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Tuesday, December 29, 2009
고린도후서 12:1 - 12:10
Monday, December 14, 2009
마태복음 6:31 - 6:34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다. 그 분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약속대로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가 먼저 구하여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기도의 핵심이다. 이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의 기도, 이를테면 자신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나 아들(사무엘)을 구하는 한나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기도이다. 나를 향하고 내 중심적인 기도와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기도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기도만 열심히 하면 그 간격을 성령님의 인도로 메꿔 주시겠지 하는 것은 좀 안이한 생각이다. 자신의 자아와 생각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방적 기도도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방해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기르치신다. 오늘 하루 염려가 떠 오를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을 연습해 보아야겠다. 내 존재를 주님께 드리고 그 분의 다스리심과 그 분의 주인되심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은 가장 배고프고 어두운 인생의 계절을 지나면서였다. 이 기도는 한가로이 드리는 형식적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가 격식을 제대로 갖추어서 하는 기도라든지, 혹은 훌륭한 분들이나 하는 기도라는 것도 아주 심각한 오해다. 예수님이 소위 잘난 사람들에게 시키는 그런 기도가 절대로 아니다. 천국복음의 소식을 담은 기도이다. 어두운 그늘을 지날 때 은혜의 빛을 비추며, 삶의 무게로 신음할 때 상쾌한 자유함을 주는 너무나 절실한 기도이다.
Thursday, December 10, 2009
리처드 도킨스 vs. 프랜시스 콜린스
다음에서 울트라 진화론자 도킨스와의 대화를 보시죠. 그가 신랄하고 도발적인 것은 100% 동의하지만 그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것에는 상당한 의문이 들 것입니다. 돈버는 방법도 여러가지라는 생각과 더불어 믿음 좋은 사람들이 교회나 선교에 헌신하는 것외에 과학계에도 많이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www.youtube.com/v/VCmj_8_6KEc&hl=ko_KR&fs=1
◇ 신의 언어/프랜시스 콜린스 지음·이창신 옮김/324쪽·1만4000원·김영사 저자는 “과학과 종교가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력을 보면 이런 주장이 울림을 가질 만하다. 저자는 미국 국립보건원장이다. 물리화학과 의학을 전공한 저자는 1993년부터 6개국 과학자 2000여 명과 함께한 ‘인간 게놈프로젝트’를 총지휘했다. 2003년 이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31억 개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히는 게놈 지도가 완성됐다. 종교와 별로 관련이 없을 법한 저자의 세계관은 26세 때 치료 불능의 할머니 환자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저자에게 “왜 신을 믿지 않느냐”고 물었다. 저자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대답했지만 ‘과학자가 자료 검토도 없이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는 자각에 이른다. 해답을 찾기 위해 저자는 책에 매달렸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사모스 찬송, 고대 인도의 마누법전, 플라톤 학파까지 한결같은 목소리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법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양심과 이타심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이 오직 인간의 내면에만 있다는 것은 저자가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 사심 없는 이타주의는 진화론자에게 가장 큰 과제라고 저자는 말했다. 저자는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자에게 간접적으로 종족 번식의 이익이 돌아간다는 점을 들어 이타주의를 설명하지만 이 주장은 한계에 부딪힌다”고 말했다. “영장류를 보면 이 주장은 맞지 않는다. 가령 새로 우두머리가 된 수컷 원숭이는 훗날 생길 자기 새끼의 앞날을 위해 다른 새끼들을 제거한다.” 저자는 과학자답게 과학의 성과들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빅뱅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의 기원에는 몇 가지 놀라운 우연이 존재한다. 대폭발 직후 1000분의 1초 동안 물질과 반물질이 비대칭을 이뤄 우주의 질량이 생긴 것, 초신성 폭발로 중원소가 생길 때 양성자와 중성자를 묶는 강한 핵력이 조금만 약했어도 우주에는 오직 수소만 존재했을 것이라는 게 대표적이다. 스티븐 호킹은 “우주가 왜 꼭 이런 식으로 시작됐어야 했는지, 우리 같은 인간을 탄생시키려는 신의 의도적인 행위로밖에는 달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게놈 연구를 통해 저자는 인간과 다른 생물의 조상이 같다는 냉혹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인간과 생쥐의 게놈 크기는 거의 똑같고 단백질을 합성하는 유전자 목록도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인간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으로만 진화했으며 신이 끼어들 영역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DNA 서열에 비록 생물학적 기능에 관한 방대한 자료가 담겼다 해도 그 서열만으로는 도덕법에 대한 지식과 같은 인간만의 특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진화론, 창조론의 양 극단을 극복하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란 개념을 소개한다. 바이오로고스는 신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은 신의 의지를 표현한다는 믿음이다. 이 개념은 자연계를 이해하면서 생기는 틈에 신을 끼워 넣지 않는다. 다만 ‘우주가 어떻게 생기게 됐을까’처럼 과학이 대답하지 않는 문제에 대답할 때 신을 끌어들일 뿐이다. 책의 끝부분에 저자는 종교인들에게 부탁한다. “종교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권고에 따라야 한다.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신의 장엄함을 깎아내리기는커녕 되레 축하할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신에게 감사를 표현할 때 무식이 유식보다 더 위에 있을 수 없다.” 또 과학자들에게 부탁한다. “과학과 영적 세계 사이에서 점점 고조되는 전쟁에 휴전을 선포할 때다. 과학은 신에 위협받지 않는다. 신도 결코 과학에 위협받지 않는다. 신은 과학을 가능케 했다.” 동아일보 민병선 기자
Saturday, December 5, 2009
다윈이즘 vs 지적설계
http://www.intelligentdesign.or.kr/expelled
Wednesday, December 2, 2009
창세기 22:1 - 22:8
번제를 드릴 모리아 땅. 훗날 성전이 건립될 곳이며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곳이었다. 이삭을 대신해 번제로 드려진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그 날 아브라함은 분명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리기 위해 그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 날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렸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거나 이성의 관점으로 보면 한마디로 미친 짓을 기꺼이 감당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나 부끄럽거나 꺼리낌이 없었다.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몸에서 이삭을 주시는 하나님(롬 4:19-22).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히 11:19). 그가 믿는 하나님은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Tuesday, December 1, 2009
창세기 12:1 - 12:4
12월이다. 2009년도 이제 한달을 앞 둔 오늘 아침에 주신 말씀은 "떠나서 가라"이다. 아브람의 나이 75세는 당시 사람들의 수명을 고려하여 요즘 나이로 환산하면 대략 40대의 중년기라고 한다. 중년기는 이미 익숙해진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기피하는 그런 때이다. 떠나지 못할 이유들이 너무 많은 그런 때이다. 지금까지 받아오던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영적 영향력에서 떠나는 것으로 아브람의 믿음의 순례는 시작된다. 이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 떠남은 단순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떠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그런 구체적인 떠남을 포함한다. 고국을 떠나 온 십수년 동안 그리고 유학생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한 때로부터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있었다. 나는 주로 남아 있는 자였고 다른 사람을 떠나 보내는 입장이었다. 그 중에 여럿은 천국으로 떠나 보냈다. 타지로 보내든 천국으로 보내든 가슴 속에서 서늘하게 흘러 내리던 눈물과 울분은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나도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겠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벌려 놓은 일들과 살림가지들을 단촐하게 줄여야 겠다. 부르시면 핑계될 이유가 없이 기쁘게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게...
Thursday, November 26, 2009
출애굽에서 열방으로
http://www.youtube.com/watch?v=IMd-kdl69Io&feature=player_embedded
Tuesday, November 24, 2009
나를 살리는 소식
결정이 위대한 것일수록 그에 따르는 고통은 더욱 클 것이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듯이... 말이 쉽지 현재의 고난을 넘어가기는 어렵다. 우리가 위의 내용을 몰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그 어떤 윤리적 명령이 아니다. 세상에는 이런 "인스탄트 소식"들로 넘쳐난다. 이런 것들은 당장의 허기를 채울 뿐이며 우리의 영은 곧 시들어 버린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복음이다. 그 기쁜 소식은 우리는 태생적으로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듣기 거북한 절망적 소식으로 시작된다. 본질적으로 우리에게는 고통을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죽음의 그림자들을 이겨낼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없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부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Monday, November 23, 2009
고린도후서 6:1 - 6:10
변화는 지금의 자신을 직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과거를 기념하고 추억할 수만 없다. 나는 과거에 경험하고 배운 것들이 자신을 잘 설명하는 것인줄 알았다. 그런 것들이 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을 뿐인데. 그리고 미래의 시간으로 자꾸 미룰 수도 없다. 경험컨데, 지금의 은혜의 시간을 미루는 가장 그럴싸한 방법은 뭔가를 바쁘게 열심히 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 긴급한 종말의 때가 바로 지금 (now) 이다. 나는 오늘 은혜와 구원의 거룩한 초청에 어린시절 시커먼 손 때문에 내민 손을 잡지 못하던 그 시골 소년의 부끄러움을 안고 주님의 내미신 손을 잡는다.
Thursday, November 12, 2009
고린도후서 3:12 - 3:18
말씀을 아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그들은 구약을 열심히 읽지만 마음이 완고해져서 그 마음은 수건으로 가리워졌다. 신앙의 연수가 길어지면서 말씀에 대한 지식은 늘어나지만 마음이 굳어지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지식은 우리를 견고하게 지켜주지만 우리의 내면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부드럽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나이를 먹으면 내면이 화석처럼 굳어지기 쉽다. 굳어진 지성이 얼마나 오만하고 위험한지 경험적으로 알아가고 있다. 나는 지식이 늘어갈수록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고 의지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성령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어두운 내면에 진리의 빛을 비추시고 굳어진 마음에 성령의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Friday, November 6, 2009
고린도후서 2:1 - 2:7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심한 책망의 편지를 보낸 후 그가 가졌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있다... 목자는 한마리라도 잃어버린 양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세상의 리더는 한마리 양을 위해 쓸 시간이 없고 늘 바쁘다는 말이 입에 붙어 있다. 왜냐하면 99마리 똘똘한 양들을 위해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어 키워 내기에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영적 리더가 필요한 것은 엄청난 성과가 아니다. 한마리의 양을 향한 눈물이고 긍휼 (compassion)이다.
Wednesday, November 4, 2009
고린도후서 1:1 - 1:7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상황이 평화롭다면 찬송할 이유가 있지만, 정말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찬송이 터져 나오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면 원망이 터져 나와야 당연한 그 때,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주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증거다. 위로의 주를 찬양하는 자에게 주의 위로가 임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그런 순전한 위로는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한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전에 위로의 하나님을 먼저 찬양하며 나아가는 믿음을 주소서!
고린도후서는 지난날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때 위로를 주신 말씀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를 닦는데 어머니가 생각났다. 이가 좋지 않아서 음식을 오물오물하다가 그냥 삼키던 어머니... 공부 끝나고 돈 벌면 꼭 이를 해드리리라 했었는데, 공부가 끝나기도 전에 어느날 훌쩍 떠나셨다. 그때의 슬픔을 고린도후서가 같이 했다. 까칠해진 어머니의 손바닥을 만지는 그런 느낌을 주는 말씀이다.
Monday, November 2, 2009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인은 가을에 찾아야 할 세가지를 기도, 사랑, 고독이라고 한다. 11월이다. 11월은 영혼을 영글게 하는 영성의 달이다. 지난날 나의 기도는 너무 분주했다. 간구해야 할 것이 많아서 아뢰다 시간을 다 써버렸다. 이사람 저사람 얼굴도 떠오르고 이일저일 해야 할 일 도 많아서 나의 기도를 채워버렸다. 기도를 해도 영혼은 고갈 되어갔다. 믿음이 없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런데 기도에 매이지 않는 기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님의 사랑의 메시지 하나에 귀기울이고 주님의 숨소리를 듣고 사모하는 그분의 어깨에 기대어 영혼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기도이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면 사랑도 고백해본다. 나의 지난날 사랑도 분주했다. 뭔가 잘 해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은 늘 불안했다. 주님께도...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랑을 담은 눈빛으로 바라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고 살짝 허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영혼이 촉촉해진다는 것을... 가을에 회복해야 할 것은 먼 전설처럼 느껴지는 주님과 혼자있는 시간이다.
Tuesday, October 27, 2009
고린도전서 15:44 - 15:49
본문은 여러가지의 대조로 구성되어있다. 자연적인 몸 (육의 몸)과 영적인 몸, 첫아담과 마지막 아담, 흙에서 나온 사람과 하늘에서 나온 사람, 땅에 속한 사람과 하늘에 속한 사람 등의 병렬구조로 되어 있다. 정말 좋은 스승이 있으면 묻고 싶다. 전자의 모습으로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후자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인가? 아담의 후손으로 흙을 딛고 그 문화의 영향을 받고 사는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 우리의 부끄러운 삶의 정황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식화 부족 (이를테면 성경적 지식의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실천적 윤리부재 (이를테면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인가? 지식과 삶을 두루 갖춘 사람은 왜 이리 보기 힘든 것인가?
돌아보니 종교적 열정은 있었으나 삶의 피상적 파편들 앞에서 끙끙대면서 살아온 것 같다. 지식의 추구도 실천적 윤리도 나를 살리거나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비록 여전히 일천한 신앙여정을 지나고 있지만). 나의 삶에서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지식도 윤리도 그 어떤 성취도 아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어져서 살아나는 본질이다. 이것을 놓치면 아무리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해도 항상 겉돌게 되는 것을 알았다. 이 본질이 그리운 계절이다. 나는 오늘 기도도 묵상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리.
Saturday, October 24, 2009
로마서에 나타난 부활
부활에 관한 친절한 설명이 있어 소개합니다. 언젠가 코스타에서 뵌적이 있는 조경호 목사님이 쓰신 글입니다.
1. 우리는 아담안에서 아담과 함께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었다: 토론토에서 목회하는 목사 한분은 매주 쇼핑몰에서 전도를 한다. 어느 이슬람 청년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 청년이 이렇게 반문했다. “불가능해요. 어떻게 예수의 피가 인류의 죄를 씻을만큼 충분하다는거죠? ”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막연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용서하고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는걸까?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 해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 비밀을 출생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왜 죄인인가? 아담의 죄로인해 인류가 죄인이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될 수 있는가?” 에 대해 출생이 그 비밀이라고 말한다. 출생은 연합을 가져온다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원죄가 되어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유전설) 출생에 의한 연합(우두머리설 또는 대표설)에 의해 죄인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5:12(새번역)
인간의 게놈(Genome) 프로젝트 결과로 유전자 비밀이 밝혀지고 있다. 만일 죄의 유전자가 존재한다면 죄의 유전인자를 제거한 인간복제 시대가 열린다면 죄없는 신인류의 미래가 열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된 것은 죄의 유전설이 아니라 출생에 의한 연합 때문이다.호박씨 하나를 심었다가 죽으면 호박씨 하나만 죽은 것이 아니다. 만일 그 호박씨가 한 여름동안 300개의 호박을 열매맺었다면 호박 300개가 죽은 씨앗 하나와 함께 죽은 것이 된다. 그 300개의 호박씨를 잘 말려서 그 다음해에 5만개의 호박이 열렸다면 5만개의 호박이 호박씨 하나와 함께 죽은 셈이다. 이와 같이 아담 한사람이 죄를 짓고 죽음의 저주를 받아 에덴에서 추방당했을 때 아담안에서 모든 인류가 함께 죄를 짓고 함께 죽음의 저주를 받았으며 함께 에덴에서 추방당한 인류가 되었다. 아담 이후 출생한 인류는 아담과 <공동행위자>가 되어 죄와 사망의 사람으로 출생하게 된 것이 죄의 기원이다.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먹었으며 아담안에서 아담과 함께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출생은 출생의 시간이 다를 뿐 아담안에서 죄와 사망의 사람을 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아담안에서 출생한 인간은 죄인으로 출생했기에 살아있는 모든 행위가 죄의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사과나무에서 사과만 열리듯이 죄인으로 출생한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죄의 열매일 뿐이다.
2. 아담안에서 출생한 인간이 아담의 타락과 연합하여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인간이 죄인이 된 출생의 방식과 동일하다. 그래서 기독교를 <중생의 종교>라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통해 죄인은 의인으로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롬5:19(새번역)
인류의 두 대표는 아담과 그리스도다. 예수를 마지막 아담으로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담안에서 출생한 인간이 아담의 타락과 연합하여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다. 거듭남은 첫사람 아담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이며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자리에 초대받은 은혜의 사람들이 되었다. 중생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구속행위를 자신의 체험으로 허락받은 동참의 사람들이다.우리가 아담안에서 출생하는 방식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과 10개월의 임신기간을 거쳐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거듭남의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출생의 법칙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요1:12-13(새번역)빌리그래함은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번만 죽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오직 거듭난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모든 죄가 용서받으며 죄로부터 해방되어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3. 거듭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삶과 인격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달라스 윌라드가 말한 것처럼 ‘뱀파이어 크리스챤’이 아니다.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의 피에만 관심을 갖는 뱁파이어들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들이어야만 한다.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에게 교회를 비난받게 만들고 있다. 거듭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삶과 인격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태어난 중생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Wednesday, October 21, 2009
고린도전서 15:12 - 15: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바울이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목숨을 걸고 거짓을 전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혼은 선하고 (그래서 부활하지만) 육체는 악하다는 이분법적 헬라철학 혹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조금 양보하여 육체의 부활은 인정하지 않지만 부활의 은유적 의미(metaphorical meaning)는 인정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렇듯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생각과 통하는 방향으로 부활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설명가능한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 미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린다면 그야말로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오늘이 비록 힘들고 때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가장 소중한 내일을 남겨 두리라...
Tuesday, October 20, 2009
우리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한다
고린도전서 15:1 - 15:11
전장에서 예언과 방언을 말하던 바울은 곧바로 복음의 두가지 핵심을 다시 상기 시킨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기초하며 성령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들린 놋뱀을 보면 살리라는 말처럼 믿기 힘들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죄인인 결정적 증거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 14-15).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3). 주님! 저에게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against all odds) 주님을 바라는 믿음을 주시며 성령을 부어 주시사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Wednesday, October 14, 2009
고린도전서 14:14 - 14:19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나 자아 안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기도를 성령님께서 인도하는 기도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면 우리의 영은 새롭게 되고 건강하게 세움을 받는다.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영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도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혼적인 언어까지 확장되어 나아간다면 예언이 된다. 따라서 방언에 관해서는 우리의 초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을 많이 했다 (18절). 수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하고 뺄 것도 없는 말씀 그대로다.
RA 토레이: “참된 기도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 즉 성령님이 감동을 주고 인도하시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올바로 기도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는 가운데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지도하고 인도하시도록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의 소원을 인도하고 또한 그 소원의 표현을 인도하셔야 한다. 부주의하게 하나님의 존전으로 급히 나아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소행이다. 그분의 존전에서는 그분의 영의 임재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성령님을 보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도록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을 기다려야 하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맡겨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올바로 기도할 수 있다.”
Friday, October 9, 2009
고린도전서 13:1 - 13:7
본문에서 사람의 방언은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방언처럼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이며, 천사의 말이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2장에서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하여 말하고 14장에서 예언과 방언의 은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실상 12장과 14장은 은사에 관한 것이다.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13장은 이 두 장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있다. 본질에서 벗어나서 눈에 보이는 은사적 현상에 열광하기 쉬운 우리를 사랑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다. 천사의 말 - 사랑 = 꽹과리 소리
Thursday, October 8, 2009
고린도전서 12:1 - 12:7
흔히 중세의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한다. 히브리적인 영적 상상력을 헬라적인 사유의 체계로 논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적인 다이나믹스를 경험하는 것은 종합적인 사고가 필요한 반면 헬라적 접근은 분석적 혹은 분리적 사고가 요구된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 쉽고 뭔가 분명하기는 한데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은사.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보수적 신학배경을 가지신 분들의 은사에 대한 설교를 들어보면 상당시간을 은사자체보다는 소위 은사주의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경험에 할당한다 (그러면 말씀파(?) 들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어찌할 것인가?). 이런 설교를 듣고나면 혼란스런 경험들을 정리해주는 분명함이 있어서 후련해진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내 안에서 알지 못할 깊은 슬픔이 밀려오곤 하였다. 이제는 안다. 이를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헬라적 신학적 변증은 우리를 지켜 주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성령의 역사와 그 깊이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의 편지에서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나는 그 누구의 방해에도 성령님을 내 영혼에 샬롬으로 받아 들이는데 그 분을 인격적 하나님으로 그 분을 환영하고 그 분께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엄청난 세월을 보냈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에 울컥 감사가 터져 나온다. 기다려 주시고 찾아오신 성령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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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quick summary:
고린도 교회:
주후 50년경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주후 49-52) 중에 창립. 바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마케도니아를 거쳐 아테네로 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고린도에 와서 1 년반 동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거처(행 18:1-17).
기록동기:
주후 53년경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행18:23) 중에 에베소에 도착하여 3년을 지냄. 그동안 고린도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고린도교회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소식을 접함.
내용요약:
1-4장 : 분쟁의 부당함. 세례문제. 교만. 몸을 더럽힘에 대한 문제 지적
5장 : 근친상간 간음방치에 대한 책망, 음행자 추방
6장 : 성도간의 송사에 대한 책망
7장 : 혼인, 독신생활, 이혼, 재혼
8장 : 우상 제물의 먹는 문제
9-10장 : 자유의 절제. 바울의 모범. 운동선수의 비유.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방종의 위험
11장 : 머리에 쓰는 문제. 성찬식 집전
12장 : 은사의 다양성 (diversity) 과 통일성 (unity). 몸과 지체의 비유
13장 : 최고의 은사 사랑
14장 : 예언과 방언
15장 : 부활
16장 : 예루살렘 성도 구제를 위한 연보와 문안
흔히 틀리는 우리말
Wednesday, October 7, 2009
빌립보서 4: 4-7
4절과 6-7 절 말씀은 너무나 친숙하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5절 말씀을 지나치기 쉽다. 그리스도가 가깝는 것은 공간적 가까움 혹은 시간적으로 임박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시간적인 임박함을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에 대한 신앙을 언제부터인가 이단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리스도의 다시오심… 깨어나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하는데… 너무 졸립고 아득하다. 재림. 이것은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영적인 기상나팔이며 주님의 히든카드다. 복음은 십자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포함하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구원의 소식이다.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온전히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복음의 과거시제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예수를 믿는 것은 십자가의 보혈과 대속, 성령,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믿는 것이다. 때가 찼다. 주 예수여 오소서!
Monday, October 5, 2009
기도하는 곳에는 향기가 있다
저자는 코에 땅냄새가 배어 있어 땅냄새를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코에 땅냄새가 배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인스탄트 식품등의 냄새에 익숙해져서 땅냄새를 모르는 것이다. 땅냄새를 맡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그 냄새를 안다. 나는 어떤 나라의 공항에 도착하면 택시를 기다리면서 깊은 호흡으로 그 나라의 독특한 냄새를 맡아본다.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부는 바람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가 있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그 냄새를 즐기면 그 여행은 즐겁다. 나는 신자들이 모이는 곳에도 냄새 비슷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 눈이 보이고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 모임에 있는 동안 내가 살아나고 행복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내가 원인 모를 그 무엇에 취해서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찬양이 훌륭하고 설교가 좋고 사람들의 열심이 특심인데도 그냥 시계만 보고 끝날 때만 기다려지는 모임도 있다. 반면, 찬양이 시작되기도 전에 들어서는 순간 은혜의 깊은 바다로 빠져들게 하는 모임도 있다. 기도하는 곳에는 향기가 있다...
Sunday, October 4, 2009
Thursday, October 1, 2009
빌립보서 4:8 - 4:13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말은 잘난척하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들리는 것은 자아의 틀안에 갖혀 자신의 유익에만 관심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격려가 되는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말씀도 마찬가지다. 자기 중심적으로 보면 오해하기 쉽상이다. 궁핍과 풍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형편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의 고백이다. 다스리소서 주인님.
Tuesday, September 22, 2009
빌립보서 3:10 - 3:14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바울은 훌륭한 믿음의 모델로만 생각했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 (the anointed one)가 부어진 삶이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무슨 공짜로 천국행 기차표를 예매해 놓은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복음을 (아주 조금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믿음이라는 것을 내가 얻고자하는 그 무엇을 (기도를 쎄게 해서) 공짜로 얻는 것이라는 심각한 착각에 빠져서 살아왔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신앙의 연수가 늘어날수록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기는 커녕 솔직히 노예근성만 생겼다 (이런 점에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선생을 만나는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다). 구원은 지옥가지 않기 위해 드는 면피용 보험도 아니고, 나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다 알아서 척척 일을 처리해주는 편안한 삶도 아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채우는 삶이고 그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는 삶이다. 이것을 바울에게만 적용하면 나는 아마도 지금까지의 종살이에서 벗어 나기 어려울 것이다.
Saturday, September 12, 2009
건강정보
Friday, September 11, 2009
한반도의 분단과 신사참배 (펌글)
Wednesday, September 9, 2009
디도서 3:9 - 3:15
안식일에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을 구분하는 것 등, 율법에 대한 다툼이 교회에서 있었던 모양이다. 유대인들의 족보이야기도 나온다. 아마도 구약에 나오는 인물을 자신과 연결시키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류의 일은 주로 조작이 많은 법이다. 조상이 훌륭했다고 아니면 다니던 학교가 훌륭하다고 아니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가 훌륭하다고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신앙은 이력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자신 혹은 조상의 화려한 경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런 족보이야기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되어 한새사람 (one new man)을 세우는 데 방해가 된다.
Friday, September 4, 2009
디도서 2:1 - 2:10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난다.“in every way they will make the teaching about God our Savior attractive.”나도 당신이 가진 그 비밀을 알고 싶으니 가르쳐 주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경험과 지식은 있는데, 아무도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다. 나의 삶이 지금까지 배워온 것을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영에 찬미와 기쁨이 채워지고 나의 혼과 육에 흘러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Thursday, September 3, 2009
디도서 1:12 - 1:16
헬라어에 “거짓말하다”라는 동사는‘그레데인 노릇을 한다’의 뜻이라고 한다. 거짓말쟁이들이 할례당의 거짓 가르침에 넘어간 꼴이다.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이것이 복음이며, 종교적 의식을 통한 정결함은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무효다. 이 은혜의 복음에 우리는 잘 감격하지 않는다. 전통과 종교의식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70년대에 이민 간 사람들은 70년대 스타일의 예배를 고수한다. 분명한 것은 Ceremonially Clean으로 말하자면 바리새인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 성령님 우리의 허탄한 이야기를 불사르소서!
Wednesday, September 2, 2009
디도서 1:5 - 1:11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두고 지도자 (장로)를 세우게 했다. 본문은 지도자의 조건들을 나열하고 있다. 옛날에 다니던 신학적으로 자유로운(?) 교회가 생각난다. 목사님이 여러 신학적 논제들을 다루었는데, 그 분의 일관된 주장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좋은 신자가 되기 전에 인간(혹은 시민)이 되어라”였다. 나는 세월이 가면서 이 주장이 신학적 노선에 상관없이 상당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건한 삶은 다름아닌 투명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람(특히 속칭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믿음의 진정성이 많은 경우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좋은 신자가되기 위해서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하며,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 좋은 신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할례당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이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복음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종교적 삶은 사람들의 무거운 짐일 뿐이다. 복음을 종교적 활동으로 이해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하다.
Tuesday, August 25, 2009
예수 이름으로 하는 사랑의 순종
내 이름으로 사랑해 보거라 <이영길>
출처: http://www.ekosta.org/
캠퍼스에서 지체들을 만나면 그들의 손에 이끌려 자주 별다방 (Starbucks Coffee Shop)으로 가곤 한다. 구석에서 커피 홀짝 꺼리며 나누는 여러 대화들이 있지만 그중 흔한 문제가 관계에 대한 것이다. 여러 지체들을 만나 그들의 대인관계 의 여려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움을 격고 있는 씨름 하는 대상은 다양하다: 지도 교수, 교회의 어느 집사 님 혹은 지체, 같은과 학생, 실험실의 어떤 괴팍한 녀석, 아내 혹 남편, 소그룹의 리이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경험한 어느 동료 교수와의 문제가 늘 생각난다. 그래서 인지 그들이 격고 있는 아픔을 잘 이해 할 수 있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나의 블로그 에 이미 다른 제목으로 나왔지만 "유학생활"이라는 카테고리에 없었던 것이라 이곳에 소개해 본다.
나의 힘으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 때문에 사랑 하게 된적이 있다. 지금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보고 있다. 내가 기적을 일으킨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말씀이 기적을 시작하였고, 그 말씀이 나의 순종을 통해 구체화 된것 뿐이다. 그 기적은 오래전 사랑이야기다. 당시 나는 어느 주립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그곳에 부임하던 첫해에 같은 전공을 지도 하던 어느 여자교수가 정년 (tenure)을 받지 못하고 떠나는 사건이 생겼다. 워낙 성실했던 동료였는데 나는 제법 놀랐다. 나중에 누가 귀뜸해주기를 그 교수는 연구 실적이 많이 부족해서 테뉴어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간 나는 졸지에 동료를 그렇게 잃어 버린셈 되었다.
결국 후임을 뽑아야 하였고, 시간이 부족했던 관계로 급속한 속도로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어 교수를 뽑기로 하였다. 제한된 시간속에 광고 되었으니 제한된 숫자의 응모가 있었다. 그러나 적은수의 응모자 중에서 청빙위원회는 어떤 두 applicants를 학과장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학과장은 청빙위원회의 추천을 무시한채 어느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던 응모자와, 청빙위원이 추천한 두명과 함께 초대하여 인터뷰를 진행 시켰다. 물론 청빙위원의 추천에 속하지 않았던 세번째 그 여교수를 모두 기뻐하지 않았다. 결국 학과장은 세번째 여교수에게 좋은 조건으로 오퍼를 하였다. 이유인즉은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채용된 여자 교수의 이름은 티나 (가명) 였다. 나와 티나는그렇게 만났다. 키도 나보다 훨씬 크고, 금발머리였고, 목소리는 우렁차고 공격적이었다. 표정은 항상 경직되어 있었고, 자기 주장이 몹시 강한 사람 같았다. 교수회의에서는 유독 자기 생각을 분명히 나타내기도 했고, 어떨때는 심각히 따지기도 하는등 다른 교수로 부터 적개심도 유발할 정도였다. 강의실에서도 여전하여 학생들로 부터 환영 받지 못하고, 여러 학생들이 강의를 더 들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티나의 시작은 많은 잡음을 내고 있었다.
티나가 나보다 대학에 더 오래 있었던 이유로 인해 그녀는 나의 전공분야에 코디를 맡게 되었다. 둘이서의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나의 의견을 수렴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냥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동료 교수들도 힘들어 하였고, 학생들과 나 또한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전공이라 티나를 advisor로 둔 학생 30여명은 티나를 찾기 보다 나를 찾음으로 나의 생활은 더 바빠 졌다. 티나로 부터 받은 어려움과 부당한 대우를 호소하는 학생들을 매번 상담해야 하였다. 나또한 티나로 인해 어려웠음으로 나도 상담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새벽 기도때 나는 하나님께 강하게 호소 하였다. "나를 그곳 대학에서 떠나게 하던지 티나를 떠나게 하던지 주님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대들기도 했다. 몇달을 기도했지만 티나도 그곳 주립대학에 있었고, 나도 그대학에 있었다. 무너지기를 갈망했던 나의 여리고성은 무너지지 않고 그냥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을 맛이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의 어려움은 더 어려워져 갈 뿐 호전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말씀을 읽는데 "티나를 사랑할 수 없겠는냐?"라는 세미한 내적 음성이 들리는듯 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티나가 내 이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동의 하는 움직임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하게 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즉시 뿌리 쳤다. 내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내 학생들은 사랑할 수 있지만 티나는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좌우로 저의며 강하게 부정했다. 결국 그날의 기도는 중간에서 멈추고 교회를 뛰쳐 나왔다.
문제는 그 뒤에 또 생겼다. 매번 새벽 기도시 읽는 본문 말씀중 "사랑"이라는 단어는 나로 하여금 티나만 생각나게 만들었다. 나는 괴로 웠고, 또 부정하며 교회를 나왔다. 세번째에 똑같은일이 반복해서 생기자 나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위해서도 나는 더 이상 도망다닐 수 없었다. "주님, 싫지만 순종하겠습니다!" 그날은 순교할 각오로 학교에 출근했다. 아침 부터 가슴이 쿵쾅거리며 견딜 수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마자 티나의 방을 노크하였다. 티나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랬지만 불행히 그녀는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노크를 했기에 문은 열렸고, 문을 열어 주었기에 나는 들어가 앉아야 했다. 나는 몹시 경직 되어 있었다. 평소 만날때도 경직 되었는데, 그날 사랑을 고백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내 얼굴을 응시 하는 것이었다. 사랑을 고백해
야 하니 우선 사무실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래서 문을 닫아도 되겠냐고 경직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이지"라는 대답과 함께 문을 닫았지만 긴장 떄문에 좀 세게 닫은것 같다. 화난 동양 녀석이 인상쓰고 아침 부터 들어와 문을 쾅 닫았으니 티나의 표정도 긴장으로 가득해 보였다.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사랑한다고 말은 해야 하는데 정말 당황 되었다. 차라리 화장실에서 거울 보며 연습이라도 할것을 그냥 들어온것 같아 후회 막심이었다. 그같은 많은 생각으로 인해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그냥 티나의 얼굴만 긴장하여 째려 보았고, 그런 나를 티나 또한 노려 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주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떠듬거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것 같다. "나는 크리스쳔이라 매일 아침마다 기도 하고 있다. 너하고 불편해서 계속 기도하는데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았다. 그래서 사랑한다라고 말하러 왔다. 내 하나님 때문에 너를 사랑한
다!"
고등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마치고 놀고 있는 자녀 하나를 더 둔 이혼한 티나 앞에서 이같이 말을 했으니 이제 과격한 티나가 어떻게 나올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그 말을 내 뱉어 버리자, 이번에는 티나가 나를 노려 보았다. 처음보다 얼굴이 더 긴장되어 보였다. 쥐 구멍이 있으면 들어 가고 싶었다. 꼭 이렇게 해야 예수 믿는 것일까? 주립대학에서 하나님 이야기에다가, 남자 교수가 이혼한 여자 교수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니 결과는 어떨까? 그동안 나로 인해 자신의 마음도 몹시 상해서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터인데 내가 하나님때문에 고스란이 당했다고 생각했다. 등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며 나는 괴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티나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었다. 나는 "이제 하고 싶은 말 했으니 난 자리를 뜨겠다"라는 말을 남기도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오고 싶었
다. 그러나 그 순간 티나의 눈이 젖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정이 풀려 감을 목격했다. 젖은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맙다, 영길아!" 라고 말하며 계속 울고 있었다. 우리는 말이 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티나는 울고, 나는 어찌할줄 모르는데 어색하게 앉아 있었고. 티나는 입을 열어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25년전에 만나서 결혼했고 아이도 둘 있는데 남편을 떠나야 했었다. 남편으로 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살고 있었고, 부부 관계는 너무 어려웠다고 고백하였다. 아이를 하나씩 나누어 헤어지자고 하여서, 남편은 큰아이를 데리고 살고, 자기는 둘째 아이와 살고 있다고 하엿다. 그때의 상처가 너무 컷다고 한다. 남편이 너무 싫었고, 큰 아이는 너무 보고 싶었고... 이후 우울증이 자신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삶은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 같은 사람을 누가 사랑한다고 하여 믿기 어려울 만치 기쁘다고 한다. 전에 남편이 프로포즈할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한적이있을뿐 아무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아침을 그렇게 보내고, 각자 강의 하러 가야 했기에 우선헤어졌다.
나를 위해 중보하던 아내에게 오전에 티나와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저녁 아내가 빨간색 장미꼿 24송이 (twodozens)를 사들고 티나네 집을 찾아 갔다. 문을 열어 주던 티나는 24송이 빨간색 장미를 받고 또 울더라는 것이다. 남편이 프로 포즈 하며 사랑한다고 할때도 빨간색 장미 24송이 였다고 한다. 아내는 그날 어느 가게에서 장미꽃을 대폭 세일을 하기에 two dozens를 산것일 뿐인데... 아내를 꼭 껴안으면서 고맙다라는 말을 연실하며 흐느끼는 티나를 뒤로 하고 아내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우리 부부는 티나의 집을 또 방문하였고, 서로의 삶을 이야기 하였다. 우리 부부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대학때 철없이 어느 남자를 만나서 관계를 갖고 딸 아이를 낳았지만 키울 수 없어서 입양기관에 넘겨준 아픈 사건으로 자신의 삶은 죄의식과 아픔으로 힘들었다는 이야기 부터 시작하여 많은 삶의 이야기를 큰 보따리를 풀듯 털어 내었다. 울고, 웃고, 또 울고... 우리는 이렇게 친구가 되었다. 주말에는 우리 두 아이를 돌보아 줄테니 영화를 보던 데이트를 하던 놀다오라고 하여 아이들도 몇번 맡아 주었다. 우리아이들에게 책도 읽어 주고 샌드위치에 꿀 발라 먹는 것도 가르쳐 주며 아이들을 아
주 잘 돌보아 주었다.
티나는 편집을 아주 잘하는 은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글을 써서 좋은 저널에 논문도 몇편 내기도 했다. 수년 동안 출판한 논문이 한편도 없었던 티나는 나와 글을 쓰면서 몹시 의욕에 차 있었다. 워낙 글을 잘 다음어 주어서, 나의 글이 티나의 손에 들어가면 아주 깔끔해 지는것을 보며 많이 놀랐다. 물론 나는 그것을 거침없이 표현했고, 티나는 그같은 나의 피드백과 저널 편집장으로 부터의 칭찬으로 글쓰는 일에 매우 의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티나로 인해 학생들의 불평도 적어져 가고 있었다. 동료 교수들도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의 평가가 여전히 나쁨으로 인해 티나를 내어 쫓느냐 아니면 기회를 주느냐 토론하며 각각의 교수들을 학과장이 만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티나를 내보내는것에 동의했지만, 나는 티나가 처음과 달리 아주 잘 하고 있음을 여러 근거를 사용하여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그동안 둘이서 1년간 출판한 논문 세편은 학과 교수 15명이 쓴 논문 숫자의 합한것과 같았다. 결국 학교는 티나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즈음에 나는 다른 어느 주립대학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래서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다. 오퍼 받은 대학은 티나가 전에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이라 아주 기뻐 하였다. 물론 섭섭함으로 실망도 하였지만... 그곳에 집을 팔지 못한채 새로 이사갈 곳에 집을 사야 하였기에 금전적으로 아주 어려웠다. 사고 싶었던 집은 방이여섯개라서 학생들이 편안히 와서 쉬어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2-3분 걸어가면 공원도 있어서 청년들에게 너무 좋을것 같아 꼭 사고 싶었다. 그러나 그집에 누가 조건부 오퍼를 이미 넣은 상태이었다. 오퍼를 넣은 사람은 자신의 집을 팔면 그 돈과 융자금으로 사는 것을 조건으
로 하였기에 우리가 은행의 융자를 얻을 수 있으면 그 오퍼를 제끼고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은행에서 융자가 나왔지만 약속된 수일내 까지 현금 $5,000이 있어야 부동산 (집) 구입이 체결 (closing)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5,000이 나올길이 없었다.
티나는 아내와의 교제 속에 우리의 이같은 실정을 들었던 모양이다. 이사를 앞두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학교 사무실에서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짐을 싸고 있었다. 한참 짐을 싸는데 티나가 얼굴에 땀이 범벅이 된체 내 사무실을 급히 들어섰다. 4층에서 부터 더운날 걸어 왔으니 더웠을 것이다. 그런데 씩씩 거리는것 보니까 뛰어 온것 같았다. 반가워서 웃으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했더니 두툼한 두 주머니에서 쌍권총을 빼듯이 현금을 빼어 드는 것이다. "내 부모로 부터 거저 받은 돈이니 나도 네게 거저 주는 돈이다. 몇일 후 집 closing할때 사용해라! 갚을 생각 안해도 된다. 내가 너희 집 방문
하며 그냥 공짜로 잠만 재워주면 된다!" 그렇게 말하고는 사무실을 빠져 나가 버렸다.
결국 새로운 곳에 집을 샀다. 그리고 먼저 집은 한달 후 팔 수 있었다. 덕분에 $5,000을 티나에게 되돌려 줄 수 있었다. 근사한 선물과 더불어. 새로운 곳에 이사간 이후 어느날 집 고칠때 사용하는 도구가 100개가 있는 파란색 도구박스 (Tool Box)를 문앞에서 발견했다. 티나가 5시간 운전해서 새로산 집 문앞에 도구박스를 두고 간것이다. 집고칠때 필요로 할것 같고, 네 집에는 그같은 도구박스가 없는듯 하여 네 집에 놓고 간다. 잘 사용하도록 해라!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주님때문에 억지로 사랑한다고 말한것 뿐인데, 너는 네 마음을 다 주고, 돈도 주고, 툴 박스도 주고...
이 기적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조그만 순종으로 경험한 이 사건은 내게 하나님의 크심을 늘 상기 시킨다. 우리에게 사랑하라 하신다. 그 이웃이 내게 어려움과 해를 끼치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은 댓가를 지불 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같이 형편 없는 인생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면 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캠퍼스로 부름 받고 그곳에서 훈련 받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가 가는곳 마다 사랑의 기적, 사랑의 혁명을 이르켜야 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요 13: 34).
Friday, August 21, 2009
얼굴
얼굴은 얼(정신 혹은 혼)의 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지나간 역사들이 얼굴에 드러난다고 얘기인데 앞으로 얼짱으로 살려면 오늘부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연습을 해야겠네요.
Friday, July 31, 2009
느헤미야 4:1 - 4:12
방해꾼들은 비웃음, 업신여김의 수준을 넘어 이제는 살인의 협박까지 하면서 느헤미야를 조여온다. 유다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지치고 그들의 협박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비웃고 업신여기고 겁박하는 이유는 적들이 그만큼 우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로 싸움은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면 된다. 하나님! 오늘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을 발걸음을 옮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하사 주님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hursday, July 30, 2009
느헤미야 2:11 - 2:20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의 재건을 구체적으로 시작한다. 느헤미야는 현장에 나가 상황을 점검하고 사람들의 협조도 얻어낸다. 그러나 이를 업신여기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방인 출신인 산발랏, 도비야, 게셈들이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는 언제나 업신여기고 비웃는 사람들의 방해가 있다. 느헤미야에게 두가지 태도를 배운다. 첫째,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한다는 분명한 확신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둘째, 느헤미야의 헌신이다. 그들의 방해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그의 종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겠다”고 선포하고 그 일에 헌신한다. 주님. 느헤미야의 이런 확신과 헌신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우리를 고치소서.
Monday, July 27, 2009
느헤미야 1:1 - 1:11
느헤미야는 에스라, 에스더 등과 같이 바벨론 포로 후기 생활과 포로귀환에 대해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의 유다 땅으로의 3차 귀환과 예루살렘 성벽 중건의 역사를 다룬다. 예루살렘에서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성전 건축이 시작되고 몇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공이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아직 성벽이 없어 귀향한 자기 백성들이 큰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한다. 시대와 사람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느헤미야의 애통함... 온갖 훈련프로그램으로 두뇌만 거룩한 사람은 이런 중보자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의 헌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주여 오늘도 이런 슬픔을 가진 종들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소서!
Saturday, July 25, 2009
QT-시편 33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한다고 뭔가 떳떳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당대의 의인이라 불렸던 믿음의 선진들도 그들이 좀 훌륭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기에 의인으로 불린 것이 아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기셨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회복된 관계에 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살피시며 건지시며 살리시는 분이심을 계시하신 하나님... 내 영혼아 그의 인자와 긍휼이 영원하심을 찬양하라.
Friday, July 24, 2009
QT-고전 9:23 - 9:27
운동선수들이 메달을 따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다. 첫째, 절제해야 한다. 둘째, 방향이 올바르고 분명해야 한다. 셋째, 집중하여 힘의 낭비를 줄여야 한다. 영적훈련도 다르지 않다. 절제하지 않으면 중독된다. 내 몸을 쳐서 복종하는 삶, 절제하는 삶이고 기도하는 삶이다. 오늘도 말씀하신다. 절제하고 기도해야 이긴다.
Thursday, July 23, 2009
QT-고전9:13 - 9:22
바울은 다문화 선교의 원조다. 그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문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했다. 초기의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게 인식되지 않던 시기에 이런 그의 모습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영혼구원에 있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면 전통, 건물, 종교적인 틀만 남는다. 과거의 movement 를 추억하며 monument를 남기고 조용히 사라진다. 인도네시안들에게 인도네시안이 된것 같이, 싱가폴 사람들에게 싱가포리안이 된것 같이... 이는 결코 쉽지 않다. 내 안에 그리스도 (the anointed one)가 부어지지 않으면... 자유인과 종,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 진정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Wednesday, July 22, 2009
QT- 고전 9:1 - 9:12
바울은 자신이 사도권이 없기에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비판에 대해 군인이나 농부나 목자 등이 그 일에서 보수를 받게 된다는 예를 들어 항변한다. 그리고 복음전도가 금전적 이익 때문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자비량으로 비용을 자체 조달하였음을 강조하다. 바울도 인간이었다. 잘먹고 잘살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또 남자였다. 결혼해서 게바 (베드로)처럼 부부동반으로 전도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다 (바울이 결혼을 한 적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이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전도자라도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한 사도라도 사람들의 비판은 피할 수 없는가 보다. 인생의 주인 되신 분을 위해 참고 쓰지 않는 권리.... 믿는 자들의 능력의 비밀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Tuesday, July 21, 2009
QT-고전 8:1 - 8:13
사람들은 저주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상을 섬긴다. 그러나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만물은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물이고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지식이다. 본문은 이 지식을 가진 자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 사랑으로 덕을 세우라고 한다. 이것은 믿음의 윤리적 측면이다. 믿음으로 얻은 자유함으로 윤리적 측면을 무시한다면 교만의 위험에 빠진다. 우리는 지식과 자유는 넘치지만 윤리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희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무섭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도 다르지 않다. 다들 일리 있는 얘기들을 하는 것 같은데 기본예의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은 말을 좀 줄여야겠다. 덕을 세우는 말과 미소를 던지는 것 외에는 고요하게 지내는 것도 좋은 영적훈련이 될 것 같다.
Monday, July 20, 2009
QT-고전 7:29 - 7:40
우리가 늘 초대교회를 교회의 모본으로 삼고 있지만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그들처럼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들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았다. 우리에게 곧 오실 주님은 교리에만 있는 실재 삶과는 거리감이 있다. 어제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정말 통일이 되기를 원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인데 무슨 이런 질문을 하는가? 질문을 바꾸어서 이렇게 물어본다. 정말 주님이 지금 오시기를 원하는가? 지금은 저희들이 좀 바쁘니까 다음에 시간날 때 꼭 전화하시고 오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심정은 아닌가? 경건은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사는 단순한 삶에서 나온다.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38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눈높이식 맞춤 (customized) 교육이 얼마나 필요한지 실감한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아다리" (일본말로 아타리?) 가 맞지 않으면 그냥 흘려 보내 버리기 때문이다. 교육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입장으로 내려가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부담이 되지만 그들을 끌어 올려야 한다. 이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어려움이다. 오늘의 부담스런 본문을 통해서 주님을 위해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를 발견한다. 나를 가르치시기 힘드시겠다는 생각에 성령님께 죄송하다.
Friday, July 17, 2009
QT-고전 7:17 - 7:28
일상의 삶에서 사회적 신분이 너무 중요하다. 자신을 소개할 때도 신분으로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육에 대한 엄청난 열정도 알고보면 사회적 신분상승이 그 이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과 자유인의 구분이 없다. 종은 노예근성으로 살지 않으며 자유인은 종처럼 행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런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여유로움이 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이며 사람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를 섬기듯이 일하는 것. 그 자유함으로 주님은 오늘도 나를 초청하신다.
Wednesday, July 15, 2009
QT-고전6:12 - 6:20
주께서 허용하신 것들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허용하신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그기에 매여서 살 수도 있다. 선택 가능한 개인적 자유를 주님께 드릴 때 신적인 삶, 능력있는 삶으로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성령님. 허락하신 것들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온전한 뜻이 나의 삶 속에 이루어지게 도와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Monday, July 13, 2009
QT- 고전 5:1 - 5:13
유월절에 유대인들은 양을 잡고 묵은 누룩을 집안에서 제해야 했다.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누룩없는 순전한 삶이 요구된다. 문제는 죄의 결과에 대한 심각성이 무뎌지고 그 죄를 허용하는 것이다. 나의 제해야 할 묵은 누룩은 무엇인가? 누룩없는 떡으로 오늘 하루를 드리자.
Friday, July 10, 2009
QT-고전 4:14 - 4:21
20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
고린도교회는 지식과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들보다 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골치다.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고린도로 가서 그들의 능력을 평가해볼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말로는 바울을 이리저리 평가할만큼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울은 알았다. 능력은 없고 그저 말뿐이라는 것을. 지금도 좀 쓰임받고 알려진 지도자들을 향해서 얼마나 말들이 많은가? 이런 부류는 주로 좀 배웠다고 말씀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본문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음을. 능력은 좀 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능력은 바울을 본 받는 삶에서 나온다. 바로 인간적으로 지혜롭고 높아지는 것 대신 어리석고 낮아지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능력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삶에서 나온다.
Thursday, July 9, 2009
QT-고전 4:6 - 4:13
To this very hour we go hungry and thirsty, we are in rags, w e are brutally treated, we are homeless. 12 We work hard with our own hands. When we are cursed, we bless; when we are persecuted, we endure it; 13 when we are slandered, we answer kindly. Up to this moment we have become the scum of the earth, the refuse of the world.
고린도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왕처럼 존귀해졌다. 바울은 어떠한가? 주를 위해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홈리스 (homeless)가 되고, tent maker 로 다른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았고, 모욕을 당해도 축복하고, 박해를 인내하며, 비방을 받아도 권면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솔직히 우리는 무슨 영적인 고수가 된 것처럼 배부른 교인들을 향해서 안타까워하는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이해하기에는 성공이나 성장에 관심이 너무 많다. 영적인 에너지는 떨어질 때 발생하는데 온통 올라가려고만 하니...
Wednesday, July 8, 2009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코스타 2009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Shalom of Jesus, Courage against the World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길을 걷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아무리 그 길이 가치 있고 소중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길을 가는 일은 우리를 쉽게 절망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밝은 결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더욱이 그 밝은 미래를 현재의 삶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면, 지금 가는 그 길이 아무리 어둡고 험해도 우리는 그 두려움과 싸울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사는 일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바로 그 로마의 손에 잡혀 매 맞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서 친구가 되는 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일, 한 사람의 가치를 효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일,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그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 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델이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가 선뜻 들어서기에 두렵고 좁은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두렵고 좁은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셨고, 우리에게도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가신 그 길에 담대하게 들어서라고 초청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 끝에 밝은 미래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 어둡고 험한 길을 가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길이 승리의 길이라는 것,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명백한 증거는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바로 그 육체를 입고 다시 이 땅에서 부활하셨다. 생명이 사망을 이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만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 사셨다. 동시에, 예수를 왕으로 모신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을 입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할 모든 육체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그 길의 끝에 있는 밝은 결과, 그때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Shalom)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평화(Shalom)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미래에 있지만,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그 완성된 하나님의 평화(Shalom)를 경험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속에서 어그러진 질서와 그릇된 세계관에 대항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절대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혹시 있을 수 있는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또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에 거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삶을 사는 가운데, 완성된 평화(Shalom)를 경험해 갈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KOSTA-2009 운동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를 알기 원한다. 세상이 비웃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이 땅을 사신, 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한다. 결국에는 이 땅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평화(Shalom)를 이루실 것이며,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그 완성된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를 경험하기 원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를 다시 추스르고자 한다.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 큰 불안으로,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잃어버릴 것에 대한 또 다른 불안감으로 사람들을 노예 삼는 어그러진 풍조를 향해 진정하고도 유일한 대안을 우리가 삶으로 보여주기 원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꿈을 잃어버린 세대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Shalom)안에서 우리는 다시 꿈과 이상과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선포하기 원한다.
QT-고전 3:21 - 4:5
일꾼의 덕목은 충성이다. 충성은 꾸준함이다. 사람들의 칭찬에 교만하거나 비판에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판단과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당장의 시시비비에 매이지 않는 것이다. 한자어의 모양대로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두는 것이다. 주님. 오늘도 은혜의 삶을 사는 자유함으로 맡겨진 길을 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uesday, July 7, 2009
QT-고전 3:1-20
For no one can lay any foundation other than the one already laid, which is Jesus Christ.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로 비유하면서 고린도교회가 “예수(는)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세워졌음을 말한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성령님이 오셨다. 본문은 믿는 성도들이 성전이며, 그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로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대체하는 것. 유행을 따라서 용하다는 것들로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똑똑한 사람들이 내공싸움을 벌이고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를 더럽힌다... 왠지 안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이 쎄하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이 고백으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Friday, July 3, 2009
QT-고전 2:4-11
자칭 왕이라 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보고 싶지 않은 비극이고 헬라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런 희극일 뿐이다. 그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구원계획,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어찌 알겠는가? 하나님은 이 비밀을 성령을 통해서 계시해 오셨다. But God has revealed it to us by his Spirit. The Spirit searches all things, even the deep things of God. 이 비밀을 아는 것이 하늘의 지혜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님... 솔직히 나에게 그 분을 아는 지식이 너무 없다...
Thursday, July 2, 2009
QT-고전 1-2장
1-22 Jews demand miraculous signs and Greeks look for wisdom, 23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a stumbling block to Jews and foolishness to Gentiles, 24 but to those whom God has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2-4 My message and my preaching were not with wise and persuasive words, but with a demonstration of the Spirit's power…
서양사상의 두축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전자가 종교적 축이라면 후자는 인본주의의 축이다. 예수의 복음은 신본과 인본 두가지 모두에게 외면당한다. 영광스런 메시아(그리스도) 를 기다리던 히브리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그리스도의 표적(sign) 이 될 수 없었다. 인간적인 지혜를 쫓던 헬라인들에게는 그런 예수를 믿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복음의 전달자나 피전달자에 상관없이 문제는 가지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가진 것 때문에 생긴다. 능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 안에 갇혀서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말씀의 지식에 갇혀서 어떤 이들은 은사에 갇혀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 (많은 경우 이 두파는 서로를 비난한다). 사도 바울처럼 심히 두려워하고 떨리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지 않기에 그런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Wednesday, July 1, 2009
QT-로마서 1:17-28
바울의 이 메시지를 듣고 있으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컥하면서 뭔가가 올라온다.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를 헛되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듣고 전하는 복음은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우리의 구미에 맞는 그런 복음은 아닌가?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서도 복음의 그 폭발적 능력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인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가? 어느 주석가는 “제자 삼으라”는 말씀을 “너와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라” 로 해석했다. “나를 교훈 삼아서 나의 전철을 밟지마라”라고 말하면 마음이 편할 것인데 그런 해석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씀은 나를 구원의 삶으로 초청하신다. 쇼는 그만하고 나는 정직하게 이 말씀에 반응해야 한다.
Saturday, June 27, 2009
Friday, June 26, 2009
상처입은 치유자
Thursday, June 25, 2009
마지막을 알면 포기하지 않는다
1952년 9월 4일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양편의 구조선이 전부였고 이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안개가 꽉찬 바다였지만 성공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목표지점을 마음속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QT-창세기 50:15- 26
창조와 시작의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알면서 형제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구원의 역전 드라마를 알면 용서할 힘이 생기고 더이상 사단에 농락당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이로써 하나의 부족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이 국가단위로 자라나는 정신적 물질적 기초가 마련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난일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로 사용된다.
Wednesday, June 24, 2009
QT-창세기 49:29-33
막벨라 동굴. 약속의 땅이라지만 가나안에 있는 히브리인의 유일한 소유지였다. 아브라함이 장차 후손들이 이국땅에서 400년 종살이를 한 후에 되돌아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후에 믿음으로 구입한 땅이었다. 야곱에게도 그 가나안 땅은 후손들이 지금은 고센지역에서 잘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이었다. 이렇듯 믿음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지금 준비하고 행하는 것이다. 사실 애굽도 가나안도 다 하나님의 땅인데 애굽에서 자손들이 터 잡고 더 잘살수 있도록 야곱을 기념하는 큰 무덤이라도 만들면 될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400년 후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장대한 구원의 역사를 모르는 다분히 인간적인 생각인 것이다. 난 오늘 다시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약속의 땅은 어디인가? 바라 보아야 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uesday, June 23, 2009
QT-창세기 48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는 야곱은 이제 그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과 축복을 하게된다. 이 예언은 시의 형태로 후대들에게 남겨졌다.
- 르우벤: 장자. 능력이 탁월하였으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함. 아버지의 첩 빌하와 간통. 탁월하지 못하리라는 예언 받게 됨.장자권 중 물질적인 축복은 요셉에게 영적인 축복은 유다에게 옮겨짐.
- 시므온과 레위: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재미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음. 세겜에서의 살육 사건. 분노에 대한 저주와 이스라엘 중에 흩어짐을 예언.
- 유다: 형제간의 용서와 화해의 역할을 함. 형제의 찬송과 높임을 받고, 사탄의 목을 잡게 될 것임을 예언. 통치권이 실로 (참된 평화, 구세주) 오시기까지 미치며 그 앞에 모든 백성들이 복종하게 될 것임을 예언. 나귀를 타고 오실 평화의 왕이 유다에게서 날 것을 예언.
- 스불론: 이름이 거주지를 뜻함. 지중해에 인접한 거주지에 대해 예언.
- 잇사갈: 이름이 일꾼을 뜻함. 기꺼이 어깨에 짐을 멤. 쉼과 기업을 얻음.
- 단: 뱀이요 독사라고 묘사 (사사 시대에 제일 먼저 우상을 숭배함. 계시록에 단지파가 누락).
- 갓: 이름이 추격하다는 뜻. 추격을 받으나 추격함. 요단 건너편의 땅을 받고 모압과 암몬과 싸움.
- 아셀: 지중해변에 위치. 기름지고 풍성한 식물을 수확.
- 납달리: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암사슴. 가나안 북방의 척박한 땅이 기업. 예수님 사역의 무대.
- 요셉 (에브라임과 므낫세): 샘 곁에 있는 무성한 가지. 가지가 담을 넘음. 요셉의 구원이 온 가족과 열방에 미치게 됨을 예언.
- 베냐민: 물어 뜬는 이리 (호전적 성격으로 다른 지파들과 싸우고 진멸당할 위험을 겪음).
야곱은 아들들을 축복하되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 (giving each the blessing appropriate to him). 야곱의 이말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만일 유다라면 혹은 요셉이라면… 아니라면 받은 축복을 감사하면서도 약간 속이 쓰릴것 같다.
Friday, June 19, 2009
스펄전의 아침묵상 중에서
오 성령이시여, 이 이른 아침 시간에 이슬되어 위로부터 우리에게 떨어지소서! 이 아침에 성령의 이슬 방울이 떨어진다면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또 비둘기처럼 화평한 사랑의 날개로 그의 교회와 성도들의 영혼을 품어 줍니다. 그리고 위로자로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의 평강에 해를 끼치는 염려나 의심들을 몰아냅니다. 또 여호와께서 요단강에 임하셨던 것처럼 택함받은 백성들 위에 강림하시며 그들 안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의 영을 불어 넣어 줌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바람으로서의 성령은 사람들에게 생기를 가져다 주십니다. 그는 임의대로 부시며 소생케 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영적인 생명들이 살아나고 지탱됩니다.
Monday, June 15, 2009
복음과 교회의 회복 - 펌글
우리의 복음은 초라하게 축소되었습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술 한잔 마시고 서로 화해하는 소탈한 용서의 능력조차도 지니지 못한 한심한 모습으로 전락했습니다. 말만 무성할 뿐 능력이 상실된 복음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니 영향은커녕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길에 버려져 밟히는 맛을 잃은 소금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가짜다." 내가 처한 현재의 영적 위치가 내가 받은 권능의 크기를 정해줍니다. 내 안에 십자가의 예수가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권능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가 있는 사람은 부활의 권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 안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의 임재를 날마다 느끼며 사는 사람은 승천의 권능을 누리는 것입니다.우리가 십자가를 우리의 육체로, 머리로만 이해하고 교회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더러는 우리의 혼적인 감성이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많은 눈물과 회개를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의지로 내 영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 까지 나아간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유혹과 분노와 판단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승천한 자리에 까지 나아간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이 사람의 시선은 천국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관점이기에 더 이상 세상의 작은 시시비비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그의 마음에 흐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부활 승천하신 당신의 자유함과 평화와 긍휼과 자비로 우리에게 임하시고 다시 찾아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권능을 받아야 비로소 화목자의 자격을 갖추게 되어 화목케 하는 직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은혜로 구원받아 믿는 자라 할지라도 미처 화목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화목자의 직책을 수행하고자 할 때, 많은 불협화음과 상처와 혼란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을 더 상하게 만드는 일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권능을 받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라고 말씀하십니다.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사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믿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쩌면 신약의 가장 중요한 약속입니다.
구약의 약속이 초림으로 나타나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약속으로 절정에 이르렀다면, 이제 완성된 그 십자가의 약속 위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그의 남은 고난에 채우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제자들에게 부어질 성령의 권능에 대하여 약속하고 떠나셨습니다. 이 권능이 임해야만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했던 약속의 성취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한 새사람을 이루는 신약의 교회의 완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는 우주적 교회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화목된 교회의 완성을 위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보내사 그 일을 맡기셨으며, 보내신 자의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그 성령의 권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정진호 교수 -제삼시
Tuesday, June 9, 2009
QT-창세기 44:1 - 44:17
유다는 이 은잔을 훔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정말 떳떳했다. 그러나”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고 말한다. 과거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그로인한 죄책감이 일순간 몰려왔을 것이다. 이제 막내 베냐민만 남겨두고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형들은 이제 중대한 선택의 문제 앞에 있게 된다. 그 옛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던 동생 요셉을 버린것처럼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베냐민을 버릴것인가? 아니면 요셉의 제의를 거절하고 베냐민과 같은 배를 탈 것인가? 죄의 유혹이 있다. 그 유혹과 시험은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테스트한다. 과거에 실패했던 비슷한 시험과 어려움이 닥친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로 많이 봐주셨으니 이번에도 봐주시겠지 하면서 은혜를 남용해온 기억이 많다. 그래서 동일하게 실패를 반복해온 기억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임을 아는데…
Saturday, June 6, 2009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누구든지 처음은 있는 법. 독수리도 기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가.
처음이니까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많겠지.
저런 초자가 어떻게 이런 현장에 왔나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일을 시작한 지 겨우 6개월 된 나와 20년차
베테랑을 비교하지 말자.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만을 비교하자.
나아감이란 내가 남보다 앞서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데 있는 거니까.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고 실수하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야.... [한비야]
한비야씨 글을 읽고 있으면, 문득문득 이전에 좋아했던 짧은 글들이 생각이 납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간만에 한비야씨 사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발 한발 걸어서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한비야]
다시금 마음을 추스려봅니다. 잔뜩 먼지끼고 녹이 슨 열정의 엔진에 기름칠을 조금씩 시작해 볼까 합니다. 싱가폴이란 산의 중턱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까지 꼭 올라 그 산을 넘고 싶습니다.
"오늘도 나는 행군한다. 지금은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좀 괴롭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기가 꺾여 자신이 없어 질 때마다, 몸이 지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 일때 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싶을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린다..." [한비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10-11]
Friday, June 5, 2009
말씀묵상-출애굽기 28:15-28:43
본문은 대제사장의 장신구 중 흉패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폭과 길이가 한뼘되는 정방형의 주머니다. 금으로 만든 노끈으로 에봇의 가슴에 부착했다. 이 흉패에는 12지파의 이름이 도장처럼 새겨져 있는 12가지의 보석이 가로 네 줄, 세로 세 줄로 달려있었다. 흉패가 "판결흉패"로 불려진 이유는 "우림과 둠밈"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림은 히브리어 첫글자 "알렙"으로 "빛"을 뜻한다. "둠밈"은 히브리어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완전함"을 뜻한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다.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제비뽑기 혹은 빛깔의 변화 등을 통해 판결이 주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과 끝, 빛, 완전함, 이런 것들은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하나님 품속에 계시던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셨다. 오늘 나는 그 분의 품에 안겨서 그 분의 심장 그 분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이 행복을 누가 알겠는가?
Wednesday, June 3, 2009
우리에게는 바람이 필요하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오염물질이 쌓이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다. 바람이 불면 공기 중에 있던 오염물질이 사라진다. 우리의 영적환경은 어떠한가? 시간나는대로 성령의 바람 (프뉴마 pneuma) 으로 우리의 내면을 환기시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땅을 고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Monday, June 1, 2009
말씀묵상-출애굽기 26:1 - 26:14
본문은 전체 성막을 덮을 막(천)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섯 폭 천 두 세트(모두 10폭)로 되어 있고, 천 끝에 50개의 고리, 50개의 금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각 천의 길이는 28규빗(12.6m), 너비는 4규빗(1.8m)이다. 이것들이 다 연결하여 한 성막을 이룬다. 1절의 “그룹 (cherubim)”이 눈에 들어 온다. 이 그룹은 창세기 3장에 등장한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Genesis 3:22-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다시 그곳에 들어갈 수 없도록 그룹이 지키고 있었다. 이 성막에는 엄격한 조건하에 제사장이나 대제사장 만이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그룹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그 대속의 은혜로 막혔던 담이 허물어 지고 하나님를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나아갈 수 있다. 도저히 갚을수 없던 부채를 탕감받고 빚쟁이들에게 눌려 살다가 이제는 그 무거움과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진 하늘나라 Bank Account 다. 그래도 자랑할 것은 없다. 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복음의 능력을 제한시킨다. 마치 자신이 무슨 스스로 하나님이 된것인양 자신의 가진 기준을 사람들에게 들이댄다. 남보다 조금 더 내세울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사람들을 무시한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결사항전이라도 하겠다는 것이 복음의 정신인가? 은혜입은 우리가 왜이리 자꾸 쪼잔해지는가? 모든 담을 허물어 버리고 원수까지도 품어버리는 복음의 그 폭발적인 능력은 영영 사라져버린 것인가? 사분오열 갈라진 조국을 보며 조국의 교회가 자기의 의를 내려놓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Wednesday, May 27, 2009
말씀묵상-출애굽기 23:20-23:33
왕벌을 네 앞에 보내서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을 쫓아 내겠다. 하지만 그 백성들을 일 년 안에 쫓아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땅이 광야가 될 것이며, 그 땅에 들짐승이 너무 많아져 너희를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 백성들을 너희 땅에서 아주 조금씩 쫓아 내리니, 나는 너희가 강해져서 그 땅을 차지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Little by little I will drive them out before you, until you have increased enough to take possession of the land.
기도는 기다림이다. 믿음은 기다리는 동안 변절하지 않는 것이다. 본문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사자(천사)를 앞서 보내 그 길을 지키고 보호해 주시는 약속으로 시작된다. 이 보증으로 깊은 안도감을 갖는다. 언약의 순종에 따르는 축복은 더욱 흥분시킨다. 그러나 그 약속을 성취해나가는 과정은 어떠한가? 우리네 마음같이 단칼에 속 시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왕벌을 보내 히위사람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 내겠다는 확실한 약속에 걸맞지 않게 일은 속터지게 아주 조금씩 (little by little) 진척된다. 기다리는 시간은 믿음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라나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가 묻어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주를 기다리겠다. 보고 싶은 님을 기다리는 이 행복을 누가 알까?
Monday, May 25, 2009
말씀묵상- 출애굽기 22:21-27
오늘 주신 말씀은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다는 것을 잊지 마라"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이 잘 살게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불과 6,70년대만해도 학교도 못가고, 우리의 누나들이 고무신공장, 합판공장, 봉제공장에서 소위 공순이로 힘들게 일하며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언제부터인가 괜시리 우리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쉽게 외국인들을 무시한다. 우리의 스탠다드는 너무 높아졌다. 우리도 얼마전까지 그러고들 살았는데, 이만하면 충분히 감사하면서 살만한데…
나그네, 과부, 고아, 가난한자 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채를 갚을 길이 없어 상해버린 마음, 어쩔 수 없이 종살이하며 눌려사는 포로생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그 절대적 가난…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에 우리는 너무 부유해져버린 것인가? 아! 복음이 주는 자유, 그 은혜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
Tuesday, May 19, 2009
말씀묵상-출애굽기 20:1 - 20:17
본문을 보면서 안식에 관해 생각해 본다. 이에 관해서는 지금도 예수님 당시 만큼이나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것 같다. 예수님은 실상 시간적 멈춤(Sabbath 사밧)에서 안식하는 삶으로 초청하신다. 그와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회복 (메누하)으로 초청하신다. 안식은 예수님 안에서의 삶이다. 오늘도 나를 가두고 짓누르는 것들로 부터 자유를 선포한다. 예수님이름으로...
Tuesday, May 12, 2009
나이들면 더 아픈 이유
언제부터인가 그런 신통한 약들이 사라졌다. 약에 대한 나의 신뢰가 사라진 것이 먼저인지도 모른다. 그런 희한한 기하학적 문양이 있는 벽지도 없어지고 축구중계를 보다가 잠이 든다. 좋아하는 반찬을 기대하는 마음도 사라졌다. 그래서 내가 더 많이 아픈가 보다.
Friday, May 8, 2009
말씀묵상: 에베소서 4:8-12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높은 곳으로 오르실 때 사로잡힌 자들을 이끄시고 그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높은 곳으로 오르셨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이 땅에 내려오셨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까? 이렇게 내려오신 그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하늘 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선물을 나눠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를 돌보는 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선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더욱 강하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이에 있었던 사건은 예수의 하늘로 오르심 (승천)이다. 그 승천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영적인 위치 (spiritual status) 혹은 믿는자들의 권위 (authority) 를 말해주고 있다. 오순절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기전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바로 믿는자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 이름의 권세이다. 이 권세를 알고 있으면 영적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한다. 나의 권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신 분, 그 이름의 권세이다. 이 권세를 알면 전투 가운데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있다.
Wednesday, May 6, 2009
말씀묵상-에베소서 3:1-10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방인인 여러분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For this reason I, Paul, the prisoner of Christ Jesus for the sake of you Gentiles여러분도 분명히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은혜를 나타내시려고 내게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Surely you have heard about the administration of God's grace that was given to me for you, 전에 내가 편지에도 간단히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내게 계시로 비밀스런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that is, the mystery made known to me by revelation, as I have already written briefly. 그것을 읽어 보면, 내가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로운 진리를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In reading this, then, you will be able to understand my insight into the mystery of Christ, 옛날에는 이 비밀스런 진리를 아무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통해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이 신비로운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which was not made known to men in other generations as it has now been revealed by the Spirit to God's holy apostles and prophets그 비밀이란 바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것들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함께 한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This mystery is that through the gospel the Gentiles are heirs together with Israel, members together of one body, and sharers together in the promise in Christ Jesus.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에 대해 바울은 뜸을 들인다. 신비로운 진리 혹은 비밀스런 진리 (mystery)로 표현된다. 그 비밀이라는 것은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몸을 이루는 지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회복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다. 나는 이것을 영적 이스라엘 (믿는자)과 불신자의 관계로 그 뜻을 좁히지 않는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말씀 그대로다.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기도할 때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유대인이다.
Monday, May 4, 2009
Wednesday, April 29, 2009
삶의 잡동사니와 결별
Monday, April 27, 2009
꽉찬시간...
Saturday, April 25, 2009
Friday, April 24, 2009
말씀묵상: 요11:17-27
본문: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 속에 있은 지 사 일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 때, 제 오빠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주신 말씀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예수님의 강력한 질문이다. 마르다는 내가 하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을 한다. 앵무새처럼하는 신학적인 정답: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 때, 제 오빠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구원과 천국을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닥치는 문제와는 도무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아 나의 믿음이여... 얼마나 허탈하고 무기력한가? 그러나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무슨 잠시잠깐 고통을 잊게하는 모르핀도 아니고 탁상공론하는 신학적 명제도 아니다. 바로 눈 앞에 펼쳐지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그런 것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믿을 것인가? 나는 이것을 믿는가?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믿음 없는 저에게...
말씀묵상: 요22:34-43
예수님께서 이 모든 표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에 관하여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을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과 하나님께 칭찬 받는 것" 이다. 사람의 칭찬에 반응하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두려움이다. 요즘 말로 하면 직장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건 좀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 (본문에서는 지도자들) 에게 잘 나타난다. 두려워하는 대상은 바리새인들이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는 범생들이다. 그들에게 꼬투리 잡히면 큰일난다. 잘난 인간들한테 어찌될까봐서... 그런데 수치 중의 수치는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셨다. "인자는 들려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무슨 망신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Lifted up"은 똑똑한 사람들의 눈에는 수치스런 죽음으로 보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이사야는 이 영광을 보았다. 오늘 나는 다시 선포한다. 나의 보스는 예수님이다. 누가 뭐래도.
말씀묵상: 요16:16-16: 24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할 것이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슬퍼할 것이지만, 너희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다. 출산하는 여인에게는 출산할 때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여인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너무 기뻐서 그 고통을 잊어 버린다.너희도 지금은 근심하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는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너희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전에는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분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것이요, 너희 기쁨이 가득 찰 것이다.”
오늘 주신 말씀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것이요, 너희 기쁨이 가득 찰 것이다." 이 얼마나 익숙한 말씀인가! 그러나 거의 지켜지지 않는 말씀인가! 사실 남들 앞에서 기도하는 척은 할 수있다. 하나님은 속일수 없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들에는 솔깃해지면서 도대체 예수님 말씀은 나에게 뭔가? 헌책방 한켠 어느 책속에 있는 그런 말인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에서 말미암는다고 한다. 그 말씀은 로고스가 아니다. 그것은 레마다. 살아서 역사하는 그런 말씀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자. 언제까지 쇼(show)를 할 것인가? 이제 믿음으로 구하자. 예수님이름으로...
말씀묵상: 요19:17-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십자가 고난의 절정, 그 마지막 순간에 드러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의 아들이다. 그도 나처럼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고 직업도 친구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의 아들로 믿는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러 오신 분이시다. 사단의 전략은 이분의 두가지 본질을 갈라 놓는다. 그분은 하나님이지만 육신을 입고 사신 분이다. 그분은 육신을 입고 사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내신 분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이 사는 사람이다. 두가지 길에 갈등이 없는 사람이다. 주님. 오늘도 이땅에서 발딛고 살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하루를 살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묵상: 요 20:11-23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마리아는 흰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두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천사는 머리 쪽에, 다른 천사는 발 쪽에 있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소?”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어디론가 가져갔는데,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 관리인인 줄로 생각하고 “저, 당신이 그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면, 어디로 옮겨 놓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셔 갈게요”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한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마리아...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통상적 반응이다. 부활사건 그것은 어느 우스꽝스런 소설 아니면 간절한 집착이 일으킨 정신병적 착란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은 안믿는 사람들의 그저그런 얘기가 아니다. 믿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얘기다.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은 미처 알지 못하던 것들, 믿을수 없는 것들이 마음과 눈앞에 활짝 펼쳐지는 사건이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들을 뛰어넘어 천군천사들의 세계가 열리고, 죽음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계획이 드러난다. "바로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난다. 그 부활의 주님은 바로 오늘 여기에 계신다....
스바냐 1-2장 묵상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1:12)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1:18)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2:3)
스바냐는 요시야왕이 신앙개혁을 하던 시기의 선지자다. 종교적 타락은 그 시대의 문화와 경제활동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겉으로는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의 기반은 허약하다. 몇년전 미국의 주택경제 쪽으로는 알아준다는 경제학자가 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녀는 미국주택시장에서 버블은 없다고 했다. 그녀는 한마디로 허당이다.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데이타로 현상을 이해하는 학문의 한계인 것이다. 그 데이타라는 것은 많은 경우 조작가능하거나 숨길 수 있다. 이 경제의 위기는 금융시장의 위기이기 이전에 도덕의 위기인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신앙의 위기이다.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못하고 화도 못내는 무능하고 몰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진노와 심판. 언제부터 호랑이 담배피던 노아의 홍수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에나 등장하는 잊혀져 가는 말들이다. 이런 것들은 사탕발림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니 그 분과의 사귐이 너무 얕다. 나는 오늘 개인적인 문제들보다 "하나님의 경제와 정의"를 묵상하고 기도한다. 그 분은 정의를 사랑하고 겸손을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