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28, 2010

미국교회의 변화?

아래 기사는 "미국교회의 6가지 변화" 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싣고 있다. 이것은 미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기반은 취약해지는 반면 눈에 보이는 사업들에 열을 올리는 것이 큰 흐름의 핵심이다. 이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알지만 이것을 돌이키기에는 지금이 그리고 여기가 너무 좋고 할일이 많은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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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독교 관련 전문리서치 기관인 바나그룹은 자신들이 올 한 해 동안 실시한 5천여 설문조사들을 분석, 미국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변화 6가지’를 최근 발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뉴스미션

1. 성경에 관해 점점 더 무지해지고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도 보편적인 진리들에 대해 점점 무지해져 가고 있다. 조사결과 부활절이 기독교의 절기인 것은 알지만 어떤 절기인지 아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성령을 살아계신 삼위의 한분으로 알지 않고 ‘하나님 임재나 능력의 상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 등이 이러한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저들만의 리그가 돼 가고 있어: 핸드폰, 스마트폰, 트위터 등과 같이 즉각적이고도, 원거리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비기독교인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조사 결과 교회 행사에 지인을 초대할 생각이 있다고 밝힌 응답자가 1/3도 안 됐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인이나 교회들이 행한 사회적 공헌에 과거보다 덜 감동받으며, 비기독교인들에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이 줄어 든 것으로 나타났다.

3. ‘영적 원리들’ 보다 ‘실제적 삶에 도움이 되는 원리’에 더 관심 가져: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를 묻는 질문에 10대들은 교육ㆍ경력 쌓기ㆍ우정ㆍ여행 등을, 성인들은 삶의 안락ㆍ성공ㆍ개인적 성취 등을 꼽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신앙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러한 인생의 성취 목표들보다는 덜 중요해져 가고 있다. 조사결과 많은 이들은 영원의 삶에 대한 보장보다는 현재에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4. 지역사회 봉사에 관심을 갖는 기독교인 수 늘고 있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봉사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이 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 정의와 봉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자극과 도전을 주기도 하지만 영적인 기반이 없으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단순히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일이기에 하는 봉사가 아닌 순수한 기독교의 사랑에 의한 봉사가 되도록 교회가 성경적인 관점을 제공해야 한다.

5.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용’이 만연되고 있어: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영적 자신감의 부재로 인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불확실한 행동들과 사상들이 교회에 쉽게 허용되고 있다. 조사결과 교회가 교리로서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 삶의 덕복들은 점점 줄고 있다. 일례로 사랑이라는 것은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로 정의되고 있다. 즉 성경에 씌어진 그대로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따라 사는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수는 매우 적다.

6. 문화와 개인의 삶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 사라져: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삶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어떻게 일치하느냐를 보면서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결정짓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은 문화적 영향력의 원천이 될 만큼 충분한 결실을 맺고 있지 못하다. 그 어느 종교나 철학, 사상보다도 미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제공해 온 기독교였기에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 의해 받고 있는 영향에 대해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Monday, December 27, 2010

John 1:9-12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 청년요셉 자매들과 한편의 설교 동영상을 보았다. 요지는 이것이었다. Every Christmas, we exchange the gifts that we can live without. But we often forget the gift of Christmas that we cannot live without, Jesus Christ.

Tuesday, December 21, 2010

요한복음 7:53 - 8:12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8: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초막절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 다음날인 안식일에 간음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와서 재판을 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스스로 모세율법의 충실한 따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형권이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자신들은 여인을 실제로 죽이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에게 곤혹스런 재판을 떠넘기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통렬한 메시지이다. 이 말씀은 바로 오만한 지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어두움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메시지이다.

Saturday, December 18, 2010

고린도전서 12:13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3 For we were all baptized by one Spirit into one body--whether Jews or Greeks, slave or free--and we were all given the one Spirit to drink.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 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는 성령을 마셔야 비로소 살아난다. 성령을 마시지 못하면 마셔도 또다시 목마른 그 무엇을 유행처럼 따라다니며 허덕이게 된다. 먹을 음식 말씀과 마실 음료 성령을 주시사 오늘을 살게 하소서.

Friday, December 17, 2010

빌립보서 4:14-16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가난하고 핍박받던 교회,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냐로 선교사역을 떠날 때에도 연약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길 때에도 바울의 후원이 되었다. 자신의 가난함을 나눔을 통해 부요함으로 바꾼 빌립보 교인들. 진정 믿음의 본이며 하나님의 칭찬이다.

Thursday, December 16, 2010

아나뱁티스트 영성

나는 신자의 침례를 인정한다. 나는 유아세례를 믿지 않으며 종교국가주의는 신뢰하지 않는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부모에서 태어났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가 누구이든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다. 아나뱁티스트들에 대한 재평가들이 이루어지고 있어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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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2010년 7월 22일은 세계 기독교 역사를 새로 쓴 날이다. 루터란세계연맹(LWF·Lutheran World Federation)은 독일의 슈튜트가르트에서 제11회 총회를 열어 16세기 당시 루터란이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를 박해했던 일에 대해 깊은 용서와 회개를 선포했다. 총회에서는 아나뱁티스트 후예인 메노나이트 교회 대표자들이 참석했고 루터란 지도자들은 이들에게 사죄했다. 루터와 칼뱅 등 개혁가의 반대를 받으며 500년간 박해 속에서 받아온 오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나뱁티스트는 종교개혁 시대에 출현했던 개혁적 분파다. 형식에만 그쳤던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세례는 개인의 철저한 신앙고백에 근거해 시행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몸 전체가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실시했다. 이 때문에 반대파들은 이들을 유아세례에 이어 또 한번의 세례를 받는다고 비꼬며 ‘Anabaptist’, 즉 ‘재세례파’라는 별명을 붙였다. 개혁시대 초기에 이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유아세례 거부뿐 아니라 당시 마르틴 루터 등이 추구하던 정교일치를 비판하고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대치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사회의 권력구조가 교회 속으로 전이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세속사회로부터 분리된 자발적 공동체로 정의하고 당시 전통과 관습에 도전했다.

개혁파들보다 더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던 이들은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마태복음 5∼7장에 이르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제자도를 추구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확실한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의식, 정교분리, 공동체, 제자도, 평화주의 등은 당시 기독교 환경에서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단과 반역자로 몰리며 루터파와 가톨릭교회 둘 다에게 핍박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나뱁티스트 이단’을 두 발을 묶은 채 물에 빠뜨려 살해하기도 했다. 교회역사가 후스토 곤잘레스는 “순교자의 수는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숫자는 아마 콘스탄틴 대제가 회심하기 전 3세기 박해 기간에 죽은 이들보다 많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최근 한국교회에 이 같은 아나뱁티스트 신앙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배우자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 배경은 한국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정교일치를 추구하고, 공동체 정신을 상실해가며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제자들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는 많지만 산상수훈에 따라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삶이 고귀하게 비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왜 루터와 칼뱅이 아니라 아나뱁티스트일까. 김기현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목사는 “화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 공동체 지향, 제자도 추구 등이 현대 한국교회의 병폐를 치유할 요소가 되기 때문”이라며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예수 정신의 근본을 잃어가며 종교화되는 교회를 향한 치료제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목회자를 비롯해 평신도 역시 본질 회복에 대한 목마름으로 넘쳐난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들은 말 대신 삶으로 예수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소재 아미시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아나뱁티스트의 삶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피해자 가족은 즉각적으로 범인을 용서한다고 알렸고 그 어떤 보복이나 원망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을 별난 사람으로만 치부하다 용서의 모습 앞에 경의를 표했다.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김경중 총무는 “현대 아나뱁티스트의 특징은 제자도와 비폭력 평화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며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용서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했다.현대 아나뱁티스트는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시파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신앙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선조들이 추구했던 신앙적 전통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메노나이트는 가장 큰 규모의 교단으로 메노나이트세계교회 총회 소속 신자만 160만명에 이르고 있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전 세계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걸출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고(故)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전 노트르담대학 교수는 현대 메노나이트파 대표적 신학자다. 요더의 신학은 스탠리 하우어스(듀크대), 글랜 스타센(풀러신학교) 등 기독교윤리학 대가들에게 이어졌다. 하우어스와 스타센 교수는 자신을 각각 ‘아나뱁티스트적 감리교도’ ‘아나뱁티스트적 침례교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메노나이트파의 경우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김경중 KAC 총무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메노나이트 봉사자들이 국내에 입국해 대구와 경산 지방에서 71년까지 활동했었다”며 “이들은 구호 원조활동뿐 아니라 직업학교를 세워 사람을 키웠다”고 말했다. 2001년 KAC가 설립돼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전통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으며 서울과 춘천에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설립돼 있다. 침례신학대학교 출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아나뱁티스트 모임 등도 형성돼 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상목 기자

히브리서 13:3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3 Remember those in prison as if you were their fellow prisoners, and those who are mistreated as if you yourselves were suffering (히브리서 13:3).

이렇게 번역을 바꾸어 보았다. 갇힌 사람들을 생각하기를 너희가 갇힌 것처럼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기를 너희가 고통받는 것처럼 하라. 주위에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너무나 드물다.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선생들은 이 세상은 물론 자신도 바꿀 수 없는 허망한 존재이다. 고통받는 북한의 형제들이 언제쯤 우리의 기도제목이 될 수 있을까? 주여 속히 오셔서 그들의 신원을 들어주소서.

Thursday, November 4, 2010

요셉 슐람 목사 인터뷰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보다는 "유사복음" 혹은 "기독교적인 문화" 혹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신학적 경향성을 띄는 "기독교 교리"를 전하기 쉬운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예수는 작아지고 자신의 사역이 더 중요해진다. "피선교지에 필요한 것은 전하는 자의 신학과 신앙이 아니라 복음의 원 뜻" 이라는 메시아닉 유대인인 요셉 슐람 목사의 이 조언은 반드시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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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한국교회여, 언어의 유희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교회 지도자라면 더더욱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고 말이 아닌 삶으로 증거해야만 합니다.”

한·이성경연구소(KIBI) 초청으로 지난달 26∼28일 세미나 및 집회를 인도한 요셉 슐람(64·예루살렘 네티비아교회) 목사의 한국교회를 향한 안타까움은 절규에 가까웠다. ‘메시아닉 주(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 지도자인 슐람 목사는 30일 이한에 앞서 가진 인터뷰에서 신구약에 기록된 말씀의 원뜻을 망각한 채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작위적 해석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봉은사 땅 밟기 기도 동영상 파문’에 대해 우려했다.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돌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었습니다(수 6:2∼5). 이외에는 성경 어디에도 영적전쟁을 위해 땅 밟기 기도를 하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왜곡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대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그는 “이사야 예레미아 호세아 등 구약의 선지자는 물론 사도 바울, 베드로 등 사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생각으로 바꿔 전한 적이 없었다”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메신저(전령)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하는 게 전령의 진정한 책무라고 덧붙였다. 슐람 목사는 “한국교회가 미국·유럽의 ‘쓰레기’ 신학과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쓰레기 가운데 아직도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불교도가 기독교인이 되는 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했다. 개종은 육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이 또한 지난한 과정이 요구된다며 무신론자나 타종교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열린 마음을 갖고 교류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세상을 정말 바꾸려면 예수님의 보여주셨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사랑밖에 없다고 했다. 슐람 목사는 마태복음 7장 1∼2절을 인용, “다른 사람을 우리의 잣대로 심판하면 우리에게 그 심판이 돌아올 뿐이다. 심판자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임을 명심해야 한다”면서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력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우상숭배는 궁극적으로 만들어진 물체가 아닌 사람의 마음에 의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우상숭배는 이념, 사상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뭐든지 우상을 만들 수 있어요. 기독교인들조차 우상을 갖고 있잖아요. 전도(선교)를 위해선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하려는 겸손한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지만)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슐람 목사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지 무섭고 나쁜 소식이 아니다”며 “불교도이든 무슬림이든 누구에게나 복음은 ‘굿 뉴스’”라고 말했다. 아마 한국교회 안에 땅 밟기 기도가 성행하는 것은 교회, 이방인(한국인을 포함)이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대체신학’의 영향인 것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는 옳지 않은 접근”이라며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이 어떻게 했는지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이어 세리, 창기,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에게 예수님은 당시의 편견과 장벽을 뛰어넘어 직접 찾아가셨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거짓 앞에 밝히 드러나는 법이라며 돈, 권력, 제도가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 테러’조차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죽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도 오히려 사랑받아야 할 유대인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472년부터 1821년까지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려고 했고, 억지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전통 관습을 고수한다면서 이단자로 내몰아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도 유대인을 증오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슐람 목사는 “형제(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걸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서 “이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있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 것임을 전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고 슐람 목사는 말했다. “한국인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국인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한국 기독교를 관찰해보면 예수님이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메시아닉 주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아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하고 계시는데요.”

슐람 목사는 한국교회 교인들이 혹시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미혹되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예언만 해도 그래요. 사람들은 예언의 참 의미보다는 예언자에 더 열광합니다. 이 때문에 거짓 예언자가 판을 치는 겁니다. 예언은 반드시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벧후 1:20∼21). 하나님의 예언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은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세요.”

슐람 목사는 신명기 13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며 거짓 예언은 교회를 파괴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오늘도 예언자를 세울 수 있지만 그 예언자는 반드시 자신의 예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일 누가 나에게 예언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환영해요. 감사할 일이네요.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예언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성경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당신을 동네 밖으로 끌고 가 죽일 것입니다.” 그는 초대교회 당시의 거짓 예언자 모습이 성경에 잘 기록돼있는 듯이 어느 시대에나 그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지만 분별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위로의 말은 다르다는 걸 명심해야 하고 예언자가 예언을 통해 돈벌이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것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고 창조과학, 지적설계론 등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충정은 이해하지만 성경은 달력처럼 인위적으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도 그는 미국·유럽의 ‘쓰레기’ 신학과 신앙이 문제라고 했다. 또 피선교지에 필요한 것은 전하는 자의 신학과 신앙이 아니라 복음의 원 뜻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가 이스라엘 복음화에 거룩한 부담감을 느낀 것에는 감사드려요.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절실한 것은 한국기독교, 한국교회, 한국신학과 신앙이 아닙니다. 현지 교회와의 협력, 동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정체성, 가족 관계 등을 비롯해 모든 걸을 포기한다는 걸 의미입니다.” 슐람 목사는 사람들이 교차로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두려움과 불안이 동시에 몰려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서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히네니(Hineni)’, 즉 ‘내가 여기 있나이다(Here I am)’라는 고백이라고 말했다. “히네니라는 단어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 모두가 공히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말을 섬기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이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을 드리려 할 때는 이삭이 히네니라고 했습니다.” 슐람 목사는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히네니의 자세로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종과 섬김, 행함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교회가 세상의 더러운 악에 대해 소리를 발하지 않는 것, 교회가 세상이나 심지어 교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결코 합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1장 17절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고 슐람 목사는 설명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해 율법이 필요 없게 됐다는 생각은 ‘난센스’라고 했다(렘 31:33, 마 5:17, 롬 3:30∼31, 롬 7:12).

“구약에 은혜와 진리라는 단어가 20번이나 언급됩니다. 모세를 통한 율법 또한 은혜입니다. 사도 요한은 모세로부터 시작한 율법이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됐다고 했어요. 율법 자체가 무용하다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슐람 목사는 “로마서를 통해 이방인을 전도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꿨던 바울을 만나게 된다”며 “복음이 율법을 대체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역설했던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그들이(이방인이) 이스라엘을 격동시켜(부끄럽게) 주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한 것을 잊지 말라(롬 11:25∼32)”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이라면 지난 주 출석하는 교회의 목회자 설교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미국 맥도날드식 기억, 패스트푸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한국 기독교를 갈라놓은 것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교파주의입니다. 사람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상대가 설사 나와 다를지라도 용납해야 한다며 인간이 만든 장벽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하나 되기를 바라신다며 서로의 생각과 의견이 다르면 인내를 갖고 멀리 보고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슐람 목사는 요즘 이스라엘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메시아닉 주와 정통파 유대인간 대화가 시도되고 있다는 것. 정통파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을 핍박했지만 소득이 별로 없었음을 깨달은 게 동인이라고 했다. 핍박이 오히려 상대를 더 세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메시아닉 주의 사회적 지위 향상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고 했다. 과거 메시아닉 주는 사회에서 하류 계층을 주로 형성했지만 이제는 군 장교, 대학교수, 비즈니스맨 등 그 영향력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슐람 목사에게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언급되는 14만4000명이 유대인인가, 아니면 크리스천을 의미하는지 묻자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이며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답했다. 예를 들어 12는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의미하고 12 곱하기 12는 풍성함을 의미한다. 거기에 1000을 곱한 게 14만4000이니 매우 충만한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는 따라서 성경을 편식해서 읽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구약과 신약을 통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록은 신약 외에도 율법서 예언서 등에 무수히 나옵니다. 바울이 로마서 11장 26절에서 언급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구약을 인용한거에요. 반유대주의는 성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아요.”

그는 “어떤 신학이론을 따르면 유대인에게 부정적일 수 있지만 바울서신서 등 성경을 따르면 유대인들을 결코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드로후서 3장 14∼18절은 당시 사람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어요. 사실 바울의 글은 상당한 수준이거든요.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단어를 사용할 때 매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가 무지한 사람들이 바울의 글을 오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거죠.” 슐람 목사는 “어떤 것들(바울의 편지들)은 이해하기 어려워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들처럼 억지로 해석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경고한 베드로의 지적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바울이 누구를 대상으로 해 말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며 “바울의 모든 글에서 패턴이 있는데, ‘우리는’이라면 유대인, ‘너희’, ‘너희들’이라면 이방인을 뜻한다. 에베소서 2장 11절을 보면 너희, 이방인이 정확하게 언급돼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요셉 슐람 목사는 1946년 3월24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뒤 48년 온 가족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예루살렘에서 거주했다. 16살 때 예수님을 영접한 그는 히브리대에서 성경과 성경고고학을, 미국 테네시주 네슈빌의 데이비드립스콤대에서 화학과 성경연구를 전공했다. 히브리대에서 역사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예루살렘 네티비아교회 담임목회자, 로에 이스라엘 선교회 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네티비아교회에서 회당식 예배를 인도하면서 유대인들이 거부감 없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아울러 복음전도를 위한 라디오방송국 운영과 무료급식 사역을 하면서 전 세계를 순회, 이스라엘과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강조한다. 로마서 주석, 사도행전 주석, 갈라디아서 주석 등의 저서가 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함태경 기자

Monday, October 11, 2010

전도자의 겸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사실 말씀은 설교자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다해 잘 전달할 때 좋은 결과를 맺을 확률이 높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영혼이 변화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리를 단순한 의사전달의 문제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진리는 절대 의사전달이 아닙니다. 논리력과 분위기 장악능력이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지혜로운 말로 전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디는 노년에 자기가 평생 설교를 지나치게 잘한 것에 대해 회개했다고 합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는 반드시 미련해 보여야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반드시 거리끼는 것이 되어야만 하는데 인간의 욕심이 누구에게나 진리를 좋게 보이게끔 변질시키고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세계를 품는 경건의 시간 GT

Monday, September 20, 2010

거룩함의 능력

거룩함이 우리의 심령에 능력을 줍니다. 사랑으로 달아오르고, 더 큰 믿음과 더 많은 기도와 더 많은 열정을 갈구하는 헌신된 사람에게 거룩함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능력이 임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르는 열정을 소유한 사람에게 이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헌신이 부족한 탓에 하나님의 일은 지체되고, 그분의 동기는 왜곡되며, 그분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천재적인 재능, 세련미가 넘치는 학식, 높은 지위와 존엄한 자리 그리고 영예로운 이름을 가졌을지라도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군대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르는 영혼, 세상의 수많은 심령들을 향해 헌신하여 불타오르는 영혼만이 하나님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출처: 세계를 품는 경건의 시간 GT

Monday, September 6, 2010

하나님의 황금시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있다면 우리의 의무는 바로 기도입니다. 만일 기도를 삶의 하위로 밀어낸다면 그리스도인은 한번 소유했던 어떤 영적 열정이라도 잃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가볍게 여기는 교회는 생명력을 주는 경건을 유지할 수 없으며 복음의 진척을 가져오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복음은 절실하며 열정적이며 끊임없는 기도 없이는 정복하거나 살아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퇴보한 세대와 퇴락한 교회의 특성이 있다면 바로 줄어든 기도생활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던 때는 상업적, 문화적, 교육적, 금전적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황금시대가 있으니 곧 기도의 시대입니다-- 출처: 세계를 품는 경건의 시간 GT

Friday, August 27, 2010

열왕기하 15:1 - 15:12

1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 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 8 유다의 왕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9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10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1 스가랴의 남은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의 일이다. 유다는 아마샤에 이은 아사랴(웃시야)가 52년간 다스리고 이방과의 전쟁에서 많은 영토를 얻는다 (대하26:2-7). 승리에 이은 교만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분향하려 하자 이를 막는 제사장에게 분노한다 (대하26:16-20). 하나님은 그를 문둥병으로 치신다.

한편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에 이어 스가랴가 다스린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죽임을 당한다. 스가랴는 예후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고 예후의 자손이 4대까지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는 예언은 이로써 성취된다. 여로보암 2세 때에 호세아와 아모스의 회개의 메시지는 무시되고 결국 예후왕조는 종말을 맞는다. 아합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세움 받았던 예후왕조가 아합의 죄를 저지르고 심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호1:4). 죄에 대한 심판은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사실 아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최고의 번영을 누린다. 북쪽 ‘하맛어귀’에서 남쪽 ‘아라바 바다(사해)’까지 솔로몬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회복한다 (왕상8:65). 그런 당장의 눈에 보이는 번영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와 아모스의 회개의 메시지가 무시될 때 이미 예후왕조는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국에서 오어박사라는 분의 예언을 두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지금 시대에 선지자가 노릇하는 사람은 거짓이며 집회를 했던 교회들도 사이비라는 시선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신학적으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에 향한 회개의 경고는 너무나 절실한 요청이다. 한국교회가 문제라는 메시지는 어느 교회에 가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교회가 그 문제의 중심이라는 메시지는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에서 지금처럼 주변국가들 앞에서 당당한 적이 있는가? 지금의 축복과 번영 앞에서 호세아와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미 말씀으로 한국교회에 선포되었다. 따라서 만일 회개하지 못해서 생길 수 있는 그 어떠한 결과에 대해서도 변명할 것이 없다. 정통신학, 교리, 좋은 프로그램 등으로 우리는 너무 편안하게 깊이 잠들어 있는지 모를일이다. 나는 확실히 그렇다고 믿는다.

Friday, August 20, 2010

Here are 6 practical ways to normalize your blood pressure.

1. Veggies! There are numerous nutrients that lower blood pressure. Fortunately, most vegetables contain these nutrients. Instead of buying bottle after bottle of various vitamins and nutrients, aim for 4 to 5 servings of vegetables a day. The fiber in vegetables will also help, which I will discuss next.

2. Fiber is Fine! Fiber is especially important to hypertension sufferers. Fiber cleanses or flushes the body of many things and will also normalize your score. Find foods that contain high fiber such as whole grains. I highly recommend the water-soluble fiber foods to my customers.

3. Bananas! Potassium is a great element which actually reduces blood pressure. I suggest eating bananas because they are high in fiber and in potassium. This 'two birds with one stone' fruit will also reduce your score.

4. Oats! Even Cheerios is backing natural health. Did you know that whole grains and especially oats are extremely effective for reducing hypertension? Switch your breads to wheat with 4 grams of fiber per serving. Eat a bowl of Cheerios a couple times a week. Always go whole grain!

5. Wonderful Water! Drinking water cleans out any waste that's accumulated in the body. Drinking water will help flush out sodium in addition to other waste products in the body. Drinking lots of water will also help you feel more full, which is helpful for losing weight. There are thousands of benefits of water and lowering high blood pressure is one of them. Go for at least 8 glasses a day.

6. Vitamins! What vitamins are you taking! Here is one that could be important. A 500-milligram supplement of vitamin C was found to reduce blood pressure by about nine percent. That would be a good place to start.

Thursday, August 19, 2010

포스트모던 시대의 목회 리더십

김영봉목사--포스트모던 시대는 어떤 목회 리더십을 요구할까. 모더니즘 시대의 독점적 일방적 리더십에서 공유와 참여적 리더십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지위가 권위를 보장하지 않는다.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다. 그러기 위해선 리더십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제시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리더십 패러다임 전환이다.

“성경 분석가보다 영적인 현자가 되라(From Bible Analyst to Spiritual Sage). 계속 말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From Broadcaster to Listener). 테크니션이 되지 말고, 영적인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가 되라(From Technician to Spiritual Friend). 전사나 세일즈맨이 아니라 댄서가 되라(From Warrior/Sales Man to Dancer). 아마추어가 되라(From Careerist to Amateur). 목사는 언제나 대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다(From Problem-solver to Co-quester). 변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과하는 사람이다(From Apologist to Apologizer). 위협하고 가르고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품고 끌어안는 사람이다(From Threat to Includer). 모더니즘 시대는 목사가 해답을 알고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구도자로서 함께 해답을 찾아가는 존재다(From Knower to Seeker). 원맨쇼보다는 팀 빌더가 되라(From Solo Act to Team Builder).”

존 오키프는 “모던 시대는 경영자형 목사나 카리스마 있는 목사를 필요로 했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는 시인, 예언자, 이야기꾼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모더니티 시대는 교인들을 제자화하기 위해 만들고(making), 찍어내고(molding), 훈련하고(training), 연습시켰다(drilling).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는 제자를 기르기 위해, 다듬고(forming), 여행하고(journeying), 함께 자라간다(growing together). 제자됨은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지속적인 여정을 걷는 데 있다. 지도자는 ‘답을 가진 자’가 아니라 ‘함께 묻는 자’여야 한다.

Thursday, August 12, 2010

찬양과 여호와의 전쟁

대하 20:13-30 보라! 하나님 능력을 보라! 하나님 구원을 --송병주목사

1. 들어가며
장군중에 지장이 있고, 덕장이 있고, 용장이 있다. 지장(智將)은 지략과 전략에 뛰어난 왕으로서 탁월한 장군을 말한다. 덕장(德將)은 뛰어난 인격과 덕으로 군인들이 장군을 위해 온 힘을 다하게한다. 용장(勇將)은 용감하고 전쟁에 능한 장군으로 앞장서서 공격하는 강력한 장군이다. 이 세 장군중에 누가 가장 강할까? 우열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지장, 덕장, 용장이 이기지 못하는 장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운장”이다. 즉, 운이 좋은, 운을 타고나는 장군이라고 한다. 지략도 덕도 용감하지도 않은데, 어쨌든 잘되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믿음의 백성으로서 가장 필요한 용사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장(靈將)”이라고 할 것이다. 지혜도 덕도 용맹도 운도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장군이 가장 능력있는 왕일 것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앞에서 중국역사의 용장 황우도 자결을 생각하지만, 영장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하늘을 보라보는 사람이다. 오늘 여호사밧은 바로 지혜도, 덕도, 용맹도, 운도 다한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그것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었고 전환점이었다.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오늘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누고자 한다.

2. 첫째: 너희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다.
전쟁의 본질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여호와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15절을 보면, 예언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7절도 보면,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결국 오늘 전쟁은 유다의 관점에서 전쟁이 아니라 “전쟁영화 관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전쟁을 했지만, 단 한번의 화살도 쏘지 않았고, 한 개의 창도 던지지 않았다. 많은 인생들이 내가 무장하고, 내가 싸운다. 오늘 그러나 이 전쟁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무장하고 하나님이 싸우셨다. 그것은 여호사밧 자신부터 철저하게 자신의 왕권과 군대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림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레위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앞에 “땅에 엎드리어 머리를 조아려 감사했다”고 한다. 여호사밧에게 하나님은 이 묵시를 허락하지 않고, 레위 사람에게 묵시를 허락했다. 자기의 직분과 직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음성앞에 얻드릴 준비가 된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전쟁을 치룰 자격을 가진 것이다.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전혀 개의치 않은 지도자의 모습으로 인해 이것은 여호사밧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 된 것이다.

3. 둘째: 찬양으로 드려진 전쟁
그들은 오늘 전쟁을 치룬 것이 아니라 찬양집회를 열었고, Family worship을 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21절을 보면,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기서 발견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여호사밧은 이 찬양을 시작하는 것도 자신의 닥독 결정이 아니라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진행했다는 것이다. 온 마음과 의견을 모아 한 마음으로 찬양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치루면서 군복이 아니라 예복을 입었던 사람들이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 갑옷도 없고 멋있지만 전쟁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옷을 입고 찬양을 시작하는 이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찬양이 어떤 일을 일으키는가? 22-23절을 보면,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 노래와 찬송에 시작될때에 여호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스라엘은 “주께 감사하세” 곧... 감사의 찬양을 시작했다. 그 감사의 찬양이 울려퍼질때 하나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 노래하면 옆에서 짜증낼 상황이 있다. 이럴때, 우리는 노래하는 백성들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공격을 격발한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절망적인 상황일때 그때가 찬양할때이다. 우리가 찬양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지고 여호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4. 맺으며: 최악의 상황을 최고의 간증으로...
유다의 역사상 전쟁을 치루었지만, 단 한명의 전사자가 없는 전쟁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믿음이 없으면 최악의 상황으로 끝난다. 하지만, 믿음 아래 있을때 최악이면 최악일수록 결국 최고의 은혜로 바뀐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최고의 간증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상황이 악화될 수록 생각하자. “도데체 어떤 간증을 주시려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엎드리는 일이고, 완전히 맡겨드리는 일이며, 찬양을 회복하는 일이다. 감사절 아침을 맞으며, 이제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 “주께 감사하세.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Wednesday, August 11, 2010

700여년만에 핀 꽃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목간(木簡)이 출토된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사적 67호)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700여년만에 꽃을 피웠다. 함안박물관에서 7일 자태를 드러낸 두 송이의 '아라홍련'은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모두 10개의 연꽃 씨앗 중에서 발아에 성공한 3개의 연꽃 씨앗에서 꽃을 피운 것으로 현재 7개의 꽃대가 올라온 상태다.

--뿌려진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살아나서 꽃이 필 날을 기다리며

Monday, August 9, 2010

바른 호흡은 바른 자세에서 나온다.

심각한 질환이 없는데도 두통이나 가슴 답답함, 전신무력증, 졸음, 잦은 하품과 같은 증상이 있다면 호흡패턴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호흡습관을 바꾸면 스트레스와 불안감·우울증·갱년기장애를 개선할 수 있다. 바른 호흡은 바른 자세에서 나온다. 허리를 곧게 편 열중쉬어 자세에서 손을 허리 위로 올리면 가슴이 넓게 펴진다. 이 상태에서 코로 숨을 크게 4~5초간 천천히 마시고, 1~2초간 숨을 멈췄다가 다시 4~5초에 걸쳐 천천히 내쉰다. 몸에 산소를 받아들이고, 노폐물을 내보낼 여유를 갖는 것이다. 이를 15~20분간 반복한다.

Friday, August 6, 2010

기도--병을 치료하는데 도움

조선일보 8월6일기사-- 기도가 병을 치료하는데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미국대학 연구팀의 조사결과가 5일 공개됐다.인디애나대 연구팀은 최근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시각과 청각 장애를 가진 환자 개개인 가까이서 ‘근접 중보기도’(PIP)를 하고 상태를 관찰한 결과 일부 환자들의 장애가 실제로 크게 완화됐다고 주장했다. 캔디 건터 브라운 교수가 주도한 연구팀에는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동참했으며, 조사 대상 환자로는 기독교 교파인 오순절 교단이 면접을 통해 모잠비크 현지에서 모집한 청각 장애인 14명과 시각 장애인 11명이 참여했다.연구팀의 PIP는 1명 이상이 환자를 위해 바로 앞에서 기도하고, 신체적으로도 자주 접촉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오순절 교인들은 1~15분간 PIP 기도를 했지만 일부는 1시간 이상 장애인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머리에 손을 얹고 포옹 등 신체적인 접촉도 병행했다. 그 결과 실험 참가자 11명의 청력이 놀랄 만큼 향상됐고 시각 장애도 크게 완화됐다고 연구팀은 주장했다. 특히 청각장애인 참가자 2명은 기도 이후 50㏈(데시벨)의 낮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고 시각장애인 참가자 3명도 빛을 겨우 인지할 수 있는 20/400 수준에서 20/80 수준으로 시각이 크게 향상됐다. 영적 치유법 개발에 주목하고 있는 브라운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 임상적인 효과에만 주목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지는 않았다면서 앞으로 이와 관련된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9월호 ’서던메디컬저널’에 실릴 예정이다.

Tuesday, August 3, 2010

종말의 때의 위로

“아바, 아버지” --David Wilkerson

성령은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순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이 구절은 아이를 입양하는 데 관한 성경 시대 동양의 관습에 대해 언급합니다. 입양하는 아버지가 입양 서류에 서명하고 날인할 때까지 아이는 이 사람을 단지 아버지로만 여깁니다. 아이는 이 사람을 “나의” 라는 의미인 “아바”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류에 서명을 하고, 등록과 날인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후견인은 그를 입양하는 아버지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어린아이는, “내 아버지! 이제 더 이상 어떤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훈육하십니다. 당신을 아버지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당신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서류를 날인했다. 너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다. 너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에게는 이제 너를 지극히 사랑하고 부유하고 힘센 아버지가 계시다. 그분을 포옹하고 ‘내 아버지’라고 불러라. 나는 그분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왔다. 그분은 너를 사랑했고 너를 원했다.”

우리의 외침은 한없는 기쁨과 감사여야만 합니다. 우리안의 성령은 문자 그대로 외칩니다. “너는 상속인이다. 예수님이 쟁취하신 모든 것의 상속인이다.” 당신의 아버지는 온우주에서 가장 부요하신 분이니 당신의 유산은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그분앞에서 부끄러워 피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 진노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가난에 찌들고 기쁨과 영적 승리가 결핍된 고아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버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동과 고통의 순간에도 성령은 우리와 함께 그곳에 계십니다. 성령의 임무는 신랑이 그 자리에 없을 때 그리스도의 신부를 안위하는 것입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14:26).

보혜사는 “고통과 슬픔의 때에 위로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고통과 슬픔을 누그러 뜨리고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나는 “안전하고 따뜻한 침대위에 눕혀주는 자”라는 희랍어 정의를 좋아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그분은 자신의 위로의 폭신한 침대위에 당신을 눕히시고 부드러운 손길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심으로 예수님은 절대 확실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불편하게 고통당하고 위로가 필요할 것이며 종말의 때에 그분의 백성들 간에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그분이 하나님의 내재적 속성에 속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이 때문에 당신은 “내 안에 계신 이가 온 세상의 모든 능력을 합친 것보다 크시다. 모든 마귀의 권세보다 위대하시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탄의 손아귀로부터 보호하기위해, 당신의 영의 사기를 진작 시키시고, 모든 우울함을 쫓아버리고 당신의 영을 주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하시려고 그분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시도록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3, 5).

Wednesday, July 21, 2010

성경번역 15년 내 모든 언어로 완성

‘지구촌 6909개 언어로 성경’기대…컴퓨터와 위성통신 등 첨단기술로인구가 얼마 되지 않은 희귀 종족들을 위한 성경들이 발빠르게 번역되고 있다.가장 최근엔 부고투어로 성경이 발행됐다. 부고투는 솔로몬제도에 거주하는 약 4000명의 종족이다.

크리스찬투데이위클리프성서번역회(WBT)가 140년으로 잡았던‘최후언어캠페인’(LLC)이 오는 2025년까지 15년 내로 끝날 것으로 잡고 있다. 신교 번역자들은 그때까지 현재 적어도 구어로 사용중인 세계 6,909 언어로 고루 성경이 발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휴대용 컴퓨터와 위성통신 등 첨단기술 때문이다. 500년 전엔지상 언어수가 지금의 2배 정도였다.과거엔 선교사 가족 또는 팀이 오지의 현지어 1개를 택해 수십년 걸려야 간신히 언어를 배우고 옮김 사역을 해서 성경을 펴내곤 했다. ‘1개팀∙1개어∙한평생’이 당시의 구호였고 목표 연도는 2150년이었다.현재는 첨단기술로 무장한 사역자가 숙련된 현지인 번역가들과 협력하여 한 명이 평생에 여러 가지 언어의 성경을 펴낼 수 있게 됐다. 위클리프 번역 사역자들은 복음화/신학교육/성경공부/교회개척 대신 문자언어를 다룬다. 모국어로 읽고 쓰기를 가르친다.이 사역자들은 각 희귀언어를 위한 알파벳과 초급 독자들을 계발해낸 뒤 성경을 번역한다. 아직 성경이 없는 언어는 약2,200개. 대부분 중국과 인도, 사하라 이남지역의 아프리카, 파푸아뉴기니 등에 분포된 3억5000만 명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사역자들은 성경 및 언어학 훈련을 받은 6,600명의 경력자와 단기선교사들. 이들은 직접적인 복음화 사역은 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해야 하며 교회 등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콜로라도 주립대 졸업생인 케이티 자트먼(27세)은 플로리도 올랜도에 본부를 둔 위클리프의 상임 그래픽 디자이너. 최근 세네갈로 2주 선교여행을 다녀왔다. 그곳 사피 족에게 성경을 선사하기 위해 레이아웃과 디자인 웍샵 등을 통해 그들의 알파벳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들은 단2주만에 출판자들이 됐다”고 그는 전했다. 12명의 참여자들은 무료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을 사용, 사피어로 된 24쪽짜리 어린이 이야기 책자를 위한 수십 쪽의 초안을 잡았다. 자트먼은“일단 그들의 심정언어(HL)로 된 성경을 갖게 되면 그들의 구전과 문화의 사전 역할도 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렇게 되면 주변문화권에 삼켜질 우려가 있는 사피의 고유문화가 보존될 퍼텐셜도 커지는 셈이다.수많은 구전 언어가 멸종 직전에 처해있다. 생존해 있는 몇몇 노인들만 알 뿐 후손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일단 언어가 기록만 되면,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인류학자들은 구전문화권에 대한 선교사역에 회의를 품어왔다 기사제공ⓒ 크리스찬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us)

Saturday, July 17, 2010

알리야

제2 출애굽…‘성경예언 성취’(?)
세계 유대인들 이스라엘로 귀국이민“급물살”

크리스찬투데이-- ‘성경예언 성취’를 위한 것이란 세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국 이민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현지 언론 아루츠 쉐바에 따르면, 가장 최근인 6월 하순에도 100명의 새 이민자들이 미국으로부터 관련 유대계 단체 네페쉬브네페쉬(이하 NBN)와 주이쉬 에이전시(JA)의 제휴로 현지에 도착했다. 곧 이어 캐나다와 영국에서도 유대인들이 오기로 되어 있다.이들 두 단체의 협력만으로 올 여름기간 중 모두 3000여 신규 이민자들이 그립던 모국인 이스라엘에 당도, 정착할 예정이다. 미국계 이민자들 다수는 이미 에일랏으로부터 북부까지 거주지역을 선정한 상태.

정착지를 결정하면 NBN 북지부의 캠페인 지원을 받게 된다. NBN의 활동은 최근 영국에서도 강화돼 그곳 유대인들의 알리야(모국 이민이란 뜻. 이민자들을‘올림’이라고 함)는 50% 이상 증가했다. NBN은 북미주와 영국에서만 활발하지만, JA는 세계적으로 활동해 올해 수십개 국가 유대인들의 모국 귀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과거 활발했던 구소련 지역의 알리야가 줄어들면서 영어권올림들이 크게 늘고 있다. 아울러 프랑스와 예멘 등의 알리야도 증가 중이다. 알리야 자격심사는 NBN과 JA가 함께 개인의 서류 파일을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요서류에는 신청서 외에도 신청자를 아는 랍비의 추천서 등도 포함된다. 자신 또는 부모/조부모의 양쪽이나 한쪽이 유대계임을 입증하는 문서, 관련 이혼증명서, 부모/조부모의 비석 사진 등도 받아들이며 꼭 정통적인 문서가 아니어도 접수된다.지난 90년대엔 심지어 아프리카 흑인들 중 고대 유대계 후손들도 대거 이민을 와 정착한 바 있다. 이들 대다수는 가족전통과 관련 유품 등으로 역사적으로 유대계 혈통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혹 증명되지 못한 사람들도 자비로 정착할 수 있다.유대계 네티즌들은 이런 소식에 흥분하는가 하면, “도대체 누가 진짜 유대인이란 말인가, 과연 뭘로 입증되나?”, “좁은 땅에 정착해 앞으로 어쩌겠다는 건가, 이민 실직자가 늘지 않겠나?”등등 의혹의 눈길도 만만치는 않다.그러나 유럽과 영어권 사람들은 현 거주국가에 무슬림들이 나날이 늘어가는 데다 날로 유대인 혐오사상 또는‘반셈족주의’가 점증해 모국 알리야가 유리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새미’라는 필명의 캐나다 유대인은“미국/캐나다/유럽 등의 경제악화에다 반유대 감정이 날로 심화돼 앞으로도‘올림’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2400여년 전 유다 왕국이 멸망한 뒤 전세계에 흩어져 살아온 유대계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독립한 지난 1948년부터 귀환하기 시작, 60여년 만에 디아스포라(흩어진 무리)의 약40%의 알리야가 이루어졌다.한편 이들 유대인들은 현재의 알리야 물결을 예레미야 30:3, 31:9 등 구약 성구의 성취로 믿고 있다. 이스라엘 지도층은 궁극적으로 이들의 힘을 모아 이른 바‘제3성전’의 건립 추진 계획을 바라보고 있다.유대인들 대부분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스라엘을 정치적 강국으로 만들어 줄 강력한 제2의 메시아를 여전히 대망하고 있다. 그밖에도 시오니즘(시온주의) 등의 운동이 유대계 나름의‘이스라엘 회복’을 추구해 왔다.반면 신약성경과 참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평화 재림과 유대인들의 회개/거듭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교계엔‘이스라엘 회복’을 돕는다는‘크리스천 시온운동’, 다양한 (극)보수주의 운동, 단지 이스라엘 돕기 차원의 재정지원 등이 흔한 실정이다.그런가 하면, 세계교회협의회(WCC) 계열인 진보계 주류 교파/교단들은 팔레스타인계 쪽을 더 지원하면서 최근 이스라엘 해군의 가자지구 구조선 승선 봉사자들 총격 사건을 빌미로 더욱 반이스라엘 감정을 조장해 왔다. 미국장로교(PCUSA)는 올해 총회 중 교단차원으로 미연방정부의 이스라엘 지원반대 발의안을 상정시킨 바 있다.

기사입력: 2010/07/14 [09:27] 최종편집: ⓒ 크리스찬투데이

오워박사의 메시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

오워박사의 메시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 이태형 국민일보 i미션라이프부 부장

‘점쟁이 문어’ 파울(Paul)은 2010 남아공월드컵 최고의 스타였다. 파울은 독일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모든 경기의 승패와 결승전 스페인의 승리까지 정확하게 맞히며 유명세를 탔다. 독일의 수족관에 사는, 지능이 잘해야 강아지 정도인 이 문어 파울이 어떻게 신통력 있게 예측을 할 수 있었을까. 여러 분석이 있겠지만 파울의 예언은 거듭된 우연이 빚어낸 하나의 해프닝일 가능성이 크다. 파울의 '예언'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던 지난 6월 말부터 7월 초에 데이비드 오워라는 케냐인이 한국을 방문했다. 오워는 이스라엘과 독일 등지에서 공부한 뒤에 분자유전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 당시 기독교 관련 인터넷에는 ‘오워 박사의 예언’이라는 내용의 글이 돌았다. 일부에서는 핸드폰으로, 메일로 그 내용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실제로 문자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언의 핵심은 ‘한국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2개월 내에 전쟁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미 오워 박사가 아이티 및 칠레의 지진을 사전에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오워 박사는 2003년에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한 이후 지금까지 교회들의 회개와 거룩함,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예언과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해오고 있다. 아이티 지진과 관련한 예언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2009년 11월에 아이티와 인접한 도미니카공화국을 방문하여 가진 집회에서 아이티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이티를 흔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아이티에는 성적인 죄악이 가득했고 교회 안에 죄악이 만연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언급이었다. 그의 ‘예언’이 나온 지 1년이 지난 2010년 1월 12일에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나 30만 명이 죽었다. 오워 박사는 한국에서의 집회에서 “그들(아이티인)이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그런 일(지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칠레에서도 비슷한 예언을 했다. 집회와 TV 생방송에 나와 회개하지 않으면 칠레에도 지진이 날 것으로 예언했다. 그가 예언한 지 1년 여만에 칠레에 진도 8.8의 강진이 일어났다. 이같이 아이티와 칠레에 대한 예언이 정확한 사실(Fact)인지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아이티와 칠레에 대한 그의 예언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도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 가운데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대부분 ‘전해 들은’ 이야기다. 전해들은 이야기가 증폭되어 신비화 되고, 그렇게 해서 신화화 되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또한 그의 말이 사실일지라도 비슷한 예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문어 파울이 8경기 연속 경기의 승패를 맞추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운 예언 일 수 있다. 가령 한 목회자가 일본에서 집회를 갖고 “앞으로 일본이 회개하지 않으면 지진이 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고 해 보자. 지진 발생이 잦은 일본에서는 언젠가는 고베 대지진과 같은 큰 지진이 날 것이다. 그것을 갖고 “내 예언이 맞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워 박사는 아직 한국교회내에서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정확히 그가 누구인지, 신학적 배경은 어떠한지, 교회와의 관계는 건강한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한국교회에 대해서 '영적 사자후'와 같은 말씀을 '공식적으로' 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물론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인적인 것이 일반화 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오워 박사의 ‘2개월 내 한반도 전쟁설’은 다소간의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퇴근해 집의 컴퓨터를 보니 데이비드 오워의 내용들이 떠 있었다. 아내가 검색한 것이었다. “어떻게 오워 박사를 알게 됐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교회 셀 모임에서 오워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문자 메시지를 받은 한 교회 성도가 오워 박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국민일보 내 기자들 가운데서도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오워 박사를 직접 인터뷰한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2달 내 한반도 전쟁설’은 와전됐다. 오워 박사는 결코 시한을 적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한국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경고 사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으로 받았다는 한국을 향한 메시지에는 음미할 점이 많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떼어 놓고 메지지 자체만을 볼때에 우리를 깨우치게 하는 어떤 것이 있는 듯 하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신앙계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옮겨본다. “하나님은 늘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데 한국 교회 안에 부를 좇는 번영 신학이 십자가 복음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학은 절대로 죄를 책망할 수 없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이 땅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하나님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온전한 복음에서 세상의 누룩을 제거하십시오. 또한 한국 교회 안에 성적인 죄가 만연해 있습니다. 동성애와 음란함과 낙태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책망하는 설교가 사라졌습니다. 죄를 죄라고 지적하고 회개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한국교회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이 땅에도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을 사랑하시고 한국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기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깨끗한 혼인예복을 예비한 신부들을 찾고 계십니다. 때가 임박했음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십시오.” 결국 한국 교회와 사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 땅에 내렸던 부흥의 촛대가 옮겨질 수 있으며 한반도가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오워 박사가 강조한 것은 회개와 거룩함이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오워 박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몇 주전 국민일보를 방문했던 국제예수전도단 설립자 로렌 커닝햄 목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다가오는 부흥을 한국교회는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준비는 회개였다. 철저하게 마음을 찢는 회개가 교회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면 부흥의 물결은 한국을 우회해 갈 것이라는 언급이었다. 특별히 커닝햄 목사는 한국 교회가 남북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은 수년내에 한국에서 엄청난 일을 행하시려 하는데 한국교회가 그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오워 박사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 부흥이 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어요. 회개와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가져오는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허락하시기 전에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바로 서야 합니다. 국가적인 회개가 한국의 지도자들로부터 일어나길 바랍니다.” 마침 이 글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60대 목회자가 교회에서 10대 여성도를 성폭행했다는 보도가 인터넷 속보로 올라왔다. 또한 부흥의 준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교회내 분쟁, 교단내 분쟁으로 일그러진 한국 교회에 관한 소식들도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있다. 사실 파울이건, 오워 박사건, 예언 자체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워 박사의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듯 하다. 오워 박사와 로렌 커닝햄 목사의 메시지를 통해서 한국 교회와 성도가 묵상하고 깊이 돌아봐야 할 것들이 있다. 갑자기 한국에 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그들의 메시지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도 깊이 인식하는 내용이다. 인식하지만 돌아서지 못하는 것들이다. 국민일보는 지난 12일 인터넷(missionlife.co.kr)에 메인 기사로 오워 박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게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사를 클릭했다. 평균 조회수를 훨씬 상회하는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는 생소한 한 젊은 케냐 박사의 이야기에 수많은 한국 크리스천들이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흥미 때문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 이를테면 영적인 공명현상이 있는 것일까? 오워 박사건, 커닝햄 목사건 그들의 경력을 볼 필요는 없다. 예언도 너무 깊이 생각하면 자충수에 빠진다. 우리에게는 예언보다 더 중요한 성경이 있다. 성경에서도 수없이 비슷한 '예언'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와 전했던 그들의 메시지만은 반드시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교회 모습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목회자건, 장로건, 성도건)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 메시지의 본질은 너무나 성경의 말씀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예레미야 2장13절)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예레미야 8장6절)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예레미야 8:11)

Wednesday, July 14, 2010

beetroot의 효능

근대뿌리쥬스(beetroot juice)를 마시는 것이 스태미나를 증진시키고 운동시간을 16% 가량 늘릴 수 있다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7일 엑스터대학 연구팀이 'Applied Physiology' 저널에 밝힌 19~38세 연령의 8명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근대뿌리속에 함유된 질산염이 산소흡수능을 줄여 운동시 피로도를 덜 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결과 이 같은 효과는 규칙적인 운동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효과보다 더욱 큰 것으로 나타났다.근대뿌리는 이미 혈압을 낮추는데 효과적인 것으로 잘 알려져 온 바 연구팀은 이번 연구결과 근대뿌리쥬스를 마시는 것이 심혈관장애나 호흡기장애, 대사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선수들에 있어서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이어 연구팀은 "정확한 기전은 알 수 없지만 근대뿌리쥬스속 질산염이 스태미나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Thursday, July 1, 2010

미주 한인 교회의 아픔

<이용규 선교사>
필자는 미국 텍사스의 작은 도시에 머물면서 이민 교회로부터 집회 요청을 받아 두 달 동안 거의 매주 집회로 섬기게 되었다. 어차피 이번에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게 되면 다시 미국 땅을 밟으며 이민 교회들을 섬길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무리해서 일정을 잡고 말씀 집회를 가졌다. 집회를 다니면서 각각의 지역에 세워진 한인 교회들마다 특징이 있고 사명이 있고 또 도전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민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그 분의 계획을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집회 가운데 미주 지역의 한인 이민 교회가 가진 근원적인 문제점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민 온 동기와 목적이 복음 안에서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신의 이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결국 자신들이 이민 온 땅에서 사명이 아닌 세속의 풍요와 번영을 추구했던 롯으로서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남아있는 이유는 교회 안에 자신을 위한 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구에서였다. 이민 생활에서의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자신의 자존감과 중요도를 확인시켜주는 교제의 장으로서 또 어려울 때 의지가 되는 장소로서 교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교회가 이민자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것이 근본 목적인 것처럼 오해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시카고 지역을 포함한 한인이 밀집된 대도시와 그 인근 교외지의 교회들은 지속적인 분열을 경험해 왔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적어도 세 교회 이상 교회를 옮겨본 경험이 있다. 교회에 문제가 터질 때마다 분란을 피해서 수평이동을 해 왔다. 결국 교회들간의 관계들도 깨어져서 연합 행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다수의 교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타지 생활의 위로와 의지처를 제공해 줄 “좋은” 교회들을 찾으며 이주하고 있다. 그리고 연배와 수준과 관심이 맞는 교제권을 그 안에서 찾기 원한다. 많은 이들은 끝내 그런 교회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을 다 보내버리곤 한다. 물론 이와 같이 교인들 다수가 필요만을 위해서 교회를 찾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민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한 번은 유럽의 어느 교회에서 신년에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내려놓음과 십자가”라는 주제의 말씀을 전하기에 묵상하면서 기도하다가 문득 강대상 위에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거기에는 “신년 금식 축복 대성회”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문득 당혹감이 찾아왔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주최측에서 기대하는 메시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물었다.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 제가 전해야 할 말씀이 무엇인가요?” 내 마음 가운데 질문이 찾아왔다. “너 무엇이 진짜 축복인지 아니? 그것은 나를 소유하는 것이란다.”한국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보다는 하나님 손에 들려있는 축복, 또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주어지는 대가에 관심이 더 많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전통적인 신관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천지신명에게 또는 삼신 할머니나 산신령에게 빌거나 무당 굿을 해 왔던 이유를 안다. 그들은 이렇게 비는 행위를 통해 영적인 존재에게 잘 보이고 그래서 해를 면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했다. 천지신명이나 삼신 할머니 등을 사랑해서 지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기를 원했다. 목적이 이루어지면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 분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시카고 인근의 여러 교회들이 분열을 경험하고 아파하는 상황이다. 거의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들이 갈라졌고 교인들이 흩어졌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소행으로만 보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이면에 그 공격을 허용한 큰 약점이 교회에 있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교회가 그들의 필요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는 점이다. 시카고 지역이 팽창하면서 인근에 신도시들이 자라나면서 가정을 가진 중산층 이민자들도 학군이 좋고 생활이 편리한 신도시에 집을 사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교회가 옮겨갔다. 다운타운 지역에는 유학생들만이 남았지만 외곽의 신도시(서버브) 지역에 들어간 교회들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곧 떠나갈 사람들이고 보살펴 주어도 교회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자신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논리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들 교회는 자신들의 이세들의 신앙을 돌보기 위해 영어 예배를 만들었고 그 사역의 성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 즉 교회는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지역의 교회들은 사명을 잃어 버렸다. 관심이 내부를 향하면서 교회에서는 누가 더 많은 입김을 가질 것인가를 가지고 다투기 시작했다. 필자가 뉴저지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한 알의 밀알’에 대해서 묵상하게 하셨다. 썩어지는 밀알을 통해서 수많은 열매가 맺히듯이 교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연합이라는 것은 간단히 “나 잡아먹고 당신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나를 밟고 당신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죽고 희생할 이민자 교회를 찾고 계신다는 메시지였다. 당신의 한 교회가 죽어서 다른 많은 주변의 교회가 살아나고 귀한 연합의 열매가 맺히기 소망한다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교역자 분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 메시지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십자가 복음을 경험하지도 누려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민의 목적과는 다른 목적의 이민이다. 그 예가 될만한 사례 두 가지를 잠시 나누고자 하는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지만 보안상의 문제가 있어서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현재 중동 지역의 이슬람의 견고한 진으로 둘려진 도시 가운데 필리핀 기독인 여성들이 들어가 있다. 그들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하여 가정부 또는 보모라는 신분으로 그곳에 들어간다. 그리고 귀족과 명망가 자제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양육하며 복음을 심어주고 있다. 때로는 성폭력의 위험 가운데 노출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그녀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체험하는 일이 일어난다. 중국의 가정 교회 지도자들 중에 많은 수가 중동 지역의 한 국가의 부유층 종교 지도자 가정으로 가정부나 하인 신분으로 들어갔다. 말을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삼년간 급료 없이 그 집에서 봉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계약 기간 동안 정성껏 주인을 섬겼다. 그러나 보통 일년이 지나면서 주종 관계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에 있는 아픈 지체를 위해 이 중국인 가정부들이 기도하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의 삶과 기도에 담긴 능력을 보면서 그 가정에 있는 구성원들이 그들이 믿는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하고 제자화가 진행되었다. 그와 관련된 놀라운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으며 그 지역으로 성경이 지속적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갈 때 주인들이 감사의 뜻으로 자신들이 가진 희귀 보석들을 선물로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그것들을 타선진국 선교 단체나 교회에 보내주었다. 우리가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가정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이민자 교회가 선교 헌금을 많이 하고 선교지를 위해 많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내심을 받은 땅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이민자로 그리고 선교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학 교육을 받고 선교 훈련 과정을 마쳐서 파송 받아야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보내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내 몫의 십자가를 들고 따르는 사람이 선교사이다. 그 선교의 삶을 이룬 자는 선교지에서 온 선교사가 그 삶을 나눌 때 동일한 감동으로 반응하며 동일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Wednesday, June 30, 2010

은퇴를 앞둔 이동원 목사 인터뷰

미주뉴조 인터뷰--

은퇴를 앞둔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는 '홀가분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 목사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로서가 아닌, '자연인 이동원'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마음이 가볍다며, 담임목회의 짐을 벗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게 되어 즐겁다고 말했다. 이동원 목사는 인터뷰를 통해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 은퇴 후의 계획, 후임 목회자 선정 배경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최근 이민 교회 목회자의 한국행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후임 목회자 선정 과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밝혔다. 이 목사는 청빙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작업까지만 개입했고, 이후 청빙위원회가 기준에 따라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협의해, 후임 담임목사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애초부터 특정인을 지목하고 추진한 것이 아니라, 조사와 협의 과정을 거친 자연스런 결과라고 설명했다.

목회 현장에서 물러나는 이 목사는 후배 사역자들을 위한 목회적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 목사는 “자기 치유가 덜 된 사람들은 너무 빨리 목회 현장에 들어오지 말았으면 한다"며 목회자의 치열한 자기 성찰을 주문했다. 이 목사는 또 한인 교계에 만연한 분쟁에 대해 “아직 한국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사가 강자”라며 분쟁 국면에서 목회자의 자기 희생을 강조했다.

한국 교회 내에 건축 흐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필요가 없는 교회까지도 건축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며 건축이 일종의 트렌드가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최근 교계가 한국 사회의 보수화를 이끌며 각종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는 "교회가 연구 없이 특정 이슈를 성급히 지지하면 위험하다"며 우려 섞인 지적도 했다.

Thursday, June 3, 2010

악은 현실이다

“악은 현실이다” (Evil Is a Reality) 김영봉--마태복음 26:36-46
1.
내일은 Memorial Day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현충일’입니다. 크고 높고 고귀한 뜻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와싱톤 DC에 있는 한국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기억하시지요? Freedom Is Not Free. “자유에는 값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운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젊은 날의 한 때를 그렇게 희생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기원합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직면하게 해 줍니다. 전쟁은 항상 자유나 인권 같은 고상한 목적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난 전쟁 중 절대 다수는 인간의 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터는 인간의 악마성이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현실 앞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게로 하여 거침 없이표현되는 개인의 악마성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인생사를 주관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가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에 처하여 더 큰 혼란스러움을 경험합니다. 선하고 사랑 많고 능력있는 신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만한 단서를 찾기 어렵습니다.

소설 <오두막>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담한 악의 현실을 소재로 듭니다.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 당하고 성폭행 당한 다음 살해 당한 사건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악의 현실입니다. 그 악의 현실 앞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맥이 견지하고 있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신이라면, 그같은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은 셋 중 하나입니다. 1)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2)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악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3)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뜻이 없거나.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맥의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실 것입니까? 얼마 전,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피해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2009년 가을, 한국에서 일어난 ‘나영이 사건’은 그 참혹성으로 볼 때 ‘미시 사건’보다 더 심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한 인간에게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가 능욕을 당할 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같은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기에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폐기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2.
영국의 신학자 톰 라잇(Tom Wright)은 문명 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잘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 사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낭만적인 ‘진화론적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고, 문명의 이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을 대하는 데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공격할 때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예외인 줄로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숙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3쪽.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악에 대해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톰 라잇은 현대인들이 악의 공격에 대해 보통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악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모든 문제를 정부 책임이라고, 사회 책임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 책임이라고 비난합니다. 둘째, 그 반대 극단으로서,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이 두 가지 증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유명인들의 자살 뉴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현대판 전염병 우울증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이같은 미숙한 반응으로 인해 악의 현실은 더 심해지고,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 효력이 없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깊이 상처 받고 앓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현실에 대해 믿는 사람들은 자주 너무도 기계적으로, 너무도 교리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티에 일어난 지진이 부두교(The Voodoo)를 믿은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단정합니다. 거대한 쓰나미로 동남아에 재난이 닥쳤을 때도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맥이 당한 것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성급하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뭔가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말인지, 그리고 악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리고 그 단정이 기독교를 얼마나 해괴망측한 종교로 보이게 만드는지요!
3.
소설 <오두막>에 대해 신학적인 해설서를 쓴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그의 책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Meeting God in the Shack>에서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철학 교수는, 아무리 참혹한 비극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수도 자신의 아들을 잃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고 또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무덤 옆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34쪽, “I will never tell another parent whose child has died, ‘It was God’s will.’”p. 20)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견디기 힘든 악의 현실을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혹은 이혼으로 인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해, 혹은 심각한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힘겨울 때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분들이 던지는 말들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아픈데, 앞에 앉혀 놓고 훈계를 하는 사람이 없나,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나, 심지어는 심문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리다 모랜(Rita Moran)이라는 분이 서른 네 살짜리 딸을 잃고 쓴 시, “제발”(Please)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받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The Compassionate Friends의 웹 싸이트에 올라 있는 것을 제가 우리 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발, 내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발,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이곳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 곁에 없는 것이 문제이니까요.
제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으니 됐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 그 애가 고통 받아야 했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발,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버티고 계속 살아가라고 말하지 마세요.이렇게 버티고 있잖아요?
제발, 좀 나아졌느냐고 묻지 마세요.
상실의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발,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분이 일부러 이렇게 하셨다는 뜻인가요?
제발, 적어도 그와 함께 34년을 함께 살지 않았느냐고 위로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제발, 신은 인간에게 견딜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내력의 정도를 누가 결정하나요?
제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제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진실로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발, 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내가 울어야 한다면 울도록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악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묘사한 시입니다. 생각해 보니, 리타 모랜이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말들 가운데 많은 말들을 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습니다. 저의 생각 없는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를 생각하니, 식은 땀이 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앞으로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겪어 본 분들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악의 현실을 경험했던 분들이 눈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4.
악의 현실에 대해 건강하고 성숙하게 반응하려면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각각의 악의 문제에 대해 단순하고 명쾌한 정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며,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악이 왜 생겼으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신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왜 때로 악에 희생 당하며, 악을 일삼는 자들이 왜 때로 번영하는지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종교적 천재들이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겸손해지고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번민하되, 섣불리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톰 라잇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악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는 한 고상한 기독교 전통은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악에 대하여 어떤 분석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를 축소해 버린 것입니다. (43쪽)

오늘 읽은 본문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악의 현실 앞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악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37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로 표현하기도 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3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현실을 완전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지, 그분은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39절, 42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껴안아야 하는 악의 현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제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거슬립니까?

소설 <오두막>에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내려 앉아 걷고 있다면, 어떤 필요를 위해 자신을 제한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당신 자신을 제한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도 스스로 신성을 제한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그분이 악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심하게 동요되었던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과 똑 같이 악의 현실을 대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악의 현실을 끌어 안고 그 악을 선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5.
둘째, 악의 현실은 대면하여 통과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로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않은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그 사람이 당한 악의 이유에 대해 정답이 있어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설명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고 나니, 이제 슬픔이 사라지는군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 맞은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머리가 띵하고 멍한데 무슨 말이 들어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처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의 문제와 관계하여, 하나님조차도 고난의 터널을 우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악을 한 순간에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행했던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악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진실로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의 현실 앞에서 당연히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번 그같은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연극도 아니었고 쇼도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분도 악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셨습니다. 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처럼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시면서 주님은 믿음을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46절). 예수님은 그렇게, 악의 현실을 마주하기로, 그리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지나가기로 결정하셨고, 그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마음이 동요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도 그러셨다면, 우리가 어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고난을 직면할 용기와 담력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심장을 통과하고 났을 때, 비로소 고난은 변모하게 됩니다. 불교가 말하듯, 고난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엄연한 실상이요 현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면하고 겪어 냈을 때, 고난은 축복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6.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은 처음에는 왜 내 딸 미시를 죽게 했느냐고 하나님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는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분에게는 그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기만 했으면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 때문에 맥은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미시에게 벌어졌던 사고를 내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까? 물론 있었지…… 첫째, 내가 애초에 창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았겠지. 이런 질문들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둘째, 나는 미시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창조하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나는 둘째 방법도 택하지 않았지. 그 이유를 너는 지금 이해할 수 없어. 지금으로서 내가 네게 대답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지. 내가 미시를 죽게 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선한 것을 만들어 낼 거야. (365쪽, translation is mine, p. 224)

하나님께서 맥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의 현실을 마주한 사람에게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으로써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나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많은 질문들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정금같이 연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계십니까? 악의 현실을 마주하여 흔들리고 계십니까? 악의 몽둥이에 얻어맞은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상실의 아픔과 고통 중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라고 물으며 몸부림 치고 계십니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요, 관계요, 우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통해 사랑과 관계와 우정을 발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를 통해 그같은 도움을 찾으실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일이 없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가지기 쉬운 낭만적인 낙관주의나 헛된 기대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악의 현실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의 예상이 맞는다면, 악의 현실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성숙하게 반응하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형제 자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우리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임을 알고, 고난 당한 사람들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어떤 악의 현실이라도 마주할 수 있는 믿음과 시각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난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건, 주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으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모든 것을 사용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그것을 여러분도 아십니까? 그것을 아시고, 믿으시고, 매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난으로써 고난을 이기고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주님,악의 현실 속에 있는 저희를 도우소서.때로 저희는 이리 떼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악의 세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저희는 정신을 잃고 휘청거립니다.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저희도 주님처럼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고난이 축복이 되는 기적을저희도 경험하게 하소서.아멘

Saturday, May 29, 2010

최춘선 할아버지의 맨발은 무엇인가?

“최춘선 할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길을 봤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달랐다. 그분의 관점과 전략을 보게 되었다. 영상을 통해서 내가 혼자 하면 평생 해도 하지 못할 일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도구였을 뿐이고 최춘선이라는 한사람의 충성에 하나님이 축사하신 것이라 본다. 맨발로 표현된 충성이라는 덕목을 통해서 조폭들만도 못한 우리 크리스천들의 피상성과 유치함을 벌거벗긴 것이다. 내가 그랬다. 아닌 듯 해도 다들 예수를 빙자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간 실존적인 허기를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나였지만, 이제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분이 맨발이 된 계기를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관점과 전략과 역사라는 것은 과연 다르구나... 내 영혼이 계속 놀라면서 그것이 뭘까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지금 굉장히 많은 것을 보게 되었고, 이제는 작업을 하고 책을 쓰면서 나름대로는 더 조심스럽다. 이따금 기도 중에 아버지의 통찰력을 보여주실 때마다 그 실존에 비친 나를 봤을 때 부끄러웠다. 우리가 영광스런 복음에 대해서도 아직 잘 알지 못하면서 부흥을 외치는 현실이 너무 한심스럽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최춘선 할아버지를 통해 분명히 목도하게 되었다. 엄청난 자유를 경험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천명이 내 앞에 있어도 두렵지가 않다. 주변의 다양한 평가와 상관없이 자기가 갖고 있는 소명에 책임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내 안의 동기가 가장 중요하고 사명은 각자 각자이다.”

- 김우현 감독과의 인터뷰 중에서

Friday, May 28, 2010

용서가 세상을 바꾼다

“용서가 세상을 바꾼다”(Forgiveness Transforms the Universe) --에베소서 4:25-32 <김영봉>

1.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아픕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뿐입니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대안입니다. 또 하나의 대안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 치유를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신이 독방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어려움과 힘듦을 견디는 것만이 나 자신과 이 세상에 희망을 끌어 올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품고 있던 ‘거대한 슬픔’은 사랑하는 딸 미시를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지만, 더 깊이 헤쳐 보면 그의 마음에 누적된 분노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린 딸을 해친 살인마에 대한 분노, 딸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그의 마음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 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맥에게는 세 종류의 용서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셋째, 그는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와 자신의 딸을 해친 살인마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이 셋 중에 그 어느 것도 용서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용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맥은 분노와 앙심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는 것이 잃어버린 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생각도, 용서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꿈 속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은 그가 전혀 원치 않았던 용서를 갈망하게 만들었고,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용서를 실천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분노를 다시 돌아보고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맥이 경험했던 세 종류의 용서를 꿈꾸고 기도하며 선택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혹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힘겨워 할 때가 옵니다. 그 각각의 경우에서 어떻게 용서를 꿈꾸고 실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의 말대로, “용서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There is no hope without forgiveness). 그래서 오늘은 세 종류의 용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2.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씀에 놀라실 분들이 계실 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한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용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을 당신의 절대 진리에 따라 절대 사랑으로 행하시기 때문에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할 이유는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분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분노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혹시 그런 감정이 든다면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해야지요. 어떻게 감히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교리적인 신앙은 비정한 악의 현실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이나 분노가 스믈스믈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맥과 같은 입장에 처하면, 그같은 감정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을 잠시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분노를 퍼붓는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에 얼마나 화가 났던지,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렘 20:7)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시편을, 그리고 욥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수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대들며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노를 그냥 참고 지켜 보십니다. 때가 이르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지만, 그 전까지는 잠자코 지켜 보십니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들이 그러시듯 하나님은 분노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분노가 얼토당토 않은데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분노가 잦아들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르면 그 모습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아버지는 분노한 큰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 분노한 사람에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렇게 하여 너의 분노가 풀린다면, 마음껏 화를 내거라. 나에게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은 안전하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네 분노를 쏟아 놓아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섭섭하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믿음이 없었나?”라면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기도로써 혹은 눈물로써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소설 <오두막>의 맥처럼, 그리고 욥기의 주인공처럼, 하나님께 대해 정직한 분노를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실은,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서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내려 놓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분노를 외면하거나 억압하거나 부인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죽어 버립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껍데기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형식일 뿐입니다. 맥이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 안에 그의 마음은 없었습니다. 분노가 하나님과 맥 사이를 가로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 적절하게 표출되지 못한 분노,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3.
둘째,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때때로,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데, 혼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소설 <오두막>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짠한 느낌을 준 사람이 맥의 넷째 딸 케이트입니다. 미시가 실종된 후, 케이트는 스스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에 숨어 버립니다. 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맥과 그 아내 낸은 속을 태웁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어떤 노력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맥이, 아내와 함께 친척 집에 간 케이트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묻습니다. “케이트는 어때?” 그러자 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맥, 나도 좀 알고 싶어.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 애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식구들이랑 같이 있을 때면 껍데기를 벗고 나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다시 쏙 들어가고 말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애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게 해 달라고 파파에게 계속 기도했지만……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 (30쪽)
꿈 속에서 경험한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대화 중에 하나님은 맥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케이트는 자기 때문에 동생 미시가 유괴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빠와 카누를 타고 놀다가 케이트가 아빠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맥은 손을 흔들어 응답했고, 케이트도 아빠에게 응답하려고 노를 치켜 들었습니다. 그 순간 카누가 뒤집혔습니다. 맥은 물에 빠진 두 아이를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고, 그 사이에 미시가 납치되었습니다. 케이트로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현실로 돌아온 맥은 케이트를 따로 불러 미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케이트에게 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넵니다. “케이트,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긴장을 합니다. 맥이 다시 말합니다. “딸아, 그 일에 대해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는단다.” 그러자 케이트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언제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걸요. 아빠와 엄마가 날 원망한다고 생각했고요.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맥은 딸을 위로하며 이렇게 응답합니다. “케이트, 그 일을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거고 우리는 그 사건을 버텨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거야. 우리 모두 함께. 알겠지?” (이상 401-2쪽, p. 246)
케이트처럼, 일어난 어떤 사건을 두고 스스로를 징계하고 그 징벌을 매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은 맥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미시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껴졌고, 그래서 스스로를 징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났고, 케이트의 마음에서도 그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 폴 영은 독자들에게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징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분이 아침에 다른 교우와 테니스를 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함께 테니스를 친 교우는 심한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전 날 밤, 자신이 전화를 하여 테니스를 치자고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그 교우님은 “내가 만일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 사고를 피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내 친구를 죽게 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분은 심한 죄책감에 짓눌려 장례식을 치뤘고, 장례식 후에도 그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오랜 친구와 우연한 자리에서 동석하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세상을 떠난 그 친구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대화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고백하는 데까지 갑니다. 그 고백을 듣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입니까? 저는 의사인데, 내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다 내 잘못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순간, 그 교우님은 세상 떠난 그 친구가 그 의사 친구를 보내어 자신을 위로해 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난 그 친구는 늘 그렇게 친구들을 위로하고 품어 안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책감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로부터 서서히 스스로를 용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와 같은 마음의 짐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 계신지요? 나만 아는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나를 징벌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한 범죄가 아니라면, 자신을 용서하고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케이트처럼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안에 자신을 감금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4.
셋째,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상처는 아픔을 느끼게 하고, 그 아픔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분노가 쌓이면 마치 몸에 난 종기처럼 응어리가 됩니다. 혹은 매우 깊은 상처를 받으면 풀기 어려운 분노의 응어리가 생깁니다. 그 응어리가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 영적인 체증이 생깁니다. 이것이 마음과 영혼을 짓누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여러 가지의 질환을 만들어 냅니다.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고, 아무 이유 없이 열이 오르며, 목이나 명치에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CT 촬영을 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분노의 감정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과 상황을 잘 다스려야 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31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뭉쳐진 응어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 사람을 진실로 용서해야만 풀어집니다.

그런데 때로 용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을 때, 혹은 나에게 준 상처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일 때, 분노는 더욱 커지고 용서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사과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상처 때문에 아픈데, 너는 사과하여 짐을 벗으려고 하느냐?”는 생각에 속이 뒤틀립니다. 때로는,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그런 상처를 입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사랑스러운 딸을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는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맥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토로합니다.

파파, 나의 미시를 죽인 그 더러운 놈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놈이 여기에 있다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어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당한 만큼 그놈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어요. 정의를 이루지 못할 바엔 복수라도 하고 싶어요. (368쪽)

때로, 용서는 어렵습니다. 불가능해 보입니다. 용서하기가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억울하게 느껴지고,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만큼, 아니 그 이상 당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친다 해도, 내 마음에 받은 상처는 ‘내가’ 갚아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혼자 만큼은 냉엄한 심판대에서 내려 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상처 받았을 때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나의 앙심과 증오와 원한을 통해 내가 벌하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나의 원한과 증오심으로써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아십니까? 용서하는 것이 때로 죽기보다 힘들지만,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보더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서함으로써 자유함을 얻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소설 <오두막>에서 파파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란 너를 산 채로 먹어 없애는 힘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370쪽, p. 227)
5.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은 분노하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부여하신 건강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자주 분노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속 좁은 투기쟁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질투’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감정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은 냉혹한 관리자가 아니라, 감동하고 기뻐하며 실망하고 후회하며 분노하는, 인격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분노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정당하고, 바르게 표출되지만, 인간의 분노는 자주 근거 없이 폭발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분노를 잘 못 표출하면 ‘죄’가 됩니다. 분노를 마음 안에 쌓아놓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쌓인 분노가 있다면, 결국 용서에 이르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는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 4:26-2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익은 용서는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서두를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볶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 없는 목석 인간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자신을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 마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서 그 분노를 품어 익히시기 바랍니다.

분노를 품에 안고 그 해소를 열망하면 머지 않아 때가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용서를 선택하고 결행하면 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했듯이, 용서는 사건(event)이기보다는 과정(process)입니다. 용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완성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용서를 열망하고 있으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분노가 익습니다. 분노가 잘 익었을 때 용서를 선택하면, 그 응어리는 녹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금새 녹아 버리고,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6.
성경은 용서를 자주 명령형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32절). 용서하는 것이 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명령이 잔인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는 인간을 과대평가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죄성과 나약성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려워 하는 우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우리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를 행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명령하셨습니다.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용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후반부에서 성령의 역할을 맡은 사라유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용서할 때마다 이 지구는 변해요. 당신이 팔을 뻗어서 누군가의 마음이나 삶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 세계는 변해요. 눈에 드러나건 아니건 모든 친절과 봉사를 통해 내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되죠.”(386쪽, p. 237)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이웃을 변화시키며,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30절)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쓴 물을 뿜어내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 하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징벌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분노를 쏟아 놓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씨름하며 아파하면서 치유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용서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환히 웃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비로소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니 온 우주가 변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 기적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용서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초청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대답해 보십시다.

“예, 제가 오늘 용서를 선택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먼저, 용서할 그 사람을 향해 마음으로 선언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자녀의 선언에는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374쪽, p. 229) 그러니 용서를 선택하고 선언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마음 안에 용서가 영글게 하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만나십시오. 그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선 여러분의 마음에서 매듭을 푸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신이 상처를 준 사실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 이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품어 익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열망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어느 날, 소나기같은 은혜가, 혹은 이슬비같은 은혜가 내릴 것입니다.
혹시, 오래도록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징벌해 온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시간, “네가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러분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께 섭섭함이나 분노를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러니 그 마음을 내게 쏟아 놓아라”라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분노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마침내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잠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용서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저희를 용서하신 주님,저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상처를 당하여정직하게 분노하게 하시며,지혜롭게 분노를 다스리게 하시고,때를 따라 용서를 선택하게 하소서.용서로써 나를 바꾸고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꾸며세상을 바꾸고주님을 웃게하도록,주님, 저희를 도우소서.아멘

지금은 조금 아파도

지금은 조금 아파도-- 범서야, 삶은 마치 조각 퍼즐 같아.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실망과 슬픔의 조각이 네 삶의 그림 어디에 속하는지는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단다. 지금은 조금 아파도, 남보다 조금 뒤떨어지는 것 같아도, 지금 네가 느끼는 배고픔, 어리석음이야말로 결국 네 삶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의미있게 만들 힘이 된다는 것, 네게 꼭 말해주고 싶단다. 장영희의《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중에서

요즘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 아파요. 예전에 애써 묵혀 두었던 아픈 기억들이 잠을 깨웁니다.

Wednesday, May 12, 2010

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아나밥티스트 김창규 <복음과 상황 170호 2005.10.15 >

16세기 종교개혁을 살펴보면 기독교 내의 부패한 기존 세력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목표는 유사했으나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과 같은 온건한 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꾸고자 했던 급진적 세력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이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에 대한 교회사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였고, 1920년대가 넘어서야 비로소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입장에서 역사가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다시 말해 1960년대 이전까지 재세례파는 마치 대부분의 미국 서부 영화에서 백인은 문명화된 개척자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인디언은 잔인하고 무지한 이들로 묘사되었던 것처럼, 종교개혁 주류세력의 관점에서 소수파인 그들은 부당하게 평가되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에 출현한 재세례파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며, 그들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이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이단자, 광신자 또는 반란자인 아나뱁티스트?

재세례파(Anabaptists: Re-baptizers)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할 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종교개혁이 한창인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쮜리히에서 쯔빙글리와 함께 개혁운동을 펼치던 그룹 중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온전한 교회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그들만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중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확신하여 스스로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신자의 세례’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로 신자의 세례는 스위스 쮜리히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모라비아, 그리고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러나 재세례파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추구하는 신앙적·교리적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재세례파 운동이 한 사람의 신학사상을 조직적으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동시대에 성경에 근거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소한 신자의 세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하지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지금까지 시행해오던 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심한 냉대를 받았다. 루터는 급진종교개혁자들을 가리켜 “광신자들”이라고 불렀고, 칼빈은 더 나아가 “미혹된 자들”, “두뇌가 산만한 자들”, “고집쟁이들”, “악당들”, “미친개들” 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불링거(Bullinger)는 심지어 “그들은 마귀적인 원수들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현대 역사가들도 재세례파에 대하여 그리 너그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영국의 사학자 엘튼(G. R. Elton)은 재세례파들이 주장하는 신학은 이성을 부인한 비합리적이고 심리적으로 불균형적인 망상에서 탄생한 격렬한 현상으로, 그들은 인간이 직접적 영감을 받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재세례파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기존교회의 전통으로 인정되던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이다. 당시 가톨릭에서의 유아세례란 성례전의 의미를 넘어서, 국가 교회 내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것이며 또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는 곧 교회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법을 위반하여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하는 세례론이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만, 유아세례가 하나님의 자녀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으로 인정하는 데는 유사한 부분이 있으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로 인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염려는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둘째 신자의 세례를 시행한 그룹의 신앙 패턴이 지역과 리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란 ‘종말론을 강조하며 폭력적인 사상을 지닌 그룹’이란 인식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경우 재세례파는 1534~1535년 북부 독일 뮌스터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과 연관해서 판단되었다. 재세례파 중에는 폭력적 성향을 지닌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믿고, 계시를 통해 새 예루살렘이 뮌스터라고 주장하며, 폭력적으로 이 시를 점거하고 신자의 세례를 거부하는 이들을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라이덴의 얀이라는 자는 자신을 스스로 ‘만백성의 의의 왕’으로 추대하여 그곳에서 신정통치를 시작한다. 이들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군이 공격이 시작되고 결국 유혈 대학살로 이들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위의 두 가지 관점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재세례파를 묘사한 것에 비추어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왔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반정부적 집단을 형성하였기에 그들은 국가에 대한 반란자들이고,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이단자들이란 것이다. 더욱이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 즉 종말론적 예언과 예수 재림의 계시, 구약의 관습을 그대로 좇아 행하는 중혼제도, 재세례를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것 등은 분명 이단자로 낙인 받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재세례파에 대한 이런 평가는 몇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 첫째 그들이 주장하는 신자의 세례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질서를 깨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의 의미를 좇아 행함으로써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권력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유아세례의 거부가 가톨릭의 핍박을 유발한 것은 당연했을지 몰라도, 교회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던 개혁자들에게도 걸림이 되었던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쯔빙글리와 같이 국가의 힘을 입어 개혁을 주도하는 이들에게 유아세례의 거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교회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을 말하며, 이는 더 이상 국가의 권력을 업고 개혁을 추진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유아세례의 주장은 성경적인 옳고 그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개혁을 위한 정치적 논리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뮌스터사건이 재세례파를 대표하거나 정의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단지 여러 분파의 재세례파들 중에 일부였고, 실제적으로 재세례파의 큰 줄기인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재산공동체인 후터파(Hutterite), 북부 독일과 화란의 메노나이트(Mennonite) 등의 그룹과는 극히 대조되는 신학과 삶을 보여준다. 뮌스터 사건을 재세례파의 전형적인 또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게 되면 하나의 잘못된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재세례파의 신학과 삶그러면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신학의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재세례파의 운동은 한 사람의 신학에 의해 시작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서로 다양한 신앙과 신학의 노선 중에서 이 운동의 동기와 그들간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재세례파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재세례파 신학의 이해는 먼저 그들의 성경관으로 시작해야 한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처럼 재세례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교리와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명령과 법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따라야 하는 규범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약보다 신약을 더 강조하였는데,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면, 신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성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성경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론 (Christocentrism)으로 연계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규범이며 행동지침이다. 재세례파들이 강조하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 내린 명령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실천했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세례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죄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의 삶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헌신하며 살겠다는 결단이다. 이것은 세례가 죄를 씻는 하나의 성례전임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 믿음이 선행되지 않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기에 재세례파에게 있어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유아세례의 실행은 예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따르려 했던 재세례파들의 모습은 그들의 교회론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했는데, 참된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자신이 죄인임으로 스스로 고백하여 모인 이들 즉 신자의 세례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교회는 국가로부터의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철저히 독립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전쟁과 종교박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의 폭력 앞에서도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를 지켜나갔다.신자의 세례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열심은 교회 내에서의 제자도와 이에 따른 공동체의 치리로 나타났다. 교회는 공동체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격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자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사랑 안에서 그러나 엄격함으로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가 ‘그리스도 믿음이’ (believers of Christ)를 배출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재세례파들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따름이’ (followers of Christ)를 선택한 것이다.

위의 내용은 재세례파에 관한 아주 개략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소수자를 바라보고, 선입견과 편견으로 그들을 정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외쳤던 신앙을 볼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을 쉽게 이단자로 또는 반란자로 정죄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사모하던 자들이었다. 자신들의 세상적 이익에는 관심이 없던 그들, 신자의 세례가 예수의 명령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분의 삶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이로 살아가는가, 따름이로 살아가는가?

Tuesday, May 11, 2010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詩.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Wednesday, May 5, 2010

내 영혼의 오두막

<내 영혼의 오두막> 김 영봉 목사: “누구나 아프다”(Everybody Hurts)--창세기 3:1-7

1.
윌리엄 폴 영(Wm. Paul Young)의 소설 <오두막>(The Shack)은 맥켄지 앨런 필립스(Mackenzie Allen Phillips)라는 가상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줄여서 ‘맥’이라고 부르는 그는 미국 중서부의 한 농장 지대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담한 사람이었고, 보수적인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자주 술에 만취하여 부인과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입니다. 저녁 식탁에서 그는 끝도 없는 설교와 훈계를 늘어 놓았고, 즉석에서 내는 성경 퀴즈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끔찍한 벌을 주곤 했습니다.

열 세살 되던 해, 청소년 수양회에 갔다가 맥은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는 지도 교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은혜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 지도 교사가 아버지의 직장 동료라는 것을 깜빡 했습니다. 며칠 후, 지도교사는 맥의 아버지에게 충고를 합니다. 잘 한다고 한 것일텐데, 그것이 맥에게는 큰 화를 초래합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이모집에 보내 놓고는 뒤뜰에 있는 참나무에 맥을 묶어 놓고 허리띠로 때리고, 성경 구절을 들이대면서 훈계를 합니다.

약 2주일 후, 맥은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되자 가출을 결행합니다. 열 세살 나이의 소년에게 세상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크게 탈선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갑니다. 20대 초반에는 신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만나 화해했으며, 내넷 새뮤얼슨(Nannette A, Samuelson)과 결혼하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들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었는데, 두 아들은 독립했고, 조시(Josh)와 케이트(Kate) 그리고 늦둥이 다섯 살 미시(Missy)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해, 노동절 연휴, 맥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왈로와 호수 주립 공원(Wallowa Lake State Park)에 야영을 하러 갑니다. 간호사인 아내 낸은 교육을 받으러 시애틀에서 주말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맥은 세 아이와 꿈 같은 시간을 지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아들 조시와 딸 케이트가 카누를 타고 놀다가 그만 뒤집혀 버립니다. 맥은 강물로 뛰어 들어 허우적 거리는 케이트와 조시를 구조해 냅니다. 한 참 후 뭍으로 올라와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돌아 보니, 벤치에서 색칠 놀이를 하고 있던 미시가 사라졌습니다.

경찰이 오고 비상이 걸렸습니다. 간장을 태우는 초조한 시간이 지난 후, 경찰은 깊은 산 속, 버려진 어느 오두막에서 미시의 피 묻은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미시의 시신은 찾지 못했고, 경찰은 미시를 살해한 범인은 어린 소녀들만 노려 범행을 저질러 온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만을 밝혀 냅니다. 다섯 살 어린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인적 없는 오두막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되었는데, 그 시신 조차도 수습하지 못한 것입니다.

2.
그 이후로, 맥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의 마음에는 ‘거대한 슬픔’(The Great Sadness)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다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맥은 가끔 웃는 일이 있었지만, 그 웃음 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느낍니다. 맥의 감정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미시가 실종된 그해 여름 이후 ‘거대한 슬픔’은 투명하지만 무거운 누비이불처럼 맥의 어깨를 두껍게 감싸고 있었다. 그 무게에 두 눈은 흐려지고 어깨는 축 쳐졌다. 두 팔이 모진 절망과 함께 누비이불에 꿰매지고 자신도 그 일부분이 된 것 같았으며, 그것을 털어내려는 노력 때문에 항상 녹초가 되곤 했다. 맥은 매일 납으로 만든 무거운 목욕가운을 입은 것 마냥 축 쳐진 채 먹고 일하고 사랑하고 꿈을 꾸고, 만물을 퇴색시키는 음산한 낙담 속을 터벅터벅 걸어야 했다.”(35쪽, p. 27)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눈비가 심하게 오던 날, 맥은 우체통에서 발신인 주소도 없는 엽서 한 장을 발견합니다. 그 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맥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다음 주말에 [그]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파파

‘그 오두막’은 말할 것도 없이 미시가 살해된 그곳을 말합니다. 맥은 그 엽서를 받아 들고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엽서를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파파’는 아내 낸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낸 엽서인가? 도대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누가 장난한 것인가? 누가 이렇게 잔인한 장난을 한다는 말인가? 혹시, 그 연쇄 살인범이 나까지 노리고 한 수작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하지만 맥은 끝내 그 엽서를 구겨 버리고 모른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엽서를 보낸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든, 확인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처제 집으로 보내 놓고 친구의 지프를 빌려 그 오두막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전반 약 1/4의 내용입니다. 후반 3/4에서는 그 오두막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오두막에서 맥이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거대한 슬픔’을 치유 받는다는 것이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3.
주인공 맥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상처는 특별합니다만, 저자는 그의 상처를 통해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기를 기대합니다. 이 소설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치유와 변화입니다만,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먼저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도록 독자를 흔듭니다.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혹은 억압하고 살았던, 혹은 망각하고 살았던 상처를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힘은 참으로 강하고도 신비롭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독자는 자신의 상처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뛰어납니다.

지난 2월 초, 멕시코 단기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저는 이 소설을 두 번째로 읽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비행기 안에서 머무는 시간은 독서에 가장 유익한 시간입니다. 보스톤에서 휴스톤으로, 휴스톤에서 메리다(Merida)로 가는 공항 대합실과 비행기 안에서 저는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의 둘째 날, 저는 아주 특별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제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눈망울 안에서 저에 대한 강렬한 원망의 빛이 보입니다.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강렬한 적의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저는 잠에서 소스라쳐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다시 잠을 청하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 꿈에 무슨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내 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무엇일까? 그렇게 강렬한 원망의 감정을 나에게 품고 있을 사람이 누구일까?” 성령께서 그 꿈을 통해 저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필름을 되돌려 보다가, 제 안에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단정할 논리적 근거가 하나도 없었지만, 제 마음에 아주 분명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제게서 받은 상처가 그 사람에게 아직도 있다면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제게 남겨진 상처를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 후, 저는 다시 침대에 누워 부족한 잠을 보충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제 의식은 “나에게는 이같은 상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무의식 속에 있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처를 기억나게 하고, 그것을 다시 보도록 저를 일깨웠던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 하나가 얼마나 신비로운 힘을 발휘하는지요!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는 제자가 있는데, 이번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이 소설을 읽고는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작년에 구입해 놓았지만 왠지모르게 주저하면서 잃지 못했던 소설이었습니다. 그 알 수 없는 주저함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성령님의 신비로운 움직이심과 역사하심이란... 한 소설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상처들과 죄책감을 부드럽게 들추어 내고, 느끼게 하고, 그리고 동시에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4.
이 소설의 저자 폴 영도 많은 상처를 안고 산 사람입니다. 캐나다 출생인 그는 목사이면서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뉴기니(New Guinea)에서 열 살까지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폴은 원주민에게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청소년기에 그는 잠시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또 다시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이 자주 그렇듯이, 그는 졸업할 때가지 13번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로 돌아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었던 상처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로 인한 아픔의 종류를 이렇게 나열합니다. “여러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이어 잃어버리는 아픔, 겨울 한 밤중에 일어나 철길을 따라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던 아픔,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끊임없이 내면을 흔들어 놓는 그 깊고 시끄러운 수치심의 아우성, 개인적인 실패로 인해 깨어지고 지워져 버린 꿈들, 방아쇠만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일 정도로 희미한 희망.” (http://theshackbook.com/)

그는 이 모든 상처와 아픔을 억누르며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로 인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생기고, 일중독에 빠지는 등, 이런 저런 문제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럭 저럭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데 가까스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서른 여덟이 되던 해, 억눌렸던 상처와 아픔이 그 흉한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그의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독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한 순간에 난파선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다행히, 아내 킴(Kim)은 남편을 떠나지 않고, 그로부터 11년 동안 남편의 치유 과정을 함께 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상처와 치유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선물로 시작된 이 소설은 무려 29개의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자비로 출판했고, 광고와 홍보를 위해 2백 달러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2010년 현재 7백만부가 팔려 나갔습니다. 이것은 출판계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이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두에게 상처가 있으며,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잊혀졌거나 억압해 왔던 상처를 기억하도록 돕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너무 단정적이라고 하시겠습니까?

5.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곧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찢어질듯한 울음을 울면서 태어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인생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해(苦海)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정신과 의사이자 사상가인 스캇 펙(M. Scott Peck)은 그의 명저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Life is tough.”
왜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장과 이어지는 4장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는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과 평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3장과 4장에 보면, 그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과 평화에 균열이 생깁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금이 생깁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자, 인간 사이에 금이 갑니다. 2장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 벗었어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하나님께 죄를 짓고 나서는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뭇잎으로 치부를 가립니다. 그 균열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땀흘려 정복해야만 하는 관계로 타락합니다. 창세기 3장과 4장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하나의 진리를 아주 선명한 목소리로 들려 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소설 <오두막>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 가지 진실, 즉 “누구나 아프다”는 진실은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누구는 과거에 심히 아팠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별로 아프지 않다면, 앞으로 아플 것입니다. 협박이 아닙니다. 삶의 진실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Life of the Beloved)라는 책에서 친구 프레드 브랫트만(Fred Bratman)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상처받은 사람이고, 나 역시 상처받은 사람이지.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이네.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며, 너무나 구체적이고 뚜렷해서, 이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쓸 것이 많다는 점을 믿기 어려울 때가 자주 있지”(73쪽).

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고,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적어도 두 가지의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첫째,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있을 때, 누구나 때로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동안에는 나만 당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만 재수에 옴 붙은 줄 알았는데, 혹은 하나님이 나만 피해 다니시는 것 같았는데, 겉으로 멀끔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상처가 있고, 불행할 것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음을 알고 나면, 버틸 힘이 생깁니다. 때로, 다른 사람의 상처는 작아 보이고 내 상처만 커 보일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큰 상처가 있고 가벼운 상처가 있다 할 수 있지만, 상처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늘 절대적인 무게로 느껴지는 법입니다.
이 대목에서 노래 하나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미국의 록 밴드 R. E. M.이 부른 노래인데, 좋은 그림과 함께 편집해 놓은 영상이 있어서 한글 자막과 함께 여러분에게 들려 드립니다. (영상과 음악)Everybody Hurts누구나 아프다

긴 하루가 지나고 밤을, 당신 홀로 밤을 맞을 때,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느껴질 때,그래도 견디세요.포기하지 마세요,누구나 때로 울고, 누구나 때로 아프기 때문이죠. 때로, 모든 것이 엉망일 경우도 있어요.그 때, 노래를 부르세요. 당신의 날들이 어둠 뿐일 때,견디세요, 버티세요.다 포기하고 싶을 때,버티세요.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껴질 때,그래도 버티세요. 누구나 아프기 때문이죠.친구에게서 위로를 찾으세요.누구나 아파요.포기하지 마세요.그래요. 포기하지 마세요. 혼자라고 느껴지나요?아니어요, 아니어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어요. 당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면,낮과 밤들은 견딜 수 없이 길 거여요.더 이상 버티기에 너무 지쳤다고 생각한다면,때로 누구나 아파요. 누구나 울어요.때로 누구나 아파요. 때로 누구나 아파요.그러니, 버티세요, 견디세요.버티세요, 견디세요, 놓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버티세요. 누구나 아파요.당신 혼자만 그런게 아니어요.

둘째, 우리가 사는 세상이 깨어진 세상이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상처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를 보듬어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들려드린 노래는 참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상처 많은 세상의 현실을 그냥 인정하는 데서 끝난다는 점에서 부족함이 있습니다. 때로 누구나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견디고 버티면서,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내가 입은 상처에서 발생합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알고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상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진정한 희망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보듬어 주어야만 합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설 <오두막>을 가지고 씨름하는 이 기간 동안, 우리 각자가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기회를 가지기 바랍니다. 우리의 상처로 우리 자신이 우리 영혼 안에 지은 그 흉칙한 오두막을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치유의 첫 걸음입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 누구를 만나든지 상처입은 사람으로서 대하고, 그 상처에서 나오는 쓴 물을 견뎌 주며, 서로 보듬어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처의 치유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더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다만, 너나 나나 모두 다 아프다는 이 하나의 진실을 생각하고 그 사실에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위로자이신 성령의 위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상처 받은 영혼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상처의 왕이신 주님, 상처 입은 저희가깨어진 세상에서상처 입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게 하시고,저희의 상처를 대면하여 치유의 길을 찾게 하시며, 저희를 사용하여 세상의 깨어짐과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소서. 아멘.

Tuesday, May 4, 2010

코스타 25년-복음, 민족, 땅끝

나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민족은 무엇이며 나에게 땅끝은 어디인가? 코스타가 25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 민족, 땅끝... 아! 주제만 들어도 그 때의 그 순수한 열정으로 가슴이 벅차 뛰어 오릅니다. 조국의 교회여 본질로 돌아갑시다. 제발 가슴 뛰는 주제들로 헌신합시다. 깨어나라 코스탄들이여. 이제 일어나라. 나의 주 나의 사랑 예수 이름으로 영원한 코스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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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코스타 주제소개: KOSTA/USA가 시작된 지 어언 25년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KOSTA/USA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돌이켜보면, 그 안에 있었던 소중한 만남과 추억, 그리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무엇보다 KOSTA/USA를 이끌어왔던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모토가 한국 복음주의권에 시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을 감사드린다. 복음, 민족, 땅끝(삶과 신앙의 통합)은 지난 25년 전 KOSTA를 시작할 때부터 KOSTA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가치(core value)였다. KOSTA/USA가 시작되었던 1986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자. 당시 KOSTAN들은 유학생으로서 고된 삶 가운데 있었고, 암울했던 조국의 상황을 그저 멀리 타국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1980년대를 사는 한국인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복음이 진정으로 한국 민족에게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을 세상에 선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엄숙한 소명이었다. 복음이 삶으로부터 괴리되고 신앙이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당시 기독교 현실의 이원론적인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KOSTA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KOSTAN들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런 고민과 결단은 지난 25년간 KOSTA/USA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복음, 민족, 땅끝'은 여전히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일까? 처음 KOSTA를 시작했던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우리는 올해 KOSTA/USA를 통해 '복음, 민족, 땅끝'의 주제가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먼저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5년 전 복음이 우리 선배 KOSTAN들에게 소망이었듯, 여전히 복음이 우리의 소망임은 분명하다. 복음은 창조주의 선한 창조의지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인간성이 회복될 길이 마침내 열렸다는 선포이자, 끊을 수 없는 죄의 악순환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를 얻었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하지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구원에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연, 사회, 문화, 학문 등 피조세계 전체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우주적 선포인 동시에, 어그러진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예수께서 세우셨다는 공동체적 선포이기도 하다. 즉, 복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 목표이자, 민족과 땅끝의 기초가 되는 포괄적인 가치인 것이다.

민족이라는 가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음을 믿는다. 특별히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가난과 독재 등의 고난 속에서 우리를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으신 목적이 있음을 믿는다. 다만 25년 전 우리 선배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조국을 섬기는 일을 통해 발현시켰다면, 이제 우리는 자민족중심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폐쇄성에 빠지지 않고, 타국에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탤런트와 성품을 사용해 우리 조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폐쇄적이거나 이기적이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섬김’의 정체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끝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민족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복(blessing)을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나눌 것을 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땅끝은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가치이다. 그러나 땅끝의 의미는 단지 선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가 정해놓은 경계(boundary)를 넘도록 요청한다. 예배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편안한 종교행위로 신앙생활의 전부를 채우고자 하는 우리에게, 복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영역에서만 우리의 주(Lord)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가정, 사회, 문화, 인간관계, 직장 등 삶의 전 영역(sphere)에서도 역시 우리의 주로서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5년 전 우리 선배들의 통찰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적용된다.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세속화 및 혼합주의(syncretism)의 도전 또한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명목으로 세상과 대화하려는 시도가 자칫 세속화나 혼합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삶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이원론 및 혼합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피조세계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선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010년, KOSTA/USA 25주년을 맞는 이때에 우리는 복음, 민족, 땅끝의 세 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또한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도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복음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민족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 선교적인 의미로서의 땅끝의 가치, 또한 피조세계 각 영역의 복음으로서의 땅끝의 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뒤틀려진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유대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과의 언약으로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과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신실하심을 표현하셨으며, 그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빛으로 부름받은 새로운 언약 공동체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Wednesday, April 28, 2010

John 17:3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이 설명하는 영생의 의미이다. 짧은 구절이지만 신학적 이론과 탁상공론에 머물고 있으면서 선택 받았다는 자부심으로 목이 굳어 있는 관념적 신앙을 한방에 날려 버린다. 구원받는 원리를 깨닫는 것과 실제로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우리가 가지고 싶어 하고 자랑하는 지식은 마치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제자들이 가졌던 질문 “그것이 알고 싶다”에 대한 정답이다. 그 소경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에는 관심도 없으면서…내가 사랑하는 어떤 녀석은 잘 때마다 아빠를 찾는다. 아빠가 그리 좋은가 보다. 그 녀석은 아빠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고 아빠의 봉급이 얼마인지 아빠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남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녀석은 아빠를 잘 안다. 나이를 먹으면서 또 아빠를 새롭게 알아 갈 것이다. 누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Tuesday, April 13, 2010

사람만 쳐다보고 살기 때문에...

출처 주간조선- 조성관 편집위원

역대 최장수 주중대사와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金夏中·63)씨. 김대중 정부 후반기인 2001년 10월 주중대사에 임명돼 노무현 정부 5년까지 6년 반 동안 베이징에서 재직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통일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서울 온누리교회 장로이기도 한 김하중씨가 지난 1월 말 자신의 신앙 체험을 적은 책 ‘하나님의 대사’(규장)를 펴냈다. 책 출간 이후 김하중씨에게 전국의 교회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김씨는 서문에서 “나는 주중대사로 임명된 다음, 나의 정체성을 대통령이 중국에 파견한 ‘특명전권대사’이자, 중국에 주재하는 ‘하나님의 대사’라고 정립했다”고 말한다. 김씨는 본국의 훈령과 함께 ‘하나님의 훈령’에도 귀를 기울였다고 썼다. 3월 21일(일요일) 오후 7시 김씨는 서울 반포2동에 있는 신반포교회에 강사로 초대받았다. 김씨는 신반포교회의 ‘2010 새생명축제’ 기간 중 첫 번째 강사로 나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김씨는 1시간25분 동안 진행된 강연 도중 30여분을 할애해 한국의 엘리트를 신랄하게 비판해 본당을 꽉 채운 800여 신도의 호응을 이끌었다. 우연히 이 자리에 참석했던 기자는 그의 강연 내용에 놀랐다. 며칠 뒤 기자는 출판사를 통해 김씨에게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김씨는 하루 뒤 “장관 퇴임 이후 일절 인터뷰를 안한다는 원칙을 정했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왔다. 기자는 하는 수 없이 신반포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3월 21일 동영상물 중에서 ‘한국 엘리트 비판’ 부분을 발췌해야 했다.

김씨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장관, 총리, 돈 많다는 사람, 명예 높다는 사람들을 전부 만나봤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100%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사람들의 특징이 있었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 돈을 갖기 위해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모른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 사람들은 강팍하고 교만해서 함부로 아랫사람들을 대하고 욕하고 비판한다.” 김씨는 신도들에게 “왜 그런 줄 아냐”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의 사람만 쳐다보고 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저 사람에게 잘 보이면 돈 많이 벌 수 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잘 보이면 승진할 수 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잘 보이면 쥐꼬리만한 권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사람 앞에서 눈치 보고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 같은 제사장인데,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은 하나도 없고 노예 노릇을 하고 있다. 하는 짓을 보면 완전히 그 사람 종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고도 집에 와서는 권력과 자리를 자랑하고 있다.” 김씨는 “그런 사람들이 능력 있고 지혜가 있어서 그 자리에 갔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또 “그 사람들 만날 한다는 게 좋은 학교 타령만 한다”고 꼬집었다. 김씨의 강연은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저도 막말로 좋은 학교 나왔다. 그래서 좋은 학교 나온 사람들 잘 안다. 그 사람들 만날 자기 출세하는 것만 생각한다. 남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좋은 아파트, 좋은 차, 좋은 음식 얘기만 한다. 머리와 마음속에는 시기, 질투, 교만, 불안, 근심 등이 가득하다. 그런 사람들을 리더라고 한다. 그게 무슨 리더인가?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들 속에서 살아봐서 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

김씨는 여기서 이른바 엘리트 계층에 대해 비판을 했다. “좋은 대학 나왔다는 사람들 전부 이기주의자다.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전부 자기 이익만 찾아다닌다. 좋은 대학 나왔다는 사람치고 나라 생각하는 사람 거의 없다. 전부 자기 학벌과 인적 네트워크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엘리트냐? 어떻게 하면 좋은 차를 계속 탈지, 비서 있는 사무실을 계속 쓸지, 공금으로 좋은 음식을 계속 먹을지, 그딴 생각만 하는 사람이 무슨 엘리트냐?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지 말고 자손들을 위해 기도를 남겨줘라.” 김씨의 강연은 여기서 일부 기독교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어떤 기독교도는) 교회를 자기의 부(富)를 유지하고 명예를 올리고 권력을 얻는 하나의 부적처럼 여기고 있다. 무늬만 크리스천들이 무슨 리더인가.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진정한 축복을 받는 것은 남을 위해 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이다. 말로만 크리스천이고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이 많다. 계속 크리스천으로 행동하다가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에게 돈, 권력, 명예를 받고 싶으면 마치 크리스천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사람이 새벽기도와 중보기도에 나와 간구한다. 그 기도라는 게 만날 자신의 유익과 정욕을 위한 것이다.”

일부 기독교도의 행태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계속된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 사람(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듯)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떤 행사 가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동창을 통해 그 사람에게 줄을 댈 수 있을까, 온통 그런 생각뿐이다. 그런 크리스천들이 무슨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나? 무조건 좋은 차 타고 명품 걸치려고만 한다. 몸에 병이 가득한 사람들이 비싼 명품 걸쳐서 뭣하냐?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더라도 우리 크리스천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 여기서 김씨는 “나는 대사와 장관을 지냈지만 한번도 인적 네트워크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골프 안 치고도 장관까지…”“나는 공무원 생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가장 오래라는 6년 반 대사 생활하면서 누구한테 인사 부탁을 해본 일이 없다. 내가 장관할 때 ‘술도 안하고 기도만 해서 장관 하겠어’라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되는 거다. 외교관 생활 30년 이상 하면서 골프 안 쳤다. 하나님 다시 믿고 나서 세상의 모든 즐거움 다 끊었다. 20년 동안 영화를 한 편도 안 봤고 재미 있다는 드라마도 안 봤다. TV로 중계하는 스포츠 경기도 본 일이 없다. 이번에 밴쿠버 동계올림픽 할 때 집사람이 하도 보라고 해서 김연아 피겨 경기만 봤다. 골프도 안하고 술도 안 마셨지만 주중대사를 78개월했다. 주중대사 평균이 22개월인데…. 통일부 장관할 때 뒤에서 장관이 일 안하고 기도만 한다고 욕하는 사람 많았다. 어떻게 장관이 일 안할 수 있나?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기도할 수 있는 장관을 뒀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도 모르고….” 김씨는 주중대사를 오래 하니까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했다. 그때마다 김씨는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믿으세요?’라고 물어서 ‘안믿는다’고 하면 ‘그럼 중국을 사랑하세요, 중국 사람을 사랑하세요’라고 말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하면 ‘중국을 위해 기도하세요, 중국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세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1973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36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주요 경력은 주중한국대사관 공사 3년, 대통령의전수석·외교안보수석 3년8개월, 주중대사 6년반, 통일부 장관 1년 등이다. 공직자로서 이 기간 동안 김씨는 대통령 8명, 국무총리 20여명을 가까이서 보필했다

Friday, March 26, 2010

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하는가?

송만석 장로 세미나 요약 <출처: 아멘넷>: 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하는가?

1990년 고려신학교 3년 마치고 논문을 쓸때 이스라엘에 관하여 관심이 있는 것을 지도 교수님이 알게됐다. 교수님의 권유로 논문을 쓰기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고 토론했다.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데 무슨 연구를 해야하나 걱정을 했다. 그때 우리가 이스라엘을 제쳐놓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가르쳐야 겠다고 생각하며 기도모임을 시작하고 이스라엘에 관한 교제를 만들었는데 제목이 "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하는가?"라는 책이다.

1. 유대인의 왕(메시아) 예슈아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본다. 그래서 어떤때는 예수님을 왕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문제가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우리들의 왕"이자 "정복하는 영웅"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가 죽는 것을 보았을 때 즉 어린양이자 구원자로 돌아가셨을때 "이런 사람은 왕이 될수가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인 동시에 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예수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셨다.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탄생한 2천년 전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계셨던 분이다. 창세 이전에도 계셨고 구약의 모든 시대를 통해 계셨으며 또한 앞으로 올 세대에도 계실 것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모든 내용이 다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성경 말씀의 중심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 계획의 중심이 예수님이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부터 마지막 때까지 통틀어서 예수님을 이해해야 한다.과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에게 구원자로 오셨다. 그러나 지금은 십자가 상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활동들을 지시하고 계신다. 이 기간 동안에는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를 부어주고 계신다. 그리고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우리는 2천년 전에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현재 주시는 성령의 온전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또한 현재 주시는 것을 받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주님과 함께 일해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 삶 가운데 앞으로 해야 될 또 하나의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는 구원자로 오시는 주님이나 성령의 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는 왕으로서 오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그분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예수님은 과거에는 우리의 구세주였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고 계시고 다시 오실때는 정복하는 왕으로서 오실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때는 이러한 모든 차원에서 예수님을 이해해야 한다.

2. 축복의 근원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시작은 B.C. 1,800년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창12:1-3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시며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것인데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이고 능동적이시며 아브라함의 역활은 수동적이었다.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고 복을 주시며 이 민족을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겠다는 언약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스라엘은 결국 실패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원인은 이 민족을 향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한데 있다.유대인의 숙명은 예수를 세상에 나도록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사탄은 예수가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유대인들을 보호하셔야 했고 이것은 약속의 후손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였다. 이러한 안목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메시아 후손의 언약을 순수하게 지켜 내기 위한 유대 민족의 영적 연단이 설명될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을 향한 수많았던 영적인 공격도 설명이 된다.메시야가 유대민족 계보에서 나오는 한 그들 모두는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유대민족 그 전체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는데 이는 메시아의 씨가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랍은 오늘날 풍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보다 더 풍부한 중동의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그들의 인구는 오늘날 유대인 인구의 열배나 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과 부와 자원을 복으로 주셨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랍인들에게도 유효하다. 아랍인 전부가 이슬람 교도인 것은 아니다. 그들중 몇몇은 적개심에 불타는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여전히 예수를 믿고 그들의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아랍인과 유대인이 화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듯이 아랍 국가들에서 예수를 믿는 능력있는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3.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역사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40년도 안된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 티토가 4개 군단 약 8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로마 통치에 항거하는 유대인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대인 110만명이 기근과 불과 칼에 살육당했고 9만7천여명이 포로로 노예로 팔려 갔다. 그결과 유대인들은 세계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흩어진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멸시와 천대와 박해와 살육을 당하는 고난의 긴 세월을 살아야 했다. 이 재난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것이다. 1900년의 세월이 흐르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부터 다시 모여들었으나 이 재난의 여파는 아직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분명하게 예고한 말씀이 레26장에 나와 있다. 이스라엘의 흩어진 상황을 성경이 그렇게 정확하게 예언하였다면 그 원인에 대해서도 똑 같은 정확성과 권위로 얘기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당연한 추정이다. 그 이유 역시 레26장에 나타나 있다.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했고 그들에게 베푸셨던 언약도 거절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와 같은 거역 가운데 지내오고 있다. 결과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전의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대 고난을 당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고와 역사와 성경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의 일생과 그의 사역들 그리고 모두가 유대인들이었던 제자들의 기록과 편지들을 보고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에 대해 내릴수 있는 결론은 오직 한가지 '그 선지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가 세계 선교를 아무리 외쳐도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않고 회복되지 않으면 구원의 완성은 없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선교는 선교의 허무주의에 빠질수 있다. 선교의 완성인 예루살렘에 예수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이방인의 선교와 이스라엘 선교가 하나가 될때 주님이 오신다. 역사가 완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할때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4.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열심
구원이 이방인에게 미친 것으로 이스라엘의 사명은 하나님앞에서 끝이 났는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국가로서의 존재는 없어지고 말았는가? AD70년이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 견해는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일 유대인들이 버려짐으로써 이방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이스 라엘이 받아들여 지는 것은 죽은자가 살아나는 부활의 생명이 전 세계로 흘러 넘치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이방인들 중에 구원받은 자들의 숫자가 하나님의 계획에 다 차게 될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눈먼 상태에 놓여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10:22, 롬9:27, 롬11:1-4, 말씀을 종합해 볼때 이스라엘 백성중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존하시고 남겨둔 자들 곧 남은 자들을 의미한다. 렘32:37-4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려 쫓아 보내었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다시 불러 모으시는 장면을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모든 재난은 엄연한 객관적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비유적이거나 영적인 어떤것이 전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축복도 단지 비유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닌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다가올 것이다. 렘50:19-20에도 저들을 다시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하나님이 남기신 자들을 용서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와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육체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첫단계이며 필수적인 것이고 지금도 진행중이지만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는 영적인 회복은 다음 단계이며 마지막 단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도 이미 시작하셨다.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에 약 6천명 정도로 추산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그들의 활동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예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된 것처럼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이 희생이 된것이다. 이방인들이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역사가 완성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돌아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을 많은 다른 국가중의 한 국가로 보지 말고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마지막 카드가 될것이다.

5. 다시 오시는 왕 예수님과 우리의 역할
지금까지 말씀을 살펴보면 유대민족 전체와 특별히 이스라엘 국가를 위해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계획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네가지 결론을 얻게 된다.

1)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모아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거기서 또 다시 통일된 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2) 이와 같은 지리적 정치적 회복은 유대 민족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전주곡이다. 3) 이와 같은 유대 민족의 다시 모임과 회복은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4) 종국적으로 모든 나라의 운명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와 맞물려 있다.

우리가 해야하는 선포는 길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흩으신 자가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 고대 히브리어로는 더욱 짧다. 실제 세 단어로 되어 있다. 첫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둘째 단어는 흩으신 자이며 셋째 단어는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중심이 되는 과제 즉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시는 것에 우리의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하신다.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몇몇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가리키고 있는 여러곳에 선포하는 임무를 맡기고 있다.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는 것은 모든 민족들이 볼수 있도록 하나님이 높이 든 구원의 상징이다. 이 시대에 모든 민족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계획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중요하면서도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모든 민족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때가 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는데 그들이 어떻게 공헌 했는지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그때 가서는 어느 민족도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변명할수 없을 것이다.이스라엘이 당한 모든 수모와 희생과 고난은 수세기동안 아무것도 생산치 못하였다.1948년 독립된 이후에도 국가적인 수난과 고통도 단지 바람을 잉태하였을뿐이었다. 이스라엘은 살아있고 생명을 주는 자궁을 필요로 한다. 이시대의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저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도록 하는 부름을 받았다.

Thursday, March 11, 2010

한국에 다녀온 후 쓴 편지

OO님,

안녕하시지요? 저도 지난 주에 처제 결혼 때문에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학교강의가 있어서 곧바로 돌아왔지만, 5년만에 고국의 추운 바람 좀 쐬었습니다. 외국생활이 길어져서 그런지 이제는 한국이 낯설고 사람들과 그리고 문화에 왠지모르게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봅니다. 사람들이 온통 외모이야기 밖에 하지 않아요. 늙어보인다, 피부가 뽀얗다, 어디서 손 좀 봤다, 어디 미용실이 어떻다 하는 등등... 교회출석이나 헌신도와는 무관하게요... 할말도 없기도 하고 열대지방에서 폭삭 맛이 갔다는 얘기도 많이 들어 지겹고 해서 그냥 아주 조용히 있다가 왔습니다. 대인공포증이 아닌가 할 정도로 아주 조용히요. 이런 생각 혹은 결단(?)도 했어요. 나는 그냥 옛날 초가집에 살면서 학교에서 배급받은 빵 한조각도 감사하고 나눠먹던 그런 소박함으로 살아가리라... 그러다 주님이 부르시면 뒤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가리라...

주님을 기다리는 촌놈 이기명 드림

Wednesday, February 10, 2010

요한복음 6:1 - 6: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자신의 공생애 삼년 중 두 번째 유월절 무렵,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동편의 벳세다 광야로 가셨다. “빈들 이미 저무는 때, 그리고 (남자만) 오천이나 되는 허기진 무리들, 가진 것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정황이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은 이것이다.“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하지 못할 핑계가 많고, 일을 이루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오후 5시 같은 인생들에게 하시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다기 축사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원대로 주셨다. 이것은 일년 후로 임박한 자신이 행하실 일을 보여주시는 그림이다. 바로 예수님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되시고 그 떡을 떼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는 자신을 드리신 그 일이다.

Thursday, January 28, 2010

요한복음 3:3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인간의 종교도 선행도 지식도 철학도 그 아무리 선해보이는 것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매몰되어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축소하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인간이 선행이 없어서 도덕이 없어서 지식이 없어서 자신의 최선의 노력이 없어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을 인간이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인간은 구원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구원을 받는 존재이다. 구원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Thursday, January 21, 2010

요한복음 1:1 - 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The word)은 하나님께서 창조에서 역사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 분의 권능의 행위이다. 그분의 드러내심의 절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다. 요한은 예수는 태초에 하나님과 계셨고 그 분이 하나님이라고 전한다. 요한이 전하는 예수는 하나님이시거나 아니면 광인이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반응은 지금 이시간 바로 여기에서 일어난다.

Friday, January 15, 2010

그의 나라와 오후 5시 같은 인생

송병주 목사—

(중략) 유대인들의 당시 노동환경은 하루 10시간 노동이었다. (중략)오후 5시 인생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오후 5시면 누가 생각해도 포기해야 할 상황,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이다. 모두가 떠나 버린 곳. 그런데 그 시간까지 버티고 남아 있었다면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 그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했을까? 오후 5시 같은 인생을 묵상하다가 미국 대공황 시절, 짐 브래독이라는 권투 선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신데렐라맨>이 생각이 났다. 라이트 헤비급 권투선수 유망주였던 짐 브래독은 오른쪽 손목뼈가 골절되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권투선수의 삶을 접고 부두 막노동자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대공황이 밀려오고, 얼어붙은 겨울에 불을 피울 수 없는 극도의 가난의 현실 앞에서 감기와 폐렴에 걸린 아이들을 포기해야 할 단계까지 갔다. 자식들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자존심을 접고 champion's club에 가서 모자를 벗고 동전 몇 푼이라도 부탁하는 구걸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 짐 브래독. 어쩌면 이것이 바로 오후 5시까지 그곳에 남은 인생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인생의 전환점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처럼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을 찾고 있다. 자랑할 것 없고, 그저 부끄러움 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절박한 심정으로 버티는 사람에도 당신의 나라는 임하신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이런 분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구원을 가르치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님은 통렬하게 메시지를 주셨지만, 오후 5시 인생 같은 절망의 유대 땅을 향해 예수님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시간까지 인력시장이 있는 곳이면 자기 발로 찾아오셔서, 나에게 사명을 주시고 처음 된 자와 상관없이 동일하게 채우신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낙심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향해 마침표를 찍지 말라." 모두가 끝장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 희망 이 없다고 말하며, 남아 있는 자존심조차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상황일 때, 그런 상황에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지 않으셨는데 내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실패도, 그 어떤 좌절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내 육신과 영혼을 할퀴고 지나갔다 할지라도, 그래서 오후 5시 같은 인생의 자리에 서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의 나라의 일꾼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중략)

오후 5시 같은 인생에게 지금도 하나님나라는 열려있다. 하나님나라는 나의 공로와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임을 지금도 예수님은 도전하고 계신다. 천국은 나의 공로로 가는 곳이 아니다. 동시에 천국은 내가 인간적으로 부족하다고 갈 수 없는 곳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다.

앞에서 말한 짐 브래독은 가정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오후 5시 같은 인생에 다시 권투선수로 재도전한다. 헤비급이라 할 수 없는 뼈가 드러나 보일 것 같은 왜소한 체구에 부러진 오른쪽 손목 부상을 안고 권투 선수로서는 할아버지라 불러도 될 나이에 다시 링 위에 섰다.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어"라는 독백 같은 그의 말에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품꾼의 마음이 보인다. 그런 짐 브래독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팔아가며 그의 재기를 돕는 친구가 있었다.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를 격려하고 돕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도움과 부두 노동자 친구들의 눈물어린 후원 속에 황혼 길에 선 노인 같은 그가 다시 링 위에 섰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의 재기, 그러나 그는 미국 최강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챔피언 결정전에 오른다. 이 스토리를 알기에 사람들은 짐 브래독을 <신데렐라맨>이라 불렀고, 결국 그의 가슴시린 재기는 대공황에 빠져 절망 가운데 살던 미국인들의 희망이 되었다. 결국 2명이나 링 위에서 죽게 만든 절대 강자 맥스 베어와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에서 치열한 공방을 거친 끝에 결국 15회 판정승을 거두며 온 세상을 향한 희망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오후 5시 같은 품꾼의 인생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일은 '절망'밖에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할 일이 남았다면 지금도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마지막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이시다.

여호수아 5:1 - 5:5

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요단 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한 것은 언약백성의 외적표식인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 14:34).” 요단강이 마른 것은 대적으로 부터의 승리를 의미하며, 할례를 행하는 것은 징계의 때는 끝나고 언약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확실히 이사건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면서 시작하신 예수님의 행하신 것들의 예고편이다. 마음에 파장이 깊게 울린다.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Wednesday, January 13, 2010

여호수아 3:11 - 3:17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로 향하여 요단강을 건널 때 이스라엘 백성을 가로막던 거대한 세력, 강물이 끊어졌다. ‘온 땅의 주’ 그리고 ‘온 땅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로 그 땅은 회복되었다. 요단 강물이 물러나는 것은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할 세력이 무너질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다. 요단강에서 이루어진 또다는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침례는 해수면보다 낮은 땅인 여리고의 요단강에서 행하여졌다. 침례를 받을 이유가 없으신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의 시작을 세례요한에게서 침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인류를 위한 ‘큰’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는 그 분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이다. 세상의 가장 낮은 땅으로 침례를 받으러 나아가시는 예수님... 내 주님은 그런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