “변화하라.”고 하지 않고 “변화를 받으라.”고 한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결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지’(will power)까지도 타락해 있기 때문에 작심삼일 혹은 작심삼주가 되어 버립니다.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누스’(nous)는 우리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투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내면’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마다, 사람마다 그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 다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누스’라는 말로써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그 내면의 영역이 새로워져야만 우리는 비로소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그 내면의 영역이 새로워지려면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신이 되어 살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에 인간의 내면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져 있지만, 실은 판단하고 이해하고 질문하고 결론짓는 모든 과정이 한계와 오류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 결과, 인류의 역사는 정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불의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정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갈등과 싸움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가 그 같은 오류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듯이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듣고 있는지 모릅니다.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신이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참된 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선악과를 따 먹은 원죄로부터 치유 받고 우리의 내면은 혼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 우리의 내면이 그분의 정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파악하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결론짓는 모든 과정을 통해 의와 선이 이루어집니다. 그 때에만, 우리는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5.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옳은 것을 판단하는 방법으로서 제안된 이론들을 소개합니다. 샌델에 의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행복해지는 것이 정의라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liberalism), 그리고 각 행동에는 고유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선택이 가장 옳은 것이라는 입장(teleological justice) 등이 있습니다. 샌델 교수는 이 이론들의 약점들을 지적하면서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라는 입장을 옹호합니다. 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책임을 가지며, 그 관계 속에서 옳은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만일 이 네 가지의 이론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의 전부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설문지를 돌려 조사(survey)를 해 보면 입장이 다 각각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물을 것입니다. “이 넷 중에서 기독교는 어느 입장에 가장 가깝습니까?” 반드시 물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을 논하기에 앞서, 기독교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사람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판단하고 선택하는 사람 자신에게 그 같은 판단과 선택의 능력이 없다면, 방법과 이론을 두고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동안에 쏟아져 나온 정의에 관한 탁월한 이론에 공통적으로 빠져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이 정의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가 정의를 알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정의를 아는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정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그 반대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복음에 담긴 두 번째의 불편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정의를 알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와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엡 4:18-19)

혹시, 이 말씀을 들으며 ‘나는 아니야.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닐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내면이 어두워지고 완고해졌습니다. 지난 주, 예배를 마친 후, 한 교우께서 제게 귓속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참 불의한 사람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저와 여러분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 다 그렇게 고백해야 옳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지 않고는 제 아무리 샌델의 책을 섭렵하고 윤리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쌓는다 해도, 정의로울 수도 없고 정의를 행할 수도 없습니다.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움을 얻는 것뿐입니다. 정의를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과 하나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정의롭게 되기를 결심하고 주먹을 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기대어 주먹을 펴고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자신의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희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말씀에 이어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엡 4:21-24)

6.
부족하지만, 저는 그동안의 신앙생활을 통해 이 진실을 확인하곤 합니다. 제 내면이 주님에게 깊이 조율되어 있으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하게 되고, 굳이 따지지 않아도 정의를 행하게 됩니다. 반면, 주님과의 사귐이 부실해지면 애써서 노력해야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도 자주 이기적인 사랑이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과의 하나 됨이 부실해질 때면,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고, 그렇게 하여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 해도 그것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과 일치되는 만큼 사랑과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이 강해지고, 일치됨이 떨어질수록 그 열망이 약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며, 매일 회개하고, 매일 항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의롭기를 바라십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꼴통’이 아니라, 고집불통의 사고뭉치가 아니라, 겸손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정의를 행하며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정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셔야 합니다. 정의에 관한 복잡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기 전, 진리와 정의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더욱 기도하고 예배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겸손한 소망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참된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 안에서 정의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먼저 우리 자신이 참된 자유와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를 통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축복’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만든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누릴 때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을 때입니다.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가 사는 모든 사회 안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 정의의 원천이신 주님,
저희의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께 항복하게 하소서.
정의의 투사가 되려는 헛된 열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의지하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저희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어
세상에 대해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